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뭐, 뭐예요?”
남자는 나를 벽에 밀어붙인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남자가 숨을 몰아쉴 때마다 그의 몸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혼자 왔나?”
남자는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나를 향해 물었다.
도움을 주려는 사람에게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행이었지만, 남자의 본래 지위와 내 신분을 생각하면 그의 무례함을 따질 수가 없었다. 물론 내가 원작을 알기에 이 남자의 지위를 알고 있는 거지만!
그리고 남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의심할만한 상황이었다. 웬 처음 보는 여자가 창고에 데려와 상처를 치료해준다는데, 나 같아도 수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나는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만약에 그가 나를 적으로 오인해서 죽이면 큰일이었으니까.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누군가를 데려왔을까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호, 혼자인데요.”
내 말을 들은 남자는 밖에 무슨 소리가 들리지는 않는지 숨을 죽였다.
우리 둘의 호흡 소리가 거친 빗소리에 파묻혔다.
“……혼자군.”
나는 몸을 살짝 비틀며 남자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남자가 내 어깨에 기댔다.
어깨에 닿는 남자의 머리가 뜨거웠다. 아니,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불덩이였다.
그때, 남자의 몸이 바닥으로 천천히 허물어졌다.
“이봐요!”
다급히 남자의 몸을 부축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겁기는 엄청 무거웠다.
그럴 만도 했다.
나보다 머리는 하나 반 개 정도는 크고, 몸도 근육질투성이였으니까.
나는 끙끙거리며 남자의 몸을 돌려 그가 정자세로 누울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인제 보니 남자의 상처가 더 벌어져 있었다.
“으, 아프겠다.”
벌어진 상처에서는 연신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죽지 않은 게 용했다.
혀를 짧게 차며 바닥에 떨어진 포션을 주워들었다.
하녀인 내가 구매할 수 있는 포션은 하급 포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포션 자체가 마탑에서만 나오는 물건이기 때문에 구하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높은 성능을 보장하는 포션은 당연하게도 높은 가격이 책정되어 있었다. 그런 건 귀족들이나 돈 많은 부자들이 아니면 살 수 없는 물건이었다.
뭐, 비록 하급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기에 돈을 모아 사놨더니 지금 이런 곳에 쓰게 되었다.
열심히 번 돈으로 간신히 구매한 것이었지만, 포션 하나로 메이너드 백작가의 사람들과 내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포션이 진짜로 효과가 있을지 궁금했는데 잘 됐다. 나는 주저 없이 포션 뚜껑을 열었다.
바로 남자에게 포션을 사용할까 하다가 호기심이 동해 잠시 포션 병을 코끝에 대보았다.
생각 외로 포션에서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뭐야. 포션 별거 없네. 확인했으니 이제 됐다.
나는 포션을 그대로 남자의 상처 부위에 천천히 부었다.
병에 들어있던 붉은 액체가 상처에 닿자 옅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마치 네온사인처럼 빛났다. 상처에서 뿜어지던 불빛은 은은히 빛을 내다가 천천히 스러졌다.
그리고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흉하게 벌어졌던 상처가 조금 아물어 있었다.
그래봤자 하급 포션이었나 보다. 벌어졌던 상처 위로 미세하게 새살이 돋았을 뿐, 아마도 남자가 움직인다면 상처가 다시 벌어질 것 같았다. 하급 포션의 능력은 지혈까지가 한계였다.
조금 실망스러운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나중에 하나 더 구입을 해놓는다면 나중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생각을 마친 후 미리 준비해왔던 손수건을 남자의 상처 부위에 가져다 대고 천을 둘러 고정했다. 서툰 솜씨지만, 이것만으로도 남자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상처가 붙으며 피도 멎었으니 과다출혈로 죽을 위험도 덜었고.
다시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해 보니까 남자의 얼굴이 한결 편안한 듯이 보였다.
이 정도면 됐을까?
이대로 우기를 무사히 지내면 남자가 다시 이곳에 올 일은 없을 터였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아가씨의 앞날에 불행이 몰아닥치는 일도 없어지겠지. 애초에 두 사람이 만나지 않은 걸로 되었으니까!
잘됐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가끔 와서 먹을 것 좀 챙겨주면 알아서 먹다가 가겠지.
이걸로 사랑스러운 아가씨의 미래를 지켜냈다는 생각에 뿌듯해졌다.
더불어 내가 죽을 미래도 바꾸었다.
“그나저나 진짜 잘생기긴 했다.”
바닥에 누워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라 불리는 아가씨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는데, 악역인 서브남주 역시 조각 미남이었다. 남주는 이 남자보다 더 잘생겼겠지?
남자의 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는 천천히 그의 이목구비를 훑었다.
선명한 눈매, 굳게 닫힌 눈 안에 숨겨져 있을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 오뚝하게 선 콧날, 얌전히 닫혀있는 입술, 그리고 그의 턱 아래로 곱게 수놓아진 선명한 목울대까지.
