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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141화 (141/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42화.

“그러지.”

샬롯은 조심스럽게 앤시아가 의도하는 대로 아이를 감싼 커다란 천처럼 보이는 겉옷을 벗겨 냈다. 그러면서도 손안에 쥐어진 부스럭거리는 무언가를 티 나지 않게 감싸 잡았다. 그 모습에 안도한 앤시아는 아기를 건네받기 위해서라는 듯 자연스럽게 바싹다가가 속삭였다.

“오랜 중독 증상에 도움이 되는 약재입니다.”

샬롯은 대답 대신 앤시아를 노려보았다. 당최 의중을 알 수 없는 앤시아의 행동이 불쾌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앤시아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혹여나 여기서 노여움을 사약초를 내보여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독초를 가져온 것도 아니고 자신이 먹는 약이라고 둘러댈 구실도 준비해 두었다.

아이의 겉옷을 조심스럽게 벗기며 샬롯 또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작 나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한 거라면 참으로 어리석구나.”

“황제 폐하를 만나 뵙지 못한 경우도 생각해 둬야 했으니까요.”

“내게 이러는 건 차선이란 말인가……. 직접 가져왔다면 게이트도 넘지 못했을 텐데. 준비가 철저하군.”

공작 부부의 몸수색은 철저했으나 소문의 근원지인 아기에게는 이렇다 할 검사를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황제가 먹어 온 독을 해독할 수 있도록 배합된 약재를 숨겨 오기에 적절했다.

처음에는 말로 전하거나 종이에 적어 건넬까 생각도 해 봤지만, 황태자의 태도가 거침없는 만큼 황제의 병세도 깊을 것 같다는 우려에 약재로 준비했다.

혹 오늘 황태자의 수작으로 황제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 해도, 차선책으로 황녀를 만나 약재를 전달할 수 있으면 절반은 성공이었다. 물론 황녀가 앤시아를 믿게 하는 건 힘들 수 있으나 황제의 안색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는 걸 곁에서 봐 온 딸이라면 약재의 정체를 알아볼 것이라 믿었다.

이 자리에서 황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리샤르에게 부탁하려 했는데 다행히 일이 잘 풀려 갔다.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요. 최선을 다했어요.”

“그대는 공작 부인임에도 어린 영애 같은 말투를 사용하는군.”

“예법이 부족해 죄송해요. 황녀전하가 친근하게 느껴져서 그랬나 봐요. 전하께서 초대해 주시면 좀 더 열심히 공부해 보겠습니다.”

“황족의 초대를 바란다기엔 핑계가 어설프군.”

다행히 샬롯은 잠시 불쾌해했을 뿐, 이내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히려 처음보다 더 온화해진 시선에 미약한 호의가 언뜻 비쳤다.

“이건 내 알아서 하지.”

“네, 잘 부탁드려요.”

아이의 옷을 손에 쥔 샬롯의 주어를 뺀 대화에 근위기사가 아리 송한 얼굴을 했다.

이후로 다른 황족들이 올 때까지 샬롯과의 대화는 없었다. 몇 번 시선이 마주치기는 했으나 그때마다 은은한 미소가 오갔을 뿐이었다.

열 명에 가까운 황족이 모였음에도 쥐 죽은 듯 조용한 복도에 근위기사들이 양쪽으로 늘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인 양 카일루스가 나타났다. 그의 시선은 앤시아가 안은 아기에게 못 박힌 채 지금까지 봐 온 표정 중에서도 가장 환한 미소를 띠었다.

“어서 오시게, 공작. 아름다운 부인과 온 세상의 축복을 받아 마땅한 소공작의 첫 입궁을 환영하네.”

아직 이름도 없는 아기를 지칭하기에는 과했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단지 여기선 비꼼을 우아하게 내지른 것뿐이었다.

앤시아는 그런 카일루스의 치졸함에 내심 안심했다. 황제가 될 사람이 저리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우며 집착하다니. 아직 황태자일 때 끌어내리자 결심하기를 정말 잘했구나 싶었다.

“제1 황태자, 카일루스 드미트리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카일루스가 도착하자마자 알현실 문이 열렸다. 당연히 비어 있으리라 예상했던 알현실에 이미 황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아비가 자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상황이었다.

앤시아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을 스쳐 가는 황족들을 살폈다. 황녀가 조금 쓴웃음을 지은 것 빼고는 누구도 이 일에 놀라 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카일루스의 뒤를 따라 순서대로 들어갈 뿐이었다.

‘이미 황태자가 황제만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구나. 어쩌면 그보다 더.’

어쩌면 너무 늦었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황자와 황녀들이 각각 순서대로 자신의 위치에 선 후에야 공작 부부도 뒤를 따라 알현실로 들어섰다.

멀리서 힐끗 본 황제는 왕좌에 기울어져 앉아 있었다. 무기력해 보이고 흐릿한 이미지라 정말로 늦은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

‘아냐. 원래대로라면 리샤르가 비앙카를 데리고 황궁에 온 후에 알아챘는걸. 그보다 훨씬 앞당겨 왔으니 걱정 없어.

“짐의 후계자가…….”

느릿하게 열린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그의 나태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묵직했다.

숙인 고개가 더 깊어질 만큼 위엄 있는 목소리였다.

저게 다 죽어 가는 황제의 목소리라고? 절로 의문이 들 만큼 연륜이 묻어났다.

“과거 친우였던 그윈티드 공작가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다 하여 초대를 권하였노라. 황태자의 마음 씀씀이에 감사하라.”

여기도 엎드려 절받기 시전이냐.

