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47화.
일반적인 결혼식 꽃길보다 훨씬 길게 깔린 융단 주변은 하객을 위한 자리였다. 대신 꽃 장식 사이로 충분히 공작 부부를 볼 수 있어 많은 이들이 주변을 둘러싼채 공작 부부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덩달아 구경거리가 된 귀족들은 약간 불쾌하기도 했지만 그들만을 위해 준비된 지정 좌석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미리 자리 잡고 있던 악단의 연주에 그나마 사람들의 목소리가 줄어들고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세상에, 저 드레스 좀 봐. 너무 아름다워.”
“이 추운 날씨에 저리 얇은 드레스라니. 보온 마석 효과가 대단하네.”
“얼굴 좀 보여 줘요! 공작 부인 보려고 일주일을 달려왔다고!”
사람들의 뜨거운 반응에 앤시아의 다리가 굳어 버렸다.
웅성대는 사람들이 저마다 보이는 관심과 응원은 대기실에서 들었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앤시아는 공터를 가득 메우다 못해 마을로 이어지는 길목까지 빼곡한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차마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와, 내가 무슨 정신으로 자신만 만했던 거야?’
손에 꼭 쥔 부케가 떨릴 만큼 긴장해 버렸다.
리샤르가 곁에서 무어라 속삭인 거 같긴 했지만,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점점 음악 소리는 고조되고 이제는 나가야 하는데 얼어붙은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간신히 짓고 있던 미소마저 풀리려 하는데 등과 다리 아래로 쑥 들어온 손이 앤시아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어머나….”
“로맨틱해라.”
“베일이 저런 식으로 펼쳐지니 너무 예쁘네요.”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 앤시아는 리샤르에게 안겨 단상 앞까지 쉽게 이동했다. 다른 때라면 리샤르를 말렸겠지만, 지금은 그저 고마웠다.
다행히 길게 늘어진 베일도 밟지 않고 능숙하게 움직이는 리샤르 덕에 앤시아가 입은 드레스가 살랑거리며 반짝임을 더해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단상까지 가는 길은 제법 길었으나 그만큼 늘어선 사람들이 공작 부부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공작 부부가 지날 때마다 저마다 감탄을 터트렸고 혹여나 불손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가 있는지 감시하는 기사들의 눈빛이 매서웠다. 다행히 앤시아의 아름다움과 리샤르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바라보느라 모두 정신없었다.
“뒷모습조차 눈을 땔 수가 없네요.”
“가문의 문장을 드레스에 수놓는 건 처음 보는군. 그 문장이 저렇게 우아할 수 있다니.”
단상 앞에 선 부부의 뒷모습은 완벽했다.
리샤르의 단단한 어깨나 등은 뒤에서 봐도 강인함이 느껴졌다.
앤시아의 여린 몸을 따라 부드럽게 펼쳐진 드레스는 등과 허리선을 따라 이어진 섬세한 레이스와 작은 보석들의 조화로 시선을 끌어모았다.
그리 길지 않은 결혼 서약서가 읽히고 공작 부부가 뒤돌아섰을 때 노을빛이 내려앉은 앤시아의 드레스는 마치 무도회에 온 것처럼 화려하게 변모했다. 하얀색 드레스에 은은한 주홍빛이 물들어 레이스의 무늬나 옷의 형태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우아해 보이던 드레스는 다른 색이 더해지자 은근히 요염해 보이기도 했다.
조명 마석이 주변을 밝히자 다시 새하얗게 변한 드레스에 사람들은 무슨 마법이라도 본 듯 감탄했다.
뒤늦게 여유를 찾은 앤시아는 황홀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며 안심했다.
오늘 본 광경이 방문객들의 눈과 머리에 새겨졌음을 확신했다.
하객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는 사이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에 화려한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외지인들이나 영지민들은 오늘 본 공작 부부의 결혼식에 관해 이야기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중앙광장에 같은 드레스와 장신구가 전시되어 가까이서 보지 못한 이들도 아쉬움을 덜 수 있었다.
앤시아의 예상대로 그녀가 착용했던 코르사주나 소품들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이브 숍에는 드레스에 대한 예약 문의도 빗발쳤다. 공작가에서 하객에게 제공될 만찬의 일부 메뉴를 제공하는 레스토랑에도 관심이 쏠렸다.
