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알렉스, 저예요.”
알렉스가 먹을 음식을 챙겨 창고로 들어왔다.
내가 밤중에 자리를 비우는 것을 눈치챈 몇몇 사람들이 혹시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냐며 채근하는 통에 나오는 게 조금 어려웠다.
차라리 내가 정말 애인을 만나기 위해 밤마다 나오는 거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난 나름대로 메이너드 백작가와 우리 아가씨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인데 그런 오해를 하다니!
속으로 툴툴거리며 알렉스가 있을 자리를 확인했다. 그는 잠든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알렉스?”
그런데 알렉스의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그가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식은땀을 연신 흘려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들고 왔던 쟁반을 바닥에 내려놓은 후 황급히 알렉스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알렉스. 괜찮아요?”
무심코 그의 몸을 잡고 흔들던 나는 그만 화들짝 놀랐다. 그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기 때문이다.
나는 당황스러움에 그에게서 손을 뗐다.
포션이 있으면 병도 금방 낫겠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갖고 있던 포션은 이미 일전에 알렉스의 자상을 치료하는 데 사용해버렸다.
잠시 망설이다가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음식과 함께 챙겨왔던 식수를 손수건에 적셨다. 미지근했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그의 열기를 식혀줄 수는 있을 터였다.
나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알렉스의 이마 위에 손수건을 얹어두었다. 알렉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얕게 뒤척였다.
“알렉스, 들리지 않겠지만,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줘요. 뭐라도 챙겨올 수 있는 게 있는지 확인해볼게요.”
알렉스는 답이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우의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후 다시 빗속으로 달려들었다.
무겁게 내리퍼붓는 빗속을 달리고 또 달려 나는 마침내 백작령 내에 있는 의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기요! 안에 계세요?!” 눈앞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힐 뿐이었다.
“닥터 볼테인! 안에 안 계세요?!”
하도 외치다 보니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나 굳게 닫힌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백작가로 돌아가서 약재를 구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순간이었다.
깜깜하던 의원의 불이 켜진 것이었다.
“닥터 볼테인!”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문을 두드리며 의사를 찾았다.
곧이어 문이 열렸다. 닥터 볼테인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음? 베로니카 아가씨의 하녀가 아닌가? 일단 안으로 들어오게. 비가 많이 오고 있으니.”
닥터 볼테인이 나를 알아보고는 안경을 고쳐 썼다. 그러고는 안으로 들어올 것을 권했다.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닥터 와트가 내게 물잔을 건네주었다.
“이 시기에 여기까지는 무슨 일인가? 혹시…… 베로니카 아가씨께 무슨 일이라고 생긴 건가?”
닥터 볼테인은 얼굴을 굳히며 심각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문득 닥터 볼테인에게 알렉스의 존재를 알려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닥터 볼테인이 알렉스를 알아볼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알렉스 역시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 나 때문에 알렉스가 오해하여 닥터 볼테인에게 해를 끼친다면 어떡하지?
“말해보게. 베로니카 아가씨께서 편찮으신 건가?”
내가 말끝을 흐리고 선뜻 이어 말하지 않자 닥터 볼테인이 나를 채근했다.
나는 망설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베로니카 아가씨는 괜찮으세요. 하지만 데, 데릭! 데릭이 좀 아파요! 그래서 혹시 약을 구할 수 있는지 여쭤보려고 왔어요.”
“데릭 군이?”
“네!”
닥터 볼테인의 질문에 나는 데릭의 이름을 팔았다. 그의 옷을 빼돌린 것도 모자라 그의 이름까지 팔아먹은 것이 좀 미안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맛있는 거라도 좀 챙겨줘야지. 알렉스를 위해서 훔쳤던 옷에 대한 보상도 못 한 상태였지만…….
“어디가 어떻게 아픈가? 내가 직접 가 보겠네.”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냥 약만 타가면 될 것 같아요. 증상은…… 열이 심하게 나고 식은땀을 많이 흘려요. 그리고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내 말이 이어질수록 닥터 볼테인의 눈이 커졌다.
“아니, 그 정도라면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해봐야……!”
“안 그러셔도 돼요! 야, 약만 타갈게요.”
증상을 들은 닥터 볼테인이 황급히 왕진 가방을 찾으려는 듯 몸을 돌렸다. 나는 다급히 그를 만류했다.
“더 빠르게 나으려면 내가 진찰하는 것이 나을 걸세.”
“약만…… 타갈 수는 없을까요?”
여기서 더 변명할 수도 없었다. 나는 간절하게 닥터 볼테인을 붙잡고 부탁했다.
닥터 볼테인은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게.”
“네.”
닥터 볼테인이 약을 챙기기 위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기다리는 동안 물잔으로 목을 축였다. 시원한 물이 속을 채우니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오래 기다렸네. 여기 이 약을 먹이면 좀 나아질 걸세.”
안에서 약을 챙겨 나온 볼테인이 약병을 내게 건넸다.
작은 병 안에는 환으로 된 약이 몇 알 들어있었다.