황제의 말에서 그가 가진 카일루스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하긴, 지금은 황제의 비위를 맞추며 그의 건강을 서서히 망가트리는 데 주력하고 있을 테니 입의 혀처럼 얼마나 편할까.

“고개를 들라.”

황제의 허락에 앤시아는 아기를 품에 안은 채 숙였던 허리를 천천히 들었다.

와. 미모 무엇.

멀리서 무기력하게만 보이던 황제는 가까운 곳에서 보니 느른한 자세마저 배부른 사자의 여유처럼 느껴질 만큼 왕좌가 자연스러운 이였다. 병색이 짙어 창백한 피부와 그늘진 눈이 권력자의 분위기와 어우러지자 퇴폐미마저 느껴졌다.

“황태자가 좋은 신붓감을 소개해 주었군.”

“황공하옵니다.”

외형만 보고 하는 칭찬이었으나 앤시아는 즉각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했다.

“듣자 하니 소공작의 이름을 아직 정하지 않았다지? 무거운 걸음을 하였으니 바라는 바가 있는가.”

모든 상황을 알고 있으니 에두르지 말라는 듯 본론부터 던지는 황제에게 리샤르가 나섰다.

“그윈티드의 정통 후계자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에 아내가 깊이 상심하였습니다. 폐하께서 이름을 하사해 주신다면 이 모든 오해는 사라질 것이고 또한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그윈티드답지 않은 아첨이군.”

황제의 느른한 웃음은 소름 끼치게 여유로우면서도 냉정했다.

병색이 깊음에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 황제에게 진실을 알리는 게 가능하기는 한지, 앤시아가 잠시 의문을 품을 정도였다.

‘비앙카, 이 깨발랄한 여주인공.

대체 저런 황제한테 어찌 그리들이댄 거야.’

앤시아는 이 자리에 없는 비앙카에 대한 존경심이 샘솟을 지경이었다.

“가까이 오라.”

황제의 부름은 앤시아에게 향했다. 리샤르가 쫓아올 것 같아 앤시아는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앤시아가 황제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내내 리샤르는 시선을 떼지 않으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계단 아래까지 걸어갔으나 황제는 더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한 계단씩 밟아 올라갈 때마다 여기서 더 가까이 가냐며 앤시아가 눈으로 묻자 황제의 눈에 흥미가 깃들었다.

겁먹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막상 가까이 부르자 앤시아의 두 눈에 의아함만 있을 뿐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꼬리를 올리자 앤시아는 감탄하지 않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쉬며 참아 냈다.

앤시아와 눈을 맞추고 있던 황제의 시선이 그녀의 품에 안긴 아기에게로 향했다.

“설마 짐의 앞에서조차 보이지 않을 생각인가?”

“아닙니다. 감기가 들까 염려되어 씌워 둔 베일일 뿐입니다. 따뜻한 황궁이니 벗기겠습니다.”

앤시아가 아기의 얼굴에 드리운 베일을 올리자 황제의 눈썹이 꿈 틀거렸다. 그러고는 크게 박장대 소를 하며 황태자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이런, 우리 태자가 한 방 먹은 듯하구나.”

“예? 아버님, 그게 무슨 말씀이 신지…….”

카일루스는 공식적인 자리임에도 황제를 부르는 호칭을 잊을 만큼 당황했다.

황제가 앤시아에게로 아기를 달라는 듯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예상과 다른 황제의 모습에 앤시아는 품에 안은 아기를 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이 아기에게 하나의 보험이 될 중요한 일임을 알았다.

앤시아는 황제에게 아기를 넘기고 옆으로 비켜났다.

황제는 언제든 제게 뛰어들 듯 불순한 눈을 한 리샤르와 손에 든 아기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머리카락 색 하며 잠에서 막 깬 푸른 눈이 제 아비를 똑 닮아정통성을 의심할 것도 없었다.

“흐에…… 으…… 으앙-!”

낯선 이의 손에 들린 아기는 불편했는지 커다란 눈을 찡그리며 울음을 터트려 이목을 집중시켰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물이 가득 맺힌 푸른 눈, 아기를 보고 가장 놀란 것은 카일루스였다. 황제는 그런 카일루스와 아기를 번갈아 본 후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공작가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올 것 같으나, 공작 부인이 원하는 건 이 아이가 무사히 자라날환경이겠지. 평화롭게 자라길 바라니 ‘노아’라는 이름을 내리노라.”

“영광입니다, 폐하.”

북부를 수호해야 하는 이에게 평화를 말하다니. 생각이 많아지는 이름이었다.

황제는 가볍게 아기를 다시 앤시아에게 넘겼다. 앤시아는 우는 아이를 받아들기 위해 가까이 다가서며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폐하. 쓴 음식을 드셔 보세요.

그것을 해결하면 몸이 좋아지실 겁니다.”

쓴 음식을 먹고 그것을 해결하라.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싶으면서도 황제는 앤시아의 말을 되묻지 않았다.

앤시아는 황제의 매서운 눈빛을 마주하자 다른 설득 따위 필요 없음을 느꼈다.

“흥미롭군.”

황제는 처음으로 자세를 바꿔앤시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흥미로워하는 눈빛에 지배자 특유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어찌 알았는가.”

“가까이서 뵈니 어릴 적 저희 부모님께서 몸에 귀한 줄 알고 캐다 먹은 독초의 중독 증상이 보여 감히 말씀 올렸습니다.”

미리 준비해 둔 핑계였다.

핑계를 믿지 않는 황제의 시선이 다시 느슨해졌다.

“신년제에 다시 보기를 기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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