공개 결혼식이 더해진 축제의 첫날은 성공적이었다. 외지인이나 영지민 할 것 없이 모두가 결혼식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공작가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시끌벅적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공작 부부와 초대된 하객들은 공작가로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넓은 화이트홀에 모인 하객들은 공작 부부가 나타나자 곧바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 부인.”
“이전에는 약식혼이라 참석을 못 해 섭섭했는데 이렇게 큰 규모로 치르는 결혼식에 초대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마석의 유통을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신 듯한데 차후 정식으로 유통하게 된다면 저희 가문에 맡겨 주십시오. 통상보다 2할 더 이익을 보장하겠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을 맞이 하시다니,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많은 손님을 상대하느라 공작부부는 물론 사용인들 모두 정신이 없었다.
그런 혼잡한 와중에도 단연 눈에 띄는 이는 2황녀 샬롯 드미트리와 약혼자 나단 레슬리였다.
공작 부부만으로도 충분히 화제가 넘쳐 나는데 황가의 인물이 나타나자 여기저기서 시선이 몰려들었다.
“황가와 그윈티드가 화해했다는 소문이 돌던데 정말인가 보군.”
“이번 기회에 황족과 연을 만들어 놓는 것도 좋겠지. 내가 먼저가 보겠네.”
“어허, 이 사람아. 같이 가지.”
그들 덕에 공작 부부에게만 몰렸을 관심이 분산되어 한결 손님 상대하기가 수월해졌다.
시간이 깊어 감에 따라 쉬기 위해 방으로 향하는 손님들 덕에 조금이나마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때만을 기다린 듯 앤시아에게 몰려드는 사용인들로 인해 다시 정신없이 바빠졌다.
“마님, 손님께서 보온 마석을 따로 구매하고 싶다고 하세요.”
“집사장을 보내 드린다고 전해줘.”
“기사와 대련을 하고 싶다는 분이 계시는데 뭐라고 답을 드려야 할까요?”
“지금은 다들 바빠서 힘들다고 전해 줄래?”
“로만 백작가에서 온 손님이 헤르온 남작님보다 작은 방을 배정받았다며 방을 바꿔 달라고 하셨어요.”
“로만 백작… 헤르온 남작이라.”
앤시아는 낮에 다시 한 번 더 점검해 둔 하객들의 신상을 떠올렸다.
백작가는 혼자 온 막내아들이고 남작가는 가주가 아내와 함께 직접 방문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계급이 깡패라지만, 저택 하나 딸랑 있는 백작가의 꼬맹이랑 제법 부유한 영지를 이끄는 남작가 부부를 같은 선상에 놓을 수는 없었다.
“사람 수가 다르니 양해 부탁드린다고 전해 줘. 그래도 불만이라고 하면 내 방이라도 내어 드리겠다고 해.”
설마 안주인의 방을 내놓으라는 멍청한 답은 하지 않으리라. 이만큼 성의를 보인다, 혹은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으라는 의미였다.
앤시아가 고심하며 답을 내어주는 동안에도 줄리와 집사장이 정신없이 지시를 내리며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우왕좌왕하는 사용인들을 나단이 능숙하게 격려하며 일거리를 알려 주는 모습이 보여 미안하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아무래도 외부 손님의 방문이 워낙 드문 공작가이다 보니 사용 인들의 실수가 잦은 듯했다.
나단까지 합류한 덕에 상황이 좀 마무리되어 가나 싶더니 하몬이 창백한 얼굴로 달려왔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앤시아의 한숨이 깊어졌다.
*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주일이었다.
일주일간 저택에 머무는 손님들의 자잘한 불만과 다양한 제안에 대응하느라 거의 매일 수면 부족이었다.
전 공작 부인 마거릿이 공개 결혼식에 불참 소식을 알리는 편지와 선물을 보내온 건 오히려 감사한 일이었다. 마거릿이 있었다면 혹여나 실수할까 더 긴장하며 손님들을 응대하느라 벅찼을 것이다.
물론 마거릿이 도움을 줄 수도 있었으나, 그녀를 만나기 위해 더욱 늘어날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지금보다 배는 바빴을 게 분명했다.
“마님, 조금만 더 힘내세요. 마지막 손님만 배웅하면 쉬실 수 있어요.”
“으응. 고마워.”
힘들어하는 앤시아의 머리를 만져 주며 응원하는 엘리의 진심에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피로에 절어 걸음이 느렸음에도 겉모습만큼은 전담 하녀의 노력으로 항상 완벽했다.
