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46화.
뾰로통해진 앤시아의 표정에 리샤르는 서둘러 사과했다.
“황태자에 대해 잠시 떠올린 것 뿐이오.”
“우리 침실에선 일 생각 않기로 했잖아요. 자꾸 딴생각하시면 저도 결혼식이랑 축제에 대해 말할 거예요.”
“아, 결혼식을 정말 축제와 겹쳐서 해도 되겠소? 외지인에게 구경거리가 될 텐데.”
“어머? 귀족의 품위를 따지신다면 마수 토벌 후 돌아오실 때 차림새를 신경 쓰셔야 하지 않을까요?”
이전에 리샤르를 마중 나갔다가 피와 흙먼지를 뒤집어쓴 대형 곰이 말을 타고 달려오는 줄 알았던 앤시아의 가벼운 타박이었다.
그때 홍해처럼 갈라지던 영지민들의 혼비백산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리샤르가 눈을 피하자 앤시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공작가 후계자까지 낳은 공작부인이 공식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결혼식을 하는 거예요. 그날 입을 드레스, 장식, 소품. 거기다 제 머리 모양 하나까지. 그 모든게 화제가 될 거고요.”
앤시아는 이 몸이 가진 아름다움과 그걸 극상으로 끌어 올릴 이브의 노력을 믿었다. 거기에 사용인들이 하나둘 만들어 내는 작은 소품들은 제법 괜찮아서 조금 손보면 손목이나 머리 장식으로 쓰기에도 좋아 보였다.
그날 제공될 요리는 영지 내의 음식점 중 엄선된 몇몇 곳이 참여하며 하몬의 조언으로 고급화할 예정이었다. 이후 축제 기간에는 화려함이 좀 죽겠지만, 적정한 가격대의 요리로 판매되며 예약제를 통해 고급 메뉴를 맛볼수도 있도록 계획해 두었다.
“새 안내 책자도 만들고 아이들을 위한 가이드와 길드의 협력도 받아야 하고….”
“나보다 부인이 더 바쁜 것 같군.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말해 주시오.”
“음… 그럼 상을 주세요.”
앤시아의 능청스러운 요구에 리샤르 역시 편안한 자세로 느긋하게 답했다.
“따로 줄 것도 없이 뭐든 다 가져가시오.”
“이건 여보가 허락해야 가능한 거라서요.”
리샤르가 좋아하는 호칭까지 써가며 눈을 빛내는 앤시아에게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뭐든 허락하지.”
“축제가 끝나면 우리 여행 가요.”
“여행?”
“네. 노아가 아직 어려서 멀리는 못 가겠지만, 아무 생각 안하고 며칠만 푹 쉬어요, 우리.”
축제가 끝난다 해도 해야 할 일은 넘쳐 났다.
그렇다 해도 지금보다야 덜 바빠질 테니 리샤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내보도록 하지.”
“정말요?”
“축제가 끝나면 마수의 씨가 마르니 한가해지기는 할 거요. 한 달 정도는 쉴 수 있겠지.”
“꺄! 고마워요!”
기뻐하는 앤시아가 달려들 것을 예상한 리샤르가 양팔을 벌렸다.
그러나 앤시아는 곧바로 일어나 휴양지와 관련된 책을 들고 돌아왔다. 침대 위에 펼쳐진 지도와 책자에는 이미 붉은 펜으로 표시한 흔적들이 가득했다.
오늘도 일찍 잠들기는 틀렸구나 싶으면서도 즐거워 보이는 앤시아의 모습에 리샤르는 웃을 수 있었다.
*
“그 소문 들었어?”
“그윈티드 영지 축제 첫날에 공작 부부의 결혼식을 볼 수 있다는 거?”
“그것도 그거지만 상인이면 더 중요한 걸 노려야지.”
그윈티드 영지로 들어서는 행렬이 끊임없는 와중에 지루했던 상인들끼리 수다가 이어졌다. 가벼운 듯 보여도 그 안에 중요한 내용이 속속 숨어 있었다.
“축제 기간 방문객에 한해 보온 마석이 들어간 로브를 구매할 수 있다지 않나.”
“보온 마석을 판다고? 자금을 탈탈 털어서라도 사 가야겠구먼.”
“어허, 자네는 그 귀한 정보를 이런 데서 풀면 어쩌자는 건가?”
“크크, 상관 없지. 일인당 하나만 살 수 있어서 우리 직원들까지 싹 모아 데려왔거든.”
“이, 이런. 젠장. 여기 길드에도 통신구가 있겠지?”