어쩜 피부도 이렇게 매끈할 수가 있을까?
그리고 그 몸은 또 어떻고.
“아냐. 정신 차리자.”
넋을 놓고 남자를 감상하다가 고개를 흔들어 사념을 털어버렸다.
어차피 나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앞으로도 인연이 없으면 더 좋고.
나는 잠든 남자를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급조치는 끝났고, 더 도울 부분은 없을 것 같았다.
***
“으윽.”
왼쪽 아래 복부가 찌릿하게 저리는 느낌에 알렉산더가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실내에 빛이 들어오지 않아 저녁처럼 어두웠다.
‘이곳은 어디지?’
알렉산더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갔다.
그는 분명 클레어라는 여자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클레어를 벽에 몰아붙이고 그녀가 혼자인 것을 확인했다.
그래, 확인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었다.
알렉산더가 시선을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창고였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무사히 창고에서 다시 깨어난 것을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클레어가 배신자의 끄나풀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알렉산더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복부가 아팠다. 검에 찔린 부상 때문이었다.
무심코 손을 들어 상처 부위를 짚은 알렉산더가 낯선 감촉에 의아함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손에 닿은 것은 붕대처럼 감겨있는 천이었다.
정성스럽게 매듭져있는 천을 바라보던 알렉산더가 숨을 내뱉듯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솜씨는 영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꼼꼼히 노력한 티가 났다.
***
“클레어 양,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주방에서 먹을 만한 음식들을 챙기고 있으니 주방장인 로트거가 내게 의문을 표했다.
미처 누군가가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던 차라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그, 그게 제가 요즘 키가 크려는지 자꾸 속이 헛헛해서요. 남는 음식이 있으면 야식으로 먹을 수 있을까 해서 왔는데….”
어색하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는 쟁반을 들어 올렸다.
쟁반에는 저녁으로 먹었던 햄 몇 조각과 따뜻하게 데워진 감자수프, 찐 감자 두 개와 삶은 계란 세 알, 그리고 빵과 염소젖 한 잔이 놓여있었다.
“저녁도 먹었는데 또 그만큼 먹으면 아침에 속이 좀 부대끼지 않겠나?”
로트거의 말에 걱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확실히 로트거의 말대로였다. 이걸 다 먹고 잔다면 다음 날 아침에 힘들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건 실제로 내가 먹을 음식이 아니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전 괜찮아요. 그럼 이거 가져가도 될까요?”
로트거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로트거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쟁반을 뚜껑으로 덮고 주방을 나섰다.
오늘도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잠시 비가 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떠나기 전에 쟁반 위에 비를 막아줄 방수천을 잘 덮어주었다. 기껏 준비한 음식들이 젖으면 곤란할 테니까.
마지막으로 꼼꼼히 살핀 후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그리고 빗속으로 들어갔다.
두꺼운 우의를 입고 있음에도 비가 따가울 정도로 무섭게 내리꽂혔다. 이러다 온몸에 멍이 드는 게 아닐까?
나는 발을 재촉하며 얼른 비를 피할 수 있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도착한 창고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정적이 가득했다.
나는 익숙하게 한 손으로 쟁반을 들어 창고의 문을 열었다.
“저기요? 들어갈게요.”
남자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나는 재빨리 문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에 들어서자마자 쥐고 있던 쟁반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바로 우의를 벗어 던졌다.
우의는 비를 막아주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무게가 제법 되었다. 그래서 걸치고 있으면 금세 지쳤다.
우의를 적당히 옆에 놓아둔 채로 남자를 찾았다.
남자는 지푸라기를 대충 깔아놓은 곳에 누워 자고 있었다.
바로 돌아갈까 하다가 매섭게 쏟아지는 비를 확인하며 마음을 접었다. 어차피 비도 미친 듯이 쏟아붓는데 잠시 이곳에서 쉬어 가야겠다.
지푸라기 위는 제법 푹신했다. 나는 자리에 앉은 채로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녀인 내가 공작의 얼굴을 이렇게 빤히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몇이나 될까?
아마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
그래도 지금은 예외였다.
이 창고 안에서 이 남자는 공작이 아니었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은, 그저 부상 입은 남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난 남자를 구한 은인이지.
그러니까 이렇게 바라보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남자의 얼굴은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았다.
온종일 바라보고만 있어도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티 한 점 없는 매끄러운 피부결과, 또렷한 이목구비에 숨을 쉴 때마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탄탄한 가슴근육까지.
무엇보다도 보석처럼 파랗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는 정말이지 환상적이었다. 지금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잠깐,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놀란 마음에 헛숨을 삼키고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빨갛군.”
남자가 듣기 좋은 저음으로 나를 놀리듯이 말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헛기침을 했다.
“더워서 그래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자 남자가 장난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날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