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44화.
“황궁에 가니 공작가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정보가 퍼져 있더구나.”
말의 내용과 달리 상냥한 앤시아의 목소리에 긴장으로 굳어 있던 사용인들이 움찔거렸다.
몇 달이나 탑에서 나오지 않던 공작 부인에 대해 아무리 입조심을 하려 해도 말이 나왔다. 대부 분이 거기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건 모두 앤시아가 황태자의 초대를 받아 황제까지 만나기 위해 세운 계획의 결과였다.
앤시아가 의도한 바였기에 그 부분을 지적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 해도 아무렇지 않게 넘길수도 없는 게 안주인의 입장이었다.
“공작님께서 세작을 찾고자 몇 차례 조사하고 심문했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외부로 소식을 물어 나르는 이가 있다니. 내가 너희를 믿고 그윈티드 후계자를 키워 낼 수 있겠니?”
이번엔 미약한 반응조차 없었다. 꼼짝도 못 할 만큼 긴장한 사용인들을 향해 앤시아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입이 가벼운 자는 전부 해고 해야겠지.”
당황한 사용인의 시선이 앤시아에게 닿았다 리샤르에게 향했다.
앤시아의 말이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라는 듯 리샤르에게선 반응이 없었다.
“불손한 마음을 먹은 이들도 마찬가지고.”
앤시아의 시선이 사용인에게서 뒤에 도열한 기사에게 향하자 그들이 무너지듯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쿵, 쿵, 쿵.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사용인들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몸을 움츠렸다.
기사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하듯 무릎을 굽혔고 사용인들 역시 허둥지둥 몸을 낮췄다.
“전부 짐을 싸서 떠나도록 해.”
가볍기까지 한 앤시아의 말투에 모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전원 해고 소식에 당연히 공작가가 발칵 뒤집혔다.
공작 부부가 자리를 뜬 후에도 사용인들은 물론 기사들까지 삼삼오오 모여 이 일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논하거나 감정을 토로했다.
“우리가 없으면 마수 토벌은 어떻게 하려고? 공작 부인이 철이 없어도 너무 없지.”
“작년 축제로 방벽 구축이 제법 잘돼 있기도 하고 용병들도 자주 드나들잖아. 새 기사를 영입하는 동안 시간 벌기는 가능하겠지.”
“그, 그런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문에 충성하는 기사를 이런 식으로 내치는 경우가 어딨어?”
“기사단은 각하께서 직접 해산시키는 게 아니면 걱정할 거 없다. 하지만, 공작 부인이 후계자를 언급했으니… 다들 입조심해.”
공작가의 기사단을 해고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사용인을 향한 발언이라 짐작하면서도 불안해진 것이다.
기사들은 불만을 말하는 데서 그쳤으나 사용인들의 입장은 달랐다. 짐을 싸서 나가라는 말에 모두가 안절부절못했다. 이 기회에 떠나자는 이들도 있었고 여기처럼 보수가 좋은 곳을 어디서 찾냐며 아쉬워하는 이도 있었다.
억울해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수긍하는 이도 있었고 어딘지 모르게 안심한 듯 보이는 이도 있었다.
그런 반응을 면밀히 살피는 눈들이 있었다.
집사장과 기사부단장, 하녀장과 비앙카 등 공작 부부가 신뢰하는 몇몇 이들이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조사실이 아닌 각자의 공간에서 실시간 반응을 확인하자는 앤시아의 의견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그들의 반응에 따라 재고용, 추가 조사, 심문이나 해고 등 적절한 대응이 이어질 예정이었다.
최종 결정은 공작 부부의 몫이었다.
효과는 제법 괜찮았다. 전원 해고라는 초유의 사태에 날것의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그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이가 눈에 띄기도 했고 불안감에 스스로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그중 충성을 맹세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신중하게 확인하는 사이 앤시아는 정말로 모두를 해고했다. 단지 언제든 돌아오겠다면 새로운 계약을 하게 된다는 점과 가족관계까지 철저하게 조사할 거라는 경고를 덧붙였다.
그런데도 곧바로 다시 고용해 달라며 짐을 푸는 사용인들이 대다수였다. 물론 그대로 소정의 퇴직금을 받고 그만두거나 새벽 같이 떠난 이들도 있었으나 문제될 정도는 아니었다.
황궁에서 가장 많은 귀족이 드나들던 황태자 카일루스의 궁에 사람의 발길이 뚝 끊겼다.
이런 일이 없었기에 의아해하던 카일루스는 시종이 가져온 편지 중 친숙한 이름을 발견하고 바로 열어 보았다.
안부 인사나 초대장 따위라고 여겨 가볍게 열었던 편지들은 아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도와 달라거나, 아버지가 근위대에게 잡혀가 돌아오지 못하니 무슨 수를 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지?”
“저는 모릅니다, 전하.”
이번에 새로 바뀐 시종은 답답할 정도로 같은 말만 해 왔다.
갑작스러운 편지에 카일루스가 직접 외출을 하려 하자 황제가 보낸 기사가 보호를 핑계로 따라 붙었다. 감시자를 달고 제 사람을 만나러 갈 수 없으니 답답했다. 카일루스가 문 주변을 서성이자 기사는 황태자의 건강이 걱정된다며 방 안에서 쉬기를 권해 왔다. 황제의 기사가 제멋대로 말할 리도 없고 모두 황제의 뜻을 전하는 것과 같았다.
“아버님을 뵈러 가는데도 막을 텐가?”
“감히 전하의 앞을 막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저 황제 폐하께서 불온한 자를 색출하는 중이니 당분간 방문을 자제하라 명하셨음을 전할 뿐입니다.”
