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
“알렉스요?”
남자가 알려준 이름에 솔직히 놀랐다.
남자의 원래 이름은 알렉산더 베르첼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알렉산더의 애칭이 알렉스라는 건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런 면에서 남자가 가명으로 그의 애칭을 댄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았다.
실제로 알렉스라는 이름도 존재하긴 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되새기듯 남자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알렉스 님이라고 할까요?”
“왜 경칭을 붙이는 거지?”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
내 말에 남자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알렉스라고 불러.”
“그래도 돼요?”
이상하다, 내 추측대로라면 이런 걸 쉽게 허용할 사람이 아닌데.
헉! 혹시 이걸 빌미로 나중에 트집 잡아서 죽이는 건 아니겠지?
의구심을 잔뜩 담아서 남자를 향해 묻자, 남자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주억거렸다.
“그렇게 불러줬으면 좋겠어, 클레어.”
내 이름을 부르며 제안하는 남자, 알렉스를 보며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암만 알렉스가 허용했다고 해도, 귀족인 알렉스의 이름을 경칭 없이 부르는 건 스무 해가 넘도록 하녀로 살았던 내게는 꽤 고난도의 일이었다.
게다가 알렉스가 보통 귀족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을 쟁취하기 위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는 비정상인 사람이었다.
내가 경계하면서 대답하기를 꺼리자, 알렉스가 피식 웃었다.
“한번 불러봐.”
나직한 그의 음성이 마법처럼 나를 묵직하게 울렷다.
“아.”
“아?”
“알렉스…….”
결국 남자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다행히도 알렉스는 내가 이름을 불렀음에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워하는 듯이 웃어 보였다.
나는 괜히 어색해서 알렉스에게서 시선을 돌려버렸다.
장마 기간이라고는 하나,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는 날씨여서 그런지 창고가 좀 더운 것 같았다.
아니면 내가 알렉스를 의식해서 더운 걸지도.
어쨌든 알렉스는 내가 봤던 사람 중에서 제일 잘생긴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탄탄하게 자리 잡은 근육까지 보이고 있으니 사실 의식이 안 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아까 붕대 갈면서 보니까 상처는 많이 나은 것 같은데, 이제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죠?”
괜히 뜨거운 뺨을 차가운 손으로 만져 식혔다.
알렉스는 내 물음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상처 부위를 매만졌다.
“그런 것 같군.”
“정말 다행이에요.”
확실히 비싸긴 해도 포션이 좋긴 좋다.
처음 남자를 봤을 때만 하더라도 남자의 복부에 난 자상은 도무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보였는데, 지금 움직여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었으니까.
그 포션을 사기 위해 내가 꼬박 3년 동안 아끼고 아껴왔던 날들이 거짓은 아니라는 게 증명이 되어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 아깝기도 했다.
이렇게 효과가 좋다면, 나중에 하나 더 사서 비상용으로 구비해 놔야지, 하면서도 알렉스를 구하기 위해 사용했던 포션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래도 뭐, 이미 써버린 포션을 어쩌겠어?
아깝기는 하지만, 다시 모아서 사면 되는 거지.
알렉스에게 돈을 받아낼 수도 있었지만, 왠지 그건 좀 껄끄러웠다.
이러다 보상하겠다고 다시 이 영지로 오면 큰일이니까.
차라리 포션 하나 값으로 아가씨는 물론, 내 목숨까지 구했다고 치면 된다.
그래, 목숨값치고는 싼 편이니까.
“그나저나 네가 나한테 궁금한 게 없다고 했지만, 난 너한테 궁금한 게 많은데.”
“저요?”
뜬금없는 알렉스의 말에 당황해서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클레어.”
알렉스가 천천히 창고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 순간, 창고에서 불을 밝히고 있던 촛불이 일렁거렸다.
주홍빛 불빛이 잠깐 흔들렸다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나는 그사이에 알렉스가 내게 궁금할 게 무엇이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나한테 궁금할 게 있긴 한가?
나는 알렉스처럼 비밀이 많지도 않았고, 누군가가 습격해서 부상당할 만큼 다른 사람에게 밉보인 적도 없었고, 시샘할만한 권력 또는 재력도 없었다. 그렇다고 무언가 꿍꿍이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평범한 하녀일 뿐이었다.
조금 특별한 게 있다면 환생을 했고, 하필이면 환생한 곳이 전생에 읽었던 책 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정도일까?
혹시 아직까지도 내가 다른 사람의 끄나풀이 아닐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저번에 나한테 떠보듯이 얘기했던 것도 장난이라고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나를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헉, 그럼 나 여기 있어도 괜찮은 걸까?
이러다가 잘못 대답해서 저 사람한테 살해당하는 거 아니야?
“이곳 출신인가?”
내가 알렉스의 질문을 예상하며 머리를 굴리는 사이, 알렉스가 기습적으로 내게 물었다.
“……네, 이 영지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나는 혹시라도 내 대답 중에 의심스러울 만한 게 없는지 곱씹고 곱씹은 다음에야 대답을 꺼내놓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질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직업은 따로 있고?”
