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43화.
황제가 독에 중독되었음을, 쓴 쓴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그 증거임을 넌지시 알렸으니 충분했다.
황제가 자각만 한다면 그 독의 종류를 쉽게 알아내고 해독약 역시 금세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샬롯이 먼저 앤시아가 건넨 약재의 의도를 알아채고 황제에게 전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다 보면 꾸준히 황제에게 독을 먹일 만큼 친밀한 이의 소행이라는 것도 알아낼 것이다.
샬롯을 의심할 수도 있으나 그녀가 아니라는 건 앤시아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황제의 측근, 아니면 황태자.
앤시아는 황태자의 태도를 보아 그가 가장 유력함을 짐작했다.
설령 그가 아니라 해도 상관 없었다. 앤시아는 황제를 직접 마주하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황제는 건강을 되찾기만 하면 예상보다 더 강력하게 황태자를 누르고 권력을 되찾을 인물임이 분명했다.
아기의 이름도 받았고 이제 더는 황궁에 볼일은 없었다.
저 뒤에서 죽일 듯한 눈으로 쏘아보는 황태자 카일루스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황제가 조금만 기력을 찾아도 카일루스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을 듯 보였다.
“짐이 피곤하니 이만들 돌아가 보아라.”
어느새 다시 힘없는 늙은 사자처럼 늘어진 황제의 손짓에 짧은 알현이 끝났다.
앤시아는 해야 할 모든 일이 실수 없이 끝났음에 안도했다.
“가요, 여보.”
리샤르를 향해 다정한 웃음을 보이는 앤시아의 얼굴엔 근심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지.”
앤시아의 등과 어깨를 보호하듯 손을 두르는 리샤르의 행동에 카일루스는 지금까지 전해 받은 정보들이 잘못되었음을 확신했다.
공작 부부의 사이는 문제가 있기는커녕 친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대로 돌려보내기에는 황제에게 다가서던 앤시아의 행동이 거슬렸다. 곧바로 공작 부부를 향해 다가가려던 카일루스는 돌아보는 리샤르와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굳어 버렸다.
그간 수없이 마주쳤던 그윈티드공작의 무감각한 눈빛이 아니었다. 적의를 뛰어넘어 살의를 담은 눈은 이곳이 황궁이건 어디건 상관하지 않고 카일루스의 목을 꺾어 버릴 기세였다.
‘설마 공작 부인 납치 건과 내가 연관 있음을 알아낸 건 아니겠지?’
서늘하다 못해 두려운 리샤르의 매서운 시선에 카일루스는 덜컥겁이 났다.
리샤르가 무장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음에도 두려움이 엄습했다.
주변에 자신을 지킬 근위기사가수십이 있는데도 리샤르 하나를 이겨 내지 못할 걸 알았다.
황제가 될 몸이 이 정도 압박에 굴하면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본능이 두 다리를 묶어 버린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공작 부부가 알현실을 빠져나가고 숨통이 트인 후에도 카일루스는 굴욕적인 기분을 지워 내느라 한참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앤시아는 울먹임이 잦아든 아기를 바라보며 안도했다.
“우리 노아, 울음 뚝 그쳤네?
어쩜 이렇게 예쁘고 착할까.”
곧바로 황제가 내린 이름으로 아기를 부르는 앤시아의 빠른 적응력에 황태자를 향한 살의를 갈무리하던 리샤르는 이곳이 황궁임을 잊고 웃음을 보였다. 부부를 향해 다가오던 샬롯은 처음보는 온화한 리샤르의 웃음에 조금 놀랐으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을 걸어왔다.
“폐하께 귀한 이름을 받은 아이니 축언을 해 줄까 하네. 가기 전 내 궁에 들렀다 가게.”
갑작스러운 샬롯의 제안에 앤시아는 당황했다. 이렇게 쉽게 황녀와 독대할 기회가 있었다면 굳이 숨겨 온 약재를 은밀히 건넬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샬롯이 약재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황녀의 초대를 받아 들일 필요는 없었다. 황궁에 머물러 봤자 좋을 일이 없었기에 앤시아는 망설였다.
“차 한잔할 시간 정도만 내주면 되네. 이번에 싱싱한 포도가 들어왔는데 어찌나 달고 상큼하던지….”
“폐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들르겠습니다.”
앤시아가 포도를 좋아하기는 해도 먹는 거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앤시아의 식성까지 알고 있는 샬롯의 권유에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닌지 확인해야 했다.
샬롯과 황녀를 호위하는 근위기사의 뒤를 따라 문을 통과하자 얼마 가지 않아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알현 장소까지 한참을 걸어 들어온 공작 부부와 달리 황족들은 가까운 곳까지 마차를 이용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다른 마차이기는 하나 샬롯이 권한 대로 황녀의 궁에 도착하자 생각보다 아담했다. 공작가에서 지내다 보니 기준이 이상해졌나 싶기도 했지만, 황녀가지내기엔 다소 작아 보였다.
조심스럽게 눈을 굴려 궁을 살피던 앤시아는 안내된 응접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익숙한 얼굴에 깜짝 놀랐다.
“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어째서 여기에….”
일전에 나단이 갑작스레 게이트를 이용해 나타났을 때 황녀의 도움을 받았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응접실에 초대되어 사사로운 만남을 가질 만큼 친밀하다는 건 알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샬롯은 앤시아에 대해 은근히 아는 티를 냈다.
