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80)

#001

“비가 많이 오네…….”

커튼을 걷어 창문 너머를 확인한 베로니카 아가씨가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등 뒤로 깍지를 낀 채 베로니카 아가씨 옆으로 다가간 나는 아가씨가 걷어놓은 창문 사이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러네요. 이번 우기는 평소보다 더 비가 많이 오려나 봐요.”

밤인 것도 모자라 비를 몰고 온 먹구름이 달빛과 별빛을 가려, 밖은 암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가씨의 말마따나 이번에는 유독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많이 걱정돼서 그러시죠?”

나는 조심스럽게 베로니카 아가씨를 향해 물었다.

베로니카 아가씨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안다.

혹시라도 비 때문에 영지의 작물이 망가질까 노심초사하며, 그로 인해 상심하게 될 영지민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응. 부디 다 괜찮아야 할 텐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큰 문제 없을 거예요.”

베로니카 아가씨를 다독이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무섭게 내리는 비는 영 그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 우기에는 장대비가 쉬지 않고 내리려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작물 상태라도 잠깐 확인하고 오는 게 좋을 것 같아.”

베로니카 아가씨는 한참을 창밖을 보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계셨다. 그러던 중, 한숨을 푹 내쉬던 베로니카 아가씨가 갑자기 밖으로 나서겠다는 말을 꺼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기묘한 기시감을 느끼고 말았다.

나는 어디선가 베로니카 아가씨가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래, 분명 ‘본’ 적이 있었다.

비 오는 날, 작물 상태를 확인하러 나가던 베로니카 아가씨, 그리고 그 길목에 쓰러져 있던 낯선 남자…….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나가니 낯선 기억이 나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클레어?”

“네, 네?”

한동안 내가 대답이 없자 베로니카 아가씨가 의아해하며 내 이름을 불렀다.

“갑자기 왜 그래? 괜찮아?”

“네? 아, 네. 괜찮아요. 저 완전 멀쩡해요!”

나는 베로니카 아가씨에게 안심을 드리기 위해 일부러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입꼬리가 가늘게 떨리는 듯했다.

“그럼 나갈 준비를 해줄래?”

다행히도 베로니카 아가씨는 내 입꼬리가 떨리는 것을 보지 못한 듯했다. 안도하며 미소 짓는 아가씨를 보고 있자니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여긴 소설 속 세상이었다.

갑작스럽게 되찾은 기억이 나를 어지럽게 뒤흔들었다.

내가 환생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정확히 어떤 세계인지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막연히 로판이나 판타지 세계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가씨의 그 말을 듣는 순간, 거짓말처럼 한 가지 소설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고, 자세하게.

이곳은 ‘낙화’라는 19금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 세상이었다.

악역 알렉산더 베르첼에 의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 여자주인공 베로니카 메이너드가 남자 주인공 에드윈 앤스티스를 만나며 극적으로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소설의 프롤로그 부분이며, 데뷔탕트를 거치지 않은 베로니카 아가씨께서 처음으로 알렉산더 베르첼 공작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아, 안 돼요!”

“응?”

오늘 베로니카 아가씨와 베르첼 공작을 만나게 둬서는 안 되었다.

만일 두 사람이 만나 베르첼 공작이 아가씨에게 한눈에 반해버리면 모든 게 끝이었다.

우리 아가씨의 사랑스러움을 본다면 누구나 한눈에 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개한 꽃잎처럼 부드러운 분홍색 머리칼, 하늘색 토파즈처럼 투명한 눈동자. 매끄러운 피부에 앵두처럼 붉고 도톰한 입술까지.

이러니 악명 높은 베르첼 공작마저도 베로니카 아가씨께 목맸던 거였겠지. 그럼 내가 읽었던 원작처럼,

베르첼 공작이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면, 그는 아가씨를 얻기 위해 백작가를 무너트릴 계획을 세울 것이고, 마침내 아가씨를 감금하여 처참하게 짓밟을 터였다.

우리 사랑스러운 아가씨의 인생이 그렇게 곤두박질쳐지는 건 절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르첼 공작이 아가씨를 얻기 위해 고립시킬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자 플레뢰 백작가의 모든 인물을 살해하기까지 한다. 당연히 아가씨를 제일 가까이에서 모시는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가씨를 위해서, 그리고 내 목숨을 보신하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이 오늘 만나는 일을 막아야만 했다.

나는 황급히 창밖을 힐끔거리며 오늘 아가씨가 나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았다.

“오늘 비도 많이 오잖아요! 나갔다가 감기라도 들면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밤도 깊었는데 오늘은 이만 주무시고, 내일 해가 뜨면 그때 나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렇게 걱정되시면 제가 나갔다 올게요. 아가씨는 안에서 쉬고 계세요.”

“클레어 너 혼자서?”

“네. 저 비 맞는 거 엄청 좋아하는데 모르셨죠?”

비 맞는 걸 좋아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변명이었다. 베로니카 아가씨는 처음 듣는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랬니? 너랑 매일 같이 자랐지만, 처음 들어봐.”

당연한 일이었다. 거짓말이었으니까.