마지막 손님을 배웅하러 문 앞으로 나온 앤시아는 완벽한 치장과 달리 눈은 반쯤 감겨 거의 졸고 있었다. 아무래도 상대가 마음 편한 나단이기에 그러기도 했다.
“앤, 나오지 않아도 된다니까.”
“어떻게 그래요? 대화도 제대로 못 했는데 배웅은 해야죠.”
나단은 축제 초반 샬롯과 함께 있을 때 입고 있던 화려한 연미복이 아닌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첫날만 잠깐 머물렀던 샬롯과 달리 나단은 계속 공작가에 머물러 주었다. 넘쳐 나는 손님에 정신을 못 차리는 공작 부부를 도와 손님들을 상대했다.
손님에 익숙지 않은 리샤르와 예법 공부를 하긴 했지만 써먹을 일이 없었던 앤시아의 아슬아슬한 대응에 나단은 적절한 순간마다 끼어들어 방문객들의 불편함을 해소해 주었다. 나단이 아니었으면 귀족들을 상대하기 곤란할 뻔했다.
“오라버니. 정말 이대로 가시려고요? 일주일 내내 저택에만 머무셨잖아요.”
축제 기간 내내 저택을 떠나지 못하고 도움만 주던 나단이 이대로 떠난다 하니 아쉽기 그지없었다. 항상 고마운 사람이었으나 이번에는 특히 너무도 큰 도움을 받았다.
눈에 졸음이 가득한 앤시아를 본 나단은 자연스럽게 웃음을 머금었다.
“앤, 마중은 됐으니 들어가 쉬어라.”
“아니에요, 오라버니. 마지막까지 남아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인사도 못 하는 줄 알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나 몰라요.”
“설마 내가 인사도 하지 않고 갈까 봐. 우리 조카님 얼굴도 한번 더 봐야 하고.”
유모가 품에 안은 노아를 바라보는 나단의 시선이 푸근했다.
앤시아가 노아를 안아 건넬까 하고 뒤돌려는데 나단이 손을 잡아왔다.
어쩐지 오랜만의 접촉인 것 같아 어색한 기분에 되레 환하게 웃는 앤시아에게 나단 역시 마주웃어 주었다.
“네가 행복해 보여서 안심했단다, 앤. 항상 이대로만 지내다 오.”
“네, 오라버니.”
얼마만큼 보았든 헤어짐은 언제나 아쉬웠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좀처럼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흐아… 앙….”
“이런, 조카님이 지루한가 보구나. 어서 안아 주거라. 나는 이만 떠날 테니.”
“앗, 오라버니.”
앤시아가 노아를 돌아보는 사이 나단은 서둘러 떠나려 했다. 앤시아가 급히 노아를 안고 따라오자 나단은 아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건강하거라. 이만 가 보마.”
“아유, 참. 이렇게 서둘러 돌아가지 않으셔도 되는데 너무 아쉬워요.”
앤시아를 빨리 쉬게 해 주고 싶은 마음에 나단이 서두르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 다음엔 내 결혼식 때 보겠구나. 그때까지 잘 지내렴, 앤.”
“네, 통신구로도 종종 연락드릴 게요.”
이미 준비된 마차에 훌쩍 오르는 나단을 쫓아가던 앤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떠나는 마차를 한참 지켜보던 앤시아는 이전처럼 깊이 슬퍼하지 않았다. 황가와 사이가 어느 정도 개선되기 시작하면서 가끔 이기는 하나 게이트를 이용하기 쉬워졌기에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었다.
이렇듯 황가가 독점하다시피 했던 모든 것들이 조금씩 풀린다면 제국민의 삶도 좀 더 나아지리라.
가장 큰 혜택을 보는 건 아무래도 그윈티드 가문이었다.
앤시아는 아직 남아 있는 슬픔을 털어 내며 노아를 품에 안고 다독였다.
“아유, 우리 노아. 또 무거워졌구나.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아가.”
배웅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앤시아는 작년보다 세 배 이상 큰 이익을 얻은 축제에 대한 보고를 들으며 그대로 뻗어 버렸다.
유모의 손에 넘겨진 노아는 잠시 칭얼대다 이내 잠이 들었다.
그런 노아를 바라보며 앤시아 역시 몰려오는 졸음에 눈을 감았다.
“이제 누가 와도 절대 못 일어나….”
“네, 제가 절대 아무도 안 들일게요.”
비앙카의 믿음직한 각오를 들으며 앤시아는 달려드는 수마를 기꺼이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