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48화.
찰랑….
물속에 들어온 듯 기분 좋은 부유감에 앤시아는 편안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뺨을 가볍게 쓰다듬는 손길에 천천히 의식이 돌아왔다.
멍하니 눈을 뜬 앤시아는 자신이 물속에 몸을 뉘고 있는 걸 깨닫고 조금 놀랐다. 등 뒤의 체온에 앤시아가 놀라기 전 리샤르가 귓불에 입을 맞추며 다정한 속삭임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드디어 깼군.”
“…네?”
목덜미를 따라 입 맞추면서도 팔을 매만져 오는 손길에 앤시아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몸을 움찔거릴 때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와 은은한 향기에 이곳이 별채에 마련된 약초탕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깨닫고 나니 더욱 당황스럽게 했다.
“제가, 아니 우리가 왜 여기 있죠?”
“아무리 마사지를 해도 잠을 깨지 않아 근육통에 좋은 약초 탕에 데리고 왔지.”
“…그래서 제 팔을 그렇게 주물럭거리는 건가요?”
“그렇지.”
망설임 없는 즉답에 앤시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통 한두명의 사용인이 언제든 도움을 주기 위해 한쪽에 있어야 했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런 앤시아의 행동에 리샤르는 느긋하게 팔을 뻗어 끌어안았다.
“시중은 내가 들도록 하지. 그러니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뭐든 들어줄 테니까.”
“뭘 부탁하기엔 지금 상황이 좀 당황스러워요.”
리샤르에게 안겨 물에 들어올 때까지 잠에서 깨지 못할 만큼 피곤했었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제야 잠이 깬 게 민망했다. 리샤르여서다행이지 다른 이였으면 어찌할 뻔 했나 아찔했다.
앤시아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리샤르가 곧바로 사과해 왔다.
“내가 잘못했소.”
“네?”
“허락도 받지 않고 내 멋대로 부인을 이곳으로 옮겼지.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텐데 배려심이 부족했소.”
앤시아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알아채고 이유를 파악하려 애쓰며 사과해 오는 리샤르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다.
곧바로 손을 뻗어 얇은 천으로 앤시아의 몸을 감싸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물에 젖어 아무 의미없는 행동이었지만, 앤시아의 불편함을 알아채고 행동한 덕에 기분이 좋아졌다.
앤시아의 표정이 풀어진 걸 알아챈 리샤르가 입을 맞춰 왔다.
정말이지 리샤르는 넉살도 좋아졌다. 앤시아는 그런 리샤르가 귀엽기도 하고 놀래 주고 싶기도 해서 몸을 일으켰다.
젖은 천이 몸에 달라붙으며 가려 주었으나 오히려 시선이 이끌릴 만큼 야릇한 분위기를 풍겼다. 리샤르가 따라 일어나려 하자 가볍게 어깨를 눌러 도로 앉혔다.
“잘못하셨으면
벌을 받으셔야
죠.”
“부인?”
“움직이지 마세요. 벌이니까.”
앤시아는 생긋 웃으며 누워 있는 리샤르의 위로 살포시 자리 잡았다. 가볍기만 한 앤시아의 체중은 물속에서 아예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지만 리샤르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스치는 피부에 리샤르의 손끝이 움찔거리자 예민하게 알아챈 앤시아가 손가락을 들어 그의 입술위를 눌렀다.
“움직이시면 저 나갈 거예요.”
입도 움직이면 안 되는 건가 싶어 눈을 굴리는 리샤르에게 앤시아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참 잘했어요.”
누구도 제압할 수 없는 공작을 손가락 하나로 눕힐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아래 리샤르는 오랜만에 긴장감을 느꼈다. 젖은 피부 위에 닿는 부드러운 아내의 손길이 리샤르의 인내심을 시험하게 만들었다.
달이 기울도록 공작 부부의 다정한 밤은 깊어만 갔다.
*
축제가 끝난 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외지인의 방문이 꾸준히 이어졌다.
황량하고 볼 것 없다던 인상을 완전히 뒤엎어 놓은 화려한 공작부부의 공개 결혼식 덕분이었다.
작년 축제 때는 이렇게까지 화사하게 꾸미지 않았었다. 결혼식의 영향을 받은 영지의 분위기는 가을이 깊어 가는데도 봄처럼 화사했다.
북부 지방에서 이런 분위기를 보기 힘든 탓에 이웃 영지의 젊은 연인들의 필수 데이트 코스가 되어 갔다. 아이들 역시 칙칙한 회색 건물만 보다가 알록달록 꽃과 멋진 휘장이 드리워진 건물들을 보고 즐거워했다.
결혼식 이후 공작가에 방문 요청을 하거나 공작 부부에게 초대장을 보내오는 귀족도 늘어났다.
아직은 사교 활동에 뜻이 없기에 거절하고 있지만, 노아가 커 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었다.
황가에서도 신년제 초대장이 날아왔다. 이전에 황태자가 보낸 것과 달리 황실의 인장만이 찍힌 통상적인 초대장이었다. 참여 여부를 떠나 황가에서 보낸 호의에 앞으로의 관계 개선이 꾸준히 이 어지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큰 걱정을 덜어 낸 앤시아는 영지에 집중했다.
축제가 끝난 이후에도 장신구나 독특한 문양이 들어간 소품들의 수요가 꾸준했다. 계절 한정이라는 아이디어에 가게에서는 달마다 신상을 내놓으니 외지인들의 재방문이 이어졌다.
이대로도 괜찮지만, 좀 더 활로를 개척해 볼까 고심하던 앤시아는 누가 봐도 가출하는 모양새로 나타난 비앙카를 보고 당황했다.
“비앙카, 그 보따리는 뭐야?”