초초한 상인과 여유로운 상인의 대화를 들은 주변인들도 덩달아어수선해졌다.
방문객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처럼 한시적으로 마석을 유통할 수 있는 창구를 열게 되었다.
이게 다 황제와 공작가의 관계가 어느 정도 개선될 여지를 보이기에 가능해진 일이었다.
“그나저나 줄이 줄어들지를 않네.”
“해 지기 전에 들어갈 수는 있는 건가?”
축제와 결혼식이 맞물려 그윈티드 영지로 들어가는 것만도 한 시간 넘게 걸렸다.
그 틈을 타 영지에서 유행하는 차를 시음할 수 있도록 배려하거나 가벼운 먹거리를 들고 다니며 판매하기도 했다.
“방문객님, 저희 허브숍의 차 한 잔 받으세요.”
“응? 차?”
“간식거리가 단돈 동화 한 장!
두 개 사시면 한 개가 서비스!”
“여기 두 개만 줘 봐요.”
“어? 음악 소리 같은 게 들리는데?”
영지로 가까워질수록 속도는 더 뎌졌으나 들려오는 음악 소리라 든가 활짝 열린 문안으로 보이는 화려함이 기대감을 높였다.
사람이 모이다 보니 여기저기서 시비가 붙기도 했지만, 북부의 덩치 큰 기사들이 수시로 순찰하며 그 위용을 자랑하니 금세 조용해지고는 했다. 게다가 기사들은 갑주 대신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눈길을 끌 만했다.
몸에 잘 맞는 어두운색의 제복이었으나 가슴과 어깨에 붙어 있는 견장에 가문의 문장과 함께 섬세한 자수가 화려함을 더했다.
녹색 커프스와 소매를 연결하는 가느다란 줄, 어깨의 금색 술은 효용성은 없어 보였으나 기사가 손을 들어 줄을 이탈하는 사람들을 유도할 때마다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무슨 황실 근위기사 같구먼.”
“피에 미친 맹수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보니 다들 훤칠하니 잘생긴 게 사위로 들이고 싶을 정도야.”
“이놈들아, 우리 같은 평민이 아니고 기사님이다. 정신 차려.”
“그러게. 그윈티드는 기사가 경계를 서니 치안 관리는 확실하게 되겠네.”
기사뿐만이 아니었다. 경비병도 색이 다른 견장을 착용했으며 축제 기간만 고용된 용병에게도 단순하지만,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깨끗한 제복을 제공했다. 옷이 이렇게 보니 다들 훤칠하니 잘생긴 게 사위로 들이고 싶을 정도야.”
“이놈들아, 우리 같은 평민이 아니고 기사님이다. 정신 차려.”
“그러게. 그윈티드는 기사가 경계를 서니 치안 관리는 확실하게 되겠네.”
기사뿐만이 아니었다. 경비병도 색이 다른 견장을 착용했으며 축제 기간만 고용된 용병에게도 단순하지만,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깨끗한 제복을 제공했다. 옷이 달라지니 태도 역시 달라졌다.
소속감을 느끼고 껄렁대던 모습이 줄어드니 용병이라 해도 사람들의 반응이 호의적이었다.
영지 곳곳에 드리운 휘장은 영지의 위상을 상징하는 듯했고, 가게마다 장식된 꽃들과 영지민들이 달고 있는 코르사주는 생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보존상태가 훌륭했다.
실제로 장식에 쓰인 생화는 마석 가루를 섞은 물에 잠시 담가 둔 것만으로도 며칠에서 길게는 들른 외지인들은 북부에서 보기 힘든 화려한 색감과 화사한 꽃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린아이들은 저마다 손에 작은 파우치를 들고 다녔고, 젊은 여인들은 저마다 생화에 리본 장식이 덧댄 코르사주를 고르느라 바빴다.
“줄 서느라 다리 아프시죠? 저희 카페에 편안한 소파가 준비되어 있답니다.”
“쌀쌀한 날씨에 뜨끈한 특제 스튜 어떠신가요?”
“오늘 결혼식 때 소개될 만찬을 가볍게 맛볼 수 있는 코스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단돈 은화 한장!”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북부인들이 그럴싸한 말로 가게 홍보를 하자 지나가는 이들이 신기한 듯 멈춰 섰다. 전부 앤시아의 조언을 받아 특징을 살리고 반말하지 않는다는 기본 원칙을 지킨 덕이었다.