“해열제일세. 일단 이거라도 먹이고 낫지 않거든 날 다시 찾아오게. 그걸로도 안 된다면 내가 직접 진찰하는 게 나을 테니.”
“네, 알겠어요. 감사해요.”
나는 닥터 볼테인에게 꾸벅 인사한 후 우의를 제대로 착용했다.
다음 목적지는 메이너드 저택이었다.
일단 알렉스가 넉넉히 마실 만한 물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했고, 그의 열을 내리기 위해 수건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을 넉넉히 챙겨 가려다 보니 수통을 다섯 병이나 채웠다.
이 정도면 그래도 모자라지는 않을 것이었다.
수통 때문에 다시 창고로 향하는 걸음이 무거웠다. 비도 무겁게 어깨를 때리는데 수통의 무게마저 더해지니 몇 걸음 걷지 않아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렇게 간신히 창고에 도착한 나는 일단 문 안으로 들어와 바닥에 허물어졌다.
너무 힘들어서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았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우의를 벗어버린 후 알렉스를 향해 다가갔다.
알렉스의 몸은 여전히 뜨거웠다. 내가 그의 이마에 얹어두고 갔던 손수건도 벌써 따뜻해졌다.
나는 그의 머리에서 손수건을 치우고 수건으로 그의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창백한 피부가 애처롭게 떨렸다. 장인이 빚은 도자기처럼 보였지만, 금방이라도 깨질 것만 같다.
얼굴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내고자 손으로 그의 뺨을 매만졌다. 지쳐서 차갑게 질린 내 손에 그의 뜨거운 피부가 닿았다.
그때였다.
알렉스가 미간을 움찔거리더니 눈을 힘겹게 떴다.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클레어?”
지친 목소리로 알렉스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제야 그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괜찮아요, 알렉스? 상태가 안 좋아 보여요.”
“좋지는 않군. 열이 좀 나는 것도 같고.”
마치 다른 사람의 상태를 말하듯 초탈한 목소리였다. 그게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남 이야기하듯 말하지 말아요. 알렉스 본인의 상태잖아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향해 핀잔을 주자 알렉스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일단 약을 구해왔어요. 이것 좀 먹어봐요.”
나는 알렉스에게 환알 한 개를 입에 대주었다. 그러나 그는 입을 벌리다 약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나는 바닥을 구르는 약을 바라보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물에 개어주는 쪽이 더 먹기 편할 것 같았다.
“잠시만 기다려요. 물에 개어줄게요.”
“…….”
아까 챙겨왔던 쟁반에서 스푼 하나를 꺼냈다. 스푼 위에 환약을 올려 조심스럽게 물을 따랐다. 그러고는 환약이 잘 녹도록 포크로 살살 개었다.
녹색의 약물은 보기만 해도 써 보였다.
어차피 내가 먹을 건 아니기 때문에 곧장 고개를 돌려 알렉스의 입가로 약을 가져갔다.
“아, 해요.”
알렉스는 내가 시키는 대로 입을 자그마하게 벌렸다. 나는 그 사이로 약을 천천히 흘려 넣었다.
약이 얼마나 쓴지 알렉스의 미간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써도 참아요. 원래 몸에 좋은 약이 쓰다잖아요. 이 약이 알렉스의 열을 낮춰줄 거예요.”
“몸에 좋은 약이 쓰다, 라…….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는데 맞는 말 같군.”
뒤늦게 여기서는 쓰이지 않는 속담이라는 것을 깨달아 아차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알렉스는 별생각 없는 듯했다.
그보다 생각보다 알렉스는 말이 참 많은 것 같았다.
지금도 아픈 와중에 나와 계속 대화하려는 것을 보면 분명 그럴 것이었다.
원작의 큰 줄기와 내용만 알고 있으므로 그가 이런 캐릭터였는지 의문이 들었다. 자세히 모르는 설정 속에 이런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숨겨져 있었나 보다.
“나 때문에 약을 구해온 건가?”
알렉스가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나는 수통을 열어 수건에 물을 적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프지도 않은 저를 위해서 약을 구해왔겠어요?”
젖은 수건으로 천천히 알렉스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알렉스는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얼른 나아요. 아프지 말고.”
그래야 나도 걱정을 덜 수 있을 테니까.
“오늘.”
그때 문득 알렉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까운 소리였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를 못 들을 수가 없었다.
“내 곁에 있어 주겠나?”
“……여기요?”
“그래.”
알렉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러고는 감았던 눈을 떠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가 왠지 애처롭게 보였다.
며칠 보면서 느낀 건데, 생각보다 알렉스는 응석이 많은 사람이었다.
일전에 내가 다시 왔으면 좋겠다고 한 것도 그렇고, 오늘 같이 있어 달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싫으면 됐어. 가 봐도 좋아.”
내가 답이 없자 알렉스가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그런 알렉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뭐, 환자니까 제가 오늘만큼은 곁에 있어 줄게요. 밤사이에 어떻게 될지 모르고.”
내가 대답을 마치자 알렉스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거 믿음직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