나단은 앤시아를 보고 반가워하면서도 다가오지 못했다. 그런 상황을 알아챈 앤시아가 리샤르를 돌아보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단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온화한 반응을 보이는 리샤르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앤시아의 품에 안긴 새까만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가진 아기를 보고 상황을 이해했다. 지독하리만치 리샤르를 옭아맸던 의심은 아기를 보는 순간 모조리 풀렸으리라는 걸.
“오라버니, 우리 노아가 얼마나 예쁜지 봐 주세요.”
“그래….”
앤시아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에 감격한 듯 목이 멘 대답이었다. 조심스럽게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던 나단은 앤시아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몸은 괜찮고?”
“네. 감기 한 번 안 걸릴 정도로 정말 좋아졌어요.”
“그렇구나. 안 좋은 소문 때문에 네가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까봐 걱정했단다.”
“소문은 전혀 신경 안 썼어요.”
모두 앤시아가 꾸민 일임을 나 단에게는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으나 황녀의 앞이었다. 대신 최대한 밝게 대답했다.
활기찬 앤시아의 대답에 나단 역시 안심하고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 정말 괜찮아 보이는구나.
아기도 무척 건강해 보이고.”
앤시아와 아기 모두를 살핀 후에야 나단은 뒤늦게 리샤르에게 시선을 주었다. 원칙대로라면 가장 먼저 인사를 나눠야 했던 두 사람이었다.
“그윈티드에 큰 축복이 내렸군요. 축하드립니다.”
뒤늦은 나단의 축하에 리샤르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예상치 못한 리샤르의 행동에 나단이 놀라는 사이 덤덤하나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사과의 말이 전해졌다.
“레슬리 소백작, 그대를 의심하고 무례하게 대한 점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소. 늦었지만 이 자리를 빌려 사과하지.”
리샤르에게 사과를 받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나단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하는 사이 이번에는 감사의 말이 이어졌다.
“아내와 우리 아이를 지켜 줘서 고맙소.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오.”
감사의 말이 하도 비장해서 긴장감을 불러올 지경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알아챈 앤시아는 리샤르의 팔에 가볍게 몸을 기댔다.
앤시아와 눈이 마주치자 바로 풀어지는 분위기에 그제야 나단도 웃음으로 답을 했다.
“앤… 공작 부인이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공작 부인의 행복은 공작께 달렸겠지요. 제동생과 조카를 지켜 주시리란 걸 믿고 있습니다.”
“물론이오.”
앤시아는 자신을 두고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사이에 살며시 끼어들며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포도는 어디 있어요?
설마 오라버니가 포도인 건 아니죠?”
뜬금없는 앤시아의 질문에 나단이 의아해하며 샬롯을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던 샬롯의 귀 끝이 붉어지는 게 보였다.
“…핑계라는 것쯤은 눈치챘을 텐데. 짓궂은 동생을 두셨군요.”
“아, 혹시 포도로 앤을 불러낸 겁니까? 부드럽게 권유하시는 방법을 응용하셨군요.”
“당신께서 직설적인 표현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셨으니까요.”
“잘 하셨습니다. 훌륭하세요.”
나단에게 눈을 흘기는 샬롯과 그런 황녀를 어려워하기는커녕 웃는 얼굴로 달래는 나단의 모습에 앤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단과 샬롯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에 리샤르는 더욱 여유로워 보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앤시아만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황궁에서 돌아온 앤시아는 지체 없이 노아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자칫 황태자 측에서 수작을 부릴 수 있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된 틈을 타 아기의 존재를 알릴 셈이었다.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비앙카와 줄리가 미리 준비해 둔 천장이 없는 마차에 올라타 베일을 벗긴 아기를 안아 들었다. 옆에는 든든한 남편이 자신과 아이를 지켜 주었기에 두려움은 없었다.
갑자기 등장한 공작 부부에게 시선이 몰린 영지민들을 향해 보란 듯이 아기를 내보였다.
공작의 특징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기를 본 영지민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수군거림은 금세퍼져 나가 점점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축하드려요!”
언제 소문을 듣고 달려 나왔는지 드레스 숍 주인인 이브가 목소리를 높여 축하의 말을 전했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공작가 후계자의 탄생을 기뻐하며 축하했다.
몇 달간 일부러 퍼지도록 내버려 둔 소문은 오늘부로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아기님이 너무 예뻐요!”
“세상에, 두 분 다정하신 것 좀 봐.”
앤시아를 보호하듯 감싸 안은 리샤르의 다정한 모습에 여인들은 얼굴을 붉혔고, 아기를 안고 있음에도 화사한 아름다움을 가진 앤시아에게 한참 시선이 머물렀다.
“공주님! 아기랑 놀아도 돼요?”
“귀여워요! 더 크면 공놀이해요!”
우르르 몰려와 쫓아오는 어린아이들의 외침에 앤시아는 푸근한 미소를 보였다. 항시 사랑스럽기만 하던 웃음과 다르면서도 한없이 포근해 마음이 편안해지는 미소였다.
영지민에게 공작 부부의 다정함과 아기의 정통성을 충분히 드러낸 후 저택에 돌아오자 이미 소식을 전해 들은 사용인들이 바깥에 나와 있었다. 평소에도 공작의 귀환을 맞이하러 나오는 사용 인들이었으나 오늘따라 비장함이 남달랐다.
깊이 숙인 허리와 어두운 얼굴을 보아하니 입을 함부로 놀린 것을 후회하고 있는 이들이 상당수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