축제 첫날은 혼잡함을 예상해 영지 내에 가판대는 놓지 않았다. 대신 길거리에서도 눈을 즐겁게 할 놀이꾼이나 떠돌이 악사에게 정식으로 자리를 내주었다.
긴 줄을 서느라 짜증이 났던 방문객들은 즐거운 분위기와 볼거리에 금세 마음을 풀었다.
서서히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시각.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앞에서 공작 부부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영지 끝자락에 있는 공터로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공작가 앞의 넓은 공터를 결혼식 장소로 할지 고민했으나 중앙광장에서부터 이곳까지오는 길이 제법 멀어 관광객이 분산되지 않도록 장소를 바꾼 것이다. 덕분에 축제 기간에도 수익이 저조했던 가게들도 손님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바빠졌다.
임시로 만든 대기실의 분위기는 바깥과는 사뭇 달랐다.
모여든 이들로 인해 들려오는 웅성거림에 머리 장식을 매만지던 엘리와 비앙카가 안절부절못했다.
“사람들이 정말 많이 모였나 봐요, 마님.”
“제가 보고 왔는데 끝이 안 보여요. 뒤쪽에선 안 보인다고 싸움까지 났다니까요.”
“혹시 너희들 긴장했니? 왜?”
다른 하녀들보다 더 긴장한 두 사람을 향해 앤시아가 웃어 보이자 비앙카가 눈을 빛내며 한껏 들뜬 목소리를 냈다.
“그야 우리 마님이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다! 빨리 자랑하고 싶어서 그렇죠.”
“정말 너무 아름다우세요. 마님께서 얼마나 빛나는지 몰라요.”
“그야 너희가 어제부터 갈고 닦았잖니. 내가 돌덩이라도 빛날만큼.”
관리는 일주일 전부터 시작됐다. 마사지며 온갖 장식과 머리 모양을 드레스에 맞게 바꾸어 대던 손길이 얼마나 집요했던지.
결혼식 전날인 어젯밤에는 부부 침실을 꽉 채울 만큼 장신구와 소품이 들어서는 바람에 리샤르는 다른 방에서 자야 했다.
“드레스도 예상대로 잘 나왔고.”
레이스와 얇은 천을 덧댄 하얀 드레스는 움직일 때마다 비침이 달라져 때로는 사랑스럽게, 때로는 은밀한 분위기를 풍겼다. 베일을 씌우자 은은하면서도 고혹적인 느낌이 살아나며 결혼식에 어울리는 아름다움이 완성됐다.
드레스를 갈아입는 건 무척 피로한 일이기에 앤시아를 최대한 배려한 이브의 아이디어였다. 피로연 때는 베일과 얇은 천을 떼어 내면 분위기가 확 바뀔 것이다.
신부의 불편함은 최소화하고 겹쳐 입는 방식에 따라 다른 느낌을 주는 드레스는 새로운 유행에 민감한 이들에게 어필하기 좋았다.
“마님, 주인님이 오셨어요.”
엘리의 속삭임에 앤시아는 천천히 몸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눈을 한 채 하염없이 저를 바라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한껏 꾸민 앤시아의 아름다움에 리샤르는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앤시아 역시 리샤르의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차림을 눈에 담았다.
검은색이 저토록 잘 어울리는 남자가 있을까.
금색 실로 포인트를 준 제복은 어두운색이었음에도 화려했다.
황궁에 방문했을 때와 비슷한 색상의 조합이었으나 화려함이 남달랐다. 리샤르가 앤시아에게 시선을 빼앗겼듯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감탄이 나올 만큼 완벽한 남편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벤트처럼 치르게 된 결혼식이었기에 이런저런 계산을 하던 앤시아는 자신을 데리러 온 리샤르의 등장에 모든 고민을 잊었다.
이 남자가 내 것이라고 모두에게 자랑하는 자리처럼 느껴졌다.
모든 건 영지를 위해서라며 열심히 준비해 온 결혼식이 드디어 우리를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속에서부터 충만하게 차오르는 만족감과 기쁨에 앤시아는 환한 웃음을 보였다. 그런 앤시아에게 리샤르가 손을 내밀자 망설임 없이 맞잡았다.
“그럼 갈까요?”
“저 많은 사람 앞에서 긴장하지 않는다니. 정말이지 대범한 부인이군.”
“진상 상대하는 것보다야 쉽잖아요. 구경꾼 앞에서 걷는 것뿐인데요.”
그렇게 쉽게 말을 꺼낸 앤시아는 얼마 가지 않아 자신이 한 말을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