“새, 생긴 지 얼마 안 된 취미예요. 예전에 어쩌다 비 오는 날 밖에 나간 적이 있는데 기분이 썩 나쁘지 않더라고요.”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던 아가씨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오늘 부탁해도 될까? 잠깐 확인만 하고 돌아오면 돼.”

“그럼요. 저만 믿으세요.”

다행히도 아가씨가 넘어가 주는 모양이었다.

“얼른 확인하고 올게요. 아가씨는 여기서 꼭 기다리고 계셔야 해요. 알겠죠? 늦을지도 모르니 먼저 주무시고요.”

“응. 길 미끄럽고 어두우니까 조심해야 해.”

대답을 듣자마자 얼른 방에서 나왔다.

서둘러 내 방에 돌아가 젖어도 되는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후 우의를 걸치고 성을 나섰다.

비는 여전히 무섭게 내리고 있었다. 단순히 표현의 의미가 아니었다. 실제로 바깥으로 나오니 떨어지는 빗물로 인해 어깨가 아플 지경이었다.

우의 안에 두꺼운 옷을 입지 않았다면 분명 다음날 몸살에 걸릴 것 같았다.

그렇지만 지금 이것저것 따질 새가 없었다. 나는 우선 아가씨라면 둘러보았을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농지로 나와 보니 아가씨께서 걱정하신 대로 작물들은 빗줄기로 인해 쓰러져 있었다.

씁쓸한 마음으로 작물들을 바라보던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낯선 인영을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예상대로 사람이었다.

검은 옷차림에 잘생긴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남자는 부상을 당했는지 한 손으로 복부를 짚고 있었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는데 빗소리가 워낙 커서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이봐요.”

당신이 알렉산더 베르첼 공작이죠?

마찬가지로 빗소리 때문에 내 말이 들리지는 않겠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에 그를 불러보았지만, 남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빗물이 고여 질어진 바닥에 발이 미끄러질 뻔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남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담겼다.

그의 이마 위로 까만 머리칼이 빗물에 젖어 애처롭게 흐트러져있었다. 날카로운 콧날에 물방울이 맺혀 그의 붉은 입술 위로 톡 하고 떨어졌다. 이렇게 수려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우리 아가씨 이후로 처음 본다.

나는 그를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틀림없이 이 남자가 베르첼 공작이다.

나는 대답 없는 남자를 바라보며 잠시 갈등했다.

이대로 이 남자를 지나친다면, 언젠가 병사들에 의해 구조가 될 터였다.

거기다 신분을 증명하는 패를 갖고 있을 테니 신분을 확인한 병사들이 이 남자를 영주 성으로 데려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남자가 영주의 딸인 베로니카 아가씨와 만나는 건 당연한 절차일 것이었다.

만일 그렇게라도 두 사람이 만난다면, 틀림없이 아름다운 아가씨의 외모에 반하고 말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절대로 두 사람을 만나게 해서는 안 됐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자를 이곳에 방치할 수 없었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인근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창고가 있었다.

그곳이라면 한동안 남자를 숨겨둘 수 있을 것 같았다.

크게 마음을 먹고 남자의 어깨를 들어 올렸다.

나보다 훨씬 큰 남자를, 그것도 비에 젖어 축 늘어져 있는 남자를 옮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간신히 세 걸음 뒤로 걸은 후에 잠깐 쉬고, 또 두 걸음 뒤로 간 후에 잠깐 쉬는 방식으로 남자를 끌었다.

나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후에야 간신히 남자를 창고까지 옮길 수 있었다. 대체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남자를 창고에 눕혀놓은 후 잠시 숨을 골랐다. 몸이 힘드니 벌써부터 인내심의 한계에 부딪히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여기서부터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창고는 추수 후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임시 창고였다.

우기인 동안에는 누군가가 이 창고를 찾아오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럼, 이대로 남자를 두고 가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봤지만, 그건 안 될 얘기다.

만약에 남자가 이대로 깨어난다면? 그래서 영주 성에 도움을 요청한다면?

말짱 도루묵이 되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내가 직접 이 남자를 여기서 치료해주고 영주 성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게 한 뒤 돌려보내는 것.

그렇게 한다면 아가씨와 이 남자가 마주칠 일도 없겠지.

하지만 이게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내가 일할 때는 이곳을 비우게 되니까…….

그렇다고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크게 한숨을 내쉰 후 우의를 벗어 벽에 걸어둔 나는 일단 남자의 옷을 벗기기로 했다.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감기나 저체온증에 걸릴 테니까.

혹시라도 이 남자가 여기서 죽어버리면 곤란했다. 이 남자가 부상을 당해 빗속에 있었던 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지만, 귀족을 구호하지 않는 것은 큰 범죄였다.

남자의 상체를 벗기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남자가 불현듯 눈을 뜨며 내 손목을 붙잡았다.

“누구냐…….”

눈꺼풀 속에 숨겨져 있던 푸른 눈동자는 마치 보석과도 같았다. 그의 시린 시선이 나를 향했다.

호흡을 할 수도 없을 만큼 몸이 저릿해져 오기 시작했다.

“아, 저…….”

간신히 입을 열려 하자 숨통이 트였다. 나는 남자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크, 클레어 에버니저라고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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