직업을 묻는 말에서는 잠시 멈칫거렸다.
사실대로 밝히는 거야 어려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괜히 의심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돌려 말했다가 알렉스가 내 뒷조사라도 하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굳이 들킬 거짓말을 해서 화근을 남기느니 솔직히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메이너드 백작가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어요. 매번 가져오는 식사들도 다 백작가에서 몰래 가져온 것들이에요.”
내 말에 알렉스가 잠시 음식이 담겨있을 쟁반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군. 그럼 그곳에서는 지낼 만한가?”
“그럼요. 다들 좋으신 분들인걸요.”
알렉스는 그 외에도 나에 대해 몇 가지 기본적인 것들을 물어보았다.
많이 긴장하고 떨었던 것과 달리 질문은 평이했다.
사실 왜 굳이 이런 것들을 묻나 싶을 정도로 사소한 질문들이었다.
어차피 내 정보는 별로 유용하지도 않을 텐데.
처음에는 내 신상으로 뭔가를 하려나 싶었지만, 고작 하녀인 나에 대한 정보를 캐내서 무엇을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질문 끝났으면 이제 가 볼게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치마에 붙었던 지푸라기가 내 손짓에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손을 가볍게 턴 뒤에 어제 들고 왔던 쟁반을 챙겼다.
“또 올 건가?”
“……오지 말까요?”
안 오면 배고프다고 빗속을 뚫고 저택으로 쳐들어오는 거 아니야?
사실 내 입장에서는 창고로 오지 않는 쪽이 편하긴 하다. 아무렴 빗속을 헤치고 여기까지 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남자가 떠날 때까지는 필연적으로 내가 이곳에 방문하게 될 것 같았다.
“아니, 또 봤으면 좋겠군.”
조금은 아쉬운 대답을 들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
“클레어, 요즘 밤마다 어딜 그렇게 가는 거야?”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알렉스가 먹을 음식을 주방에 챙기러 가려는 찰나, 베로니카 아가씨가 불쑥 내게 물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나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뒤돌아보았다.
마치 도둑질을 하다 들킨 것 같은 심정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좀 맞는지도 모르겠다.
식사 후 남은 음식이기는 했지만, 몰래 음식을 빼돌려 알렉스에게 가져다주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찔리는 부분이 있어 조금 아연했다.
아가씨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놀라?”
“놀라기는요? 어머, 아가씨! 제가 놀라긴 언제 놀랐다고 그러세요?”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했다.
혹시 아가씨가 다 아는 건 아니겠지?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내가 알렉스를 도와준 것을 여주인 베로니카 아가씨가 알게 되는 것.
내가 알렉스를 만나는 것을 들키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겉으로 볼 때 나는 어디까지나 호의로 상처를 입은 알렉스를 도와준 거니까.
나는 결백했다.
하지만 내가 우려하는 것은 아가씨가 혹시라도 호기심에 나를 따라왔다가 알렉스와 마주치는 상황이었다.
물론 내가 베로니카 아가씨와 알렉스의 만남을 영원히 막을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아가씨가 사교계에 데뷔하면 자연스럽게 무도회에서 알렉스를 만나게 될 터였다.
그건 내가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녀인 내가 아가씨의 무도회 참석을 막을 수는 없었으니까.
어쩌면 그때 알렉스가 아가씨에게 빠져드는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럼 정말 절망적이겠지만.
어쨌든 내가 가장 막고 싶어 하는 것은 두 사람이 지금, 원작에서 언급된 이 상황에 만나는 것이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내가 막을 수 있는 일이니까.
“혹시 밖에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니?”
“네? 좋아하는 사람이요?”
아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소리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만일 내가 원작을 알지 못했더라면 한 번쯤은 그를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얼굴도 잘생기고, 몸도 좋은데 싫어할 이유는 없으니까.
문제는 내가 이미 알렉스의 실체를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가씨께서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네, 정말이요.”
내 목소리에 절로 억울함이 실렸다.
아가씨는 긴가민가하는 듯한 눈치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믿어줄게. 그래도 너무 늦게 다니지는 마. 가뜩이나 장마라서 어둡고 위험하니까.”
베로니카 아가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방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아가씨께서 방으로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가씨가 궁금해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좀처럼 밖에 나가지 않던 내가 요 며칠 사이 밖에, 그것도 장마로 인해 비가 퍼붓는 곳으로 나가고 있으니 의아했겠지.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들었을 어두운 밤이었다.
나였어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싶었을 거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베로니카 아가씨가 끝까지 캐묻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를 배려해주신 게 분명했다.
상냥한 우리 아가씨. 이게 다 아가씨를 위한 거니까 용서해주세요.
오늘은 하루 건너뛰어야 하는 게 아닐까?
우려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이제는 안 가는 것도 영 찜찜했다.
결국 짧은 갈등 끝에 주방으로 들어가 음식을 챙겨 나왔다.
비는 멈출 줄을 모르고 계속 퍼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