불온한 자를 색출하는 일과 자신의 방문을 막는 게 무슨 관련이 있는 건지 답답했다.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짐작 가는 일이 없었다.
“그런 거면 더 내가 도와야지.”
“황제 폐하께서 전하가 있어야 할 곳에 계시기를 바라십니다.”
평소 유일한 후계자라며 자신의 방문을 반기던 황제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근신이라는 말 대신 부드럽게 권유한 터라 카일루스는 방에 갇혀 있어야 했다. 궁을 나서지 못하니 외부인과의 만남이 어려워졌다.
측근들을 불러들이려 했으나 수족처럼 부리던 시종이 사라지고 처음 보는 시종이 자리해 있어 뭘 시킬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송구하다며 머리만 조아릴 뿐이었다. 특별히 영특한 아이를 보내니 곁에 두라는 황제의 편지가 아니었다면 바로 목을 쳐 낼만큼 답답했다.
“폴칸은 대체 언제 돌아오는 게냐!”
“하늘과 같은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서북의 해적을 소탕하러 떠났습니다. 최소 이삼 년은 걸린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답이 튀어 나왔으나 카일루스에겐 끔찍한 이야기였다.
근위기사단장이 이런 식으로 황가에서 떨어지는 경우는 좌천과다름없었다. 가장 신뢰하는 폴칸이 야만인들과 해적들이 들끓는 서북으로 향했다니 그의 안위가 걱정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서 북은 황태자가 손을 쓸 수 없는 곳이었다.
카일루스는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뒤늦게 확신했다.
“아버님이 내 손발을 다 잘라 낼 생각이시구나.”
어쩌면 자신이 그간 꾸준히 차와 섞어 낸 독초의 존재를 알아챈 걸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니 근신 상태인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어쩐지 목이 졸리는 것 같은 답답함에 숨을 쉬기 힘들어졌다.
그런데도 도움을 청할 이가 없어 카일루스는 누구도 부르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가지게 될 왕좌를 좀 더 빨리 손에 넣으려고 한 탓에 되레 추락하게 생겼다.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 숨을 몰아쉬는 카일루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갔다.
몇 주에 걸쳐 공작가는 공고한 안전을 다져 갔다.
사용인을 걸러 내는 일도 중요했지만, 저택에 남는 사용인들에게 공작 부부가 자신을 지켜 줄것이란 믿음과 혜택을 보장해 주어야 했다.
황가나 외부의 협박보다 공작가의 지원을 받고 보호받는 쪽이 더 낫다는 인식을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 사용인의 양심 고백을 통해 황태자는 세작에게 이렇다 할 이득이나 금전을 챙겨 주기는커녕 협박만 했다는 것이 드러났고, 공작 부부는 이를 모두에게 알렸다.
이전에 찾지 못해 뒤늦게 세작임이 밝혀진 이들도 있었다. 황태자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이들의 가족을 보호하거나 멀리 떠날 자금을 쥐여 주기까지 하며 관대 함을 보였다.
외부에서 공작가의 정보를 원하는 이가 있다면 차라리 신고하라. 그럼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단, 감추거나 세작이 된다면 이제는 용서하지 않는다. 혀를 잘 리거나 손목이 잘리는 건 물론 그의 가족들 역시 다시는 영지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공작가를 위해 애쓰는 자에게는 포상을, 해를 끼치는 자에겐 철저한 응징을 강조했다.
이렇게 한들 완전히 막아 내기는 힘들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막연히 권력 아래 끌려다니기보다 선택할 수 있음을 알렸다.
정기적으로 상담하고 건의를 받는 것 또한 처음엔 어색해하던 사용인들도 평민인 자신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관리자에게 마음을 열었다.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자 불편함이 개선되고 도움을 받게 되니 기뻐했다.
공작가의 체계가 새롭게 잡혀갔다. 빡빡하기는 했어도 돌아온 사용인들은 군말 없이 따라 주었다. 조일 만큼 조였으니 이제 분위기를 풀어 줄 때였다.
“무슨 일로 모이라는 거지?”
“설마 또 자른다거나…..”
“쉿, 억측하는 버릇은 안 좋다는 거 배웠잖아.”
한 달 만에 다시 홀에 모이게 된 사용인들은 이제 좀 진정 돼가는 공작가에 또 무슨 파문이 일어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워했다.
혹여나 말실수하게 될까 침묵을 지키는 사용인들 사이로 커다란 꽃다발과 천을 들고 하녀들이 지나갔다. 단상 위에 그저 늘어만 놓았는데도 분위기가 바뀔 만큼 화사하면서도 고급스러웠다.
화사함에 눈길이 쏠린 틈에 나타난 앤시아가 그 사이로 올라가 사용인들을 향해 본론부터 꺼냈다.
“공개적으로 결혼식을 치를 거야.”
누구의?
눈으로 묻는 사용인들에게 앤시아는 화사한 천을 어깨에 두르며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부부가 되기 위한 약식혼뿐이었잖아. 축제 날 공식적인 결혼식을 치를 거니까 다들 아이디어를 내줬으면 좋겠어.”
천을 펼쳐 보이자 사용인 중 하녀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이 천에 덧대면 어울릴 레이스디자인을 구상해도 좋고 머리 장식을 만들어도 좋아. 그날 내가들 부케를 만드는 것도 좋겠지.”
꽃을 한 송이씩 던지자 얼결에 받아 든 하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잘 만든다면 다량 제작해서 결혼식 날 방문객에게 선물하거나 축제 상품으로 팔 거고 이익 중 일부를 나눠 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