“마님, 저 여행을 떠나려고 해요.”
“어? 갑자기?”
언제까지고 앤시아를 쫓아다닐 것 같던 비앙카의 선언에 모두가 당황했다. 그중 엘리만이 비앙카에게 이야기를 들었는지 덤덤했다. 눈 주변이 발간 걸 보니 이미 한바탕 눈물을 보인 후인 듯했다.
“왜? 아니, 어디로 갈 건데?”
“어디든 가 보려고요. 좀 더 다양한 곳을 다니면서 새로운 상품을 매입해 볼까 해요.”
아니 그건 여행이 아니라 상인이잖아.
앤시아가 태클을 걸 틈도 없이 비앙카는 노아를 향해 애정이 어린 시선을 보내며 다짐했다.
“노아 님이 절 잊지 않도록 자주 돌아올게요. 선물도 많이 사올 거고요.”
“그런 건 괜찮아. 단지 너무 갑작스러워서… 정말 떠날 거야?”
“마님도 절 잊으시면 안 돼요.
좋은 물건을 발견할 때마다 공작가로 보낼게요.”
“아니, 비앙카. 그런 일은 상인에게 맡기면 돼. 굳이 네가 힘들게 나갈 필요는 없어.”
앤시아가 자꾸 만류하자 비앙카는 기쁜 듯 환한 웃음을 보였다.
“마님께서 절 믿고 눈눈 마을에 보내셨죠. 여인들이 만든 도안이나 자수를 보고 기뻐하셨고요.
저는 손재주가 없어서 물건을 만들어 내지는 못해요.”
그랬다. 비앙카는 앤시아의 머리 장식을 만들어 보겠다며 상당수의 천을 걸레로 만들 만큼 손재주가 나빴다. 그래도 항상 의욕이 넘쳤기에 그 일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자수나 레이스가 신기해요. 만드는 사람, 그걸 구매한 사람들이 기뻐하는 게 좋아요. 제가 고른 물건이 선택받았을 때 굉장히 기분 좋았어요. 전 만들지는 못해도 선택할 수는 있잖아요.”
그런 마음으로 골라 온 물건이 선택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간 앤시아가 봐 온 비앙카의 감각은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하녀로 곁에 있을 때보다 심부름을 하고 돌아온 비앙카가 더 생기 넘쳐 보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혼자는 위험해.”
“일행은 현지에서 구하려고요.
가는 길은 상단이랑 함께할 거니까 괜찮아요.”
갑작스러운 이별이었지만, 앤시아는 이미 짐까지 싸 들고 나타난 비앙카를 말리기보다 응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원래도 자유로운 성격이었다.
순수하고 엉뚱한 여주인공.
“미리 말도 안 하고 갑자기 그만두는 건 곤란하지만. 목적지도 없이 떠나는 건 걱정돼.”
“앗, 죄송해요. 마침 동부 쪽으로 향하는 상단이 출발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급해져서요.”
“응? 꼭 동부로 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
어디든 간다던 비앙카는 뜻밖에 목적지를 정해 둔 듯 보였다.
“그냥요. 처음 도전해야 하는 곳이라면 제가 좋아하는 마님이 지내셨던 곳을 가 보고 싶었어요.”
마지막까지 애정을 드러내는 비앙카에게 앤시아는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앤시아로 인해 원래 그녀가 가졌어야 할 자리가 사라진 후 내 심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
활기차게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며 괜찮겠지 짐작만 했었다. 여행을 떠나겠다며 활짝 웃는 비앙카가 평소보다 훨씬 더 빛나고 있었기에 앤시아는 그녀의 선택을 응원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럼 곤란한 일이 생기면 레슬리 백작가를 찾아가렴.
도중에라도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
“그럼요. 전 여행을 가는 거지 떠나는 게 아니에요. 꼭 집으로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비앙카는 공작가를 집처럼 여겼다. 그게 고마워 앤시아는 비앙카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당황한 듯 굳어 있던 비앙카는 금세 앤시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찌나 힘이 센지 숨이 턱 막힐 만큼 강한 포옹이었지만, 한동안 보지 못할 거란 생각에 등을 토닥이며 참아 냈다.
그렇게 비앙카가 떠나가는 길, 상당수의 사용인이 그녀를 배웅했다.
하몬은 마른 과일이나 육포 따위를 주머니 가득 담아내어 주었고 엘리는 마지막까지 눈시울을 붉혔다. 그 외에 다른 이들도 비앙카에게 작은 주머니를 건네거나 덕담을 하며 꼭 돌아오라는 말을 전했다. 앤시아 역시 두둑한 금화 주머니를 건넨 후였다.
역시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주인공다웠다. 그녀의 행보에 많은 행운이 깃들기를 바라며 앤시아역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후 방으로 돌아온 앤시아는 영지민의 의견을 모은 보고서를 읽으며 안나와 의논을 하고 줄리가 가져온 초대장을 확인 후 우선순위를 나눴다. 하몬의 신작요리를 맛보고 다른 가문에서 보내온 선물을 확인 후 답례품을 고르고 하다 보니 밤이 찾아왔다.
바쁜 건 아니었지만 해야 할 일이 끊이지 않아 종종 하품할 만큼 피로가 쌓인 터라 아직 잘 시간이 아님에도 졸음이 몰려왔다.
“하암….”
“마님, 머리는 풀어 드릴까요?”
“응, 오늘은 일찍 자야겠어.”
엘리의 손에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이 풀어지고 잠옷으로 갈아입혀졌다. 손 하나가 비었는데도 엘리의 능숙함 덕에 불편하지 않았다.
부부 침실로 들어가기 전 잠깐 노아의 방에 들른 앤시아는 엘리를 돌려보냈다. 아기의 얼굴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고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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