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이번에도 같았다.
알렉스도 그렇고, 알렉스의 가신들도 그렇고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처럼 말을 하는 게 너무 이상했다.
결국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들을 향해 물었다.
“자주 보게 될 것 같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요? 왜 저희가 자주 보게 된다는 건지 이해를 못 하겠어서요.”
그들이 알렉스의 가신들이고, 나는 메이너드 백작 영애인 베로니카 아가씨의 전속 하녀였으니 자주 만날 이유가 없었다.
“응? 공작 각하께 못 들었어요?”
“전혀요.”
나는 듣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페이비 경이 고민하듯이 턱을 쓸더니 뒤이어 나직이 감탄을 터트렸다.
“생각보다 쑥스러움을 타시나 보네. 근데 각하께서도 말씀 안 하신 걸 저희가 말씀드리기는 곤란하거든요.”
“설명해 드리지 못하는 건 양해 부탁드립니다.”
페이비 경의 말을 크루거 경이 받아 내게 대답했다.
결국 아무것도 알려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뭐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 두 가지로 정리해보기로 했다.
첫째, 알렉스가 메이너드 백작님과 무슨 일을 하려 한다는 것.
그럼 앞으로 자연스럽게 자주 만나게 되겠지.
하지만 왠지 그 가능성은 낮을 것 같았다.
메이너드 백작님이 알렉스를 별로 안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그럼 둘째, 이미 알렉스가 아가씨에게 사랑에 빠졌다는 것.
헉! 이건가?
생각만으로도 오한이 스쳤다. 원작대로 흐르지 않길 바라서 내가 직접 알렉스를 간호했던 건데, 이게 다 헛수고가 된 걸까?
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알렉스가 나를 찾아올 필요가 없었다.
아니, 차라리 나한테 사랑에 빠졌다고 하는 쪽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그럼 알렉스가 나를 찾아온 이유도, 알렉스의 가신들이 나를 찾아온 이유도 납득이 갈 테니까.
하지만 그거야말로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알렉스가 왜 날 좋아해?
내가 아가씨처럼 한눈에 보아도 사랑에 빠질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니고, 이 세계에서 특별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대사 몇 마디 나오다 죽었을 엑스트라인데 알렉스가 그런 엑스트라를 좋아할 리가 없지 않은가.
결국 두 가지 상황 모두 아니라는 소리인데, 그럼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건지 정말로 누가 알려줬으면 좋겠다.
“무도회는 처음입니까?”
곰 같이 생긴 자일 경이 사람 좋게 웃었다.
“처음이에요. 안 그래도 오늘은 제가 모시는 아가씨께서 사교계에 데뷔하는 날이거든요.”
“준비하느라 힘드셨겠어요.”
“그래도 아가씨가 다른 사람들보다 아름답게 보이길 바라며 최선을 다해 준비했더니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어요.”
“에버니저 양은 상냥하시군요. 메이너드 백작 영애를 모시는 마음도 갸륵하고요.”
“에이, 정말 우리 아가씨가 예뻐서 그래요. 아마 보시면 깜짝 놀라실걸요?”
“그렇습니까?”
크루거 경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인상이 마냥 흐릿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니 또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 에버니저 양이 무도회에 참석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으십니까?”
그때 테넌트 경이 느끼한 웃음을 날리며 물었다.
“글쎄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하녀인 제가 어떻게 무도회에 참석하겠어요?”
내가 회의적으로 웃자 또 기사단 사람들이 서로를 보며 의미 모를 눈빛을 주고받았다.
“혹시 모르죠. 언젠가 에버니저 양도 무도회에 참석하실 수 있을지.”
“제가요?”
“네.”
하녀에게 할 소리는 아니지 않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참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무도회가 열리는 동안, 내 곁으로 다가온 다섯 명의 장미 기사단 사람들 덕분에 지루하게 있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한참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시녀 한 명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대가 에버니저 양인가?”
“네, 저 맞는데요.”
“메이너드 백작 영애께서 찾고 있네. 마차는 미리 준비해 두었으니 밖으로 나가면 될 것이야.”
시녀는 짧게 안내해주고는 곧장 자리를 떠버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미 기사단 사람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뵐게요.”
장미 기사단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몸을 돌렸다. 다음에 또 보자고 얘기를 하긴 했지만 될 수 있으면 또 보기 싫었다. 하지만 그리 쉽진 않겠지.
복도를 따라 쭉 걷다 보니 황성의 출입구가 보였다.
그곳에 베로니카 아가씨와 그레인 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냐. 나도 금방 나왔어.”
“그럼 이제 돌아가요!”
아가씨와 함께 마차에 오르자 마차가 출발했다.
오늘 하루는 호텔에 머무르고, 내일이면 다시 메이너드 백작령으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무도회는 어떠셨어요?”
“재밌었어. 생각보다 다들 친절하시더라고. 아는 분들도 제법 있었고.”
아가씨는 무도회에서 있었던 일을 내게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즐거워하는 베로니카 아가씨를 보니 다행히도 무도회에서 별일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있었어.”
한참 무도회 이야기를 하던 아가씨가 영 찜찜한 듯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베로니카 아가씨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클레어, 너 혹시 베르첼 공작님과 만난 적이 있니?”
“예? 제가요? 베르첼 공작님과요?”
하마터면 아가씨의 질문에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줄 알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가씨를 바라보자 아가씨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럼 그건 대체 뭐였을까?”
의아해하는 아가씨를 보며 놀란 가슴을 쓸었다. 추측하건대 알렉스가 무도회장에서 아가씨한테 나를 언급한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눈 걸까?
궁금하기는 했지만, 제 발 저리는 것 같아서 차마 물을 수는 없었다.
***
베로니카 아가씨가 무도회장 데뷔하고 난 후로 꼬박 3개월이 지났다.
정말 다행히도 그사이에 별다른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
알렉스도 다시 만날 것처럼 이야기한 것치고는 3개월간 메이너드 백작령을 찾아오는 일이 없었다.
알렉스가 나타나지 않았던 과거의 평온한 삶을 되찾은 것 같아 마음이 절로 여유로워졌다.
여기가 아무리 소설 속 세상이라고 해도 악역이랑 여주가 엮이지 않는데 사건이 벌어질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알렉스가 아가씨에게 반하는 상황을 원천 봉쇄해버렸더니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중간에 내가 알렉스와 얽히면서 찜찜한 일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은 아무런 일도 터지지 않으니 마음이 편안했다.
오늘도 다른 날과 같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고 평화롭게 지나가겠지.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한참 졸릴 낮 2시가 되어가는 때였다.
아가씨가 승마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저택이 소란스러워졌다.
자연스럽게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관심이 쏠렸다.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 몰입해서 승마하던 아가씨조차도 그 소란을 눈치채셨는지 말을 멈춰 세우고는 저택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올까요, 아가씨?”
의아해하는 아가씨를 향해 물었다.
“응. 다녀올래?”
“네, 금방 확인하고 올게요!”
사실 조금 지루하던 터라 나는 몸을 움직일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걸음을 바삐 옮기며 저택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에요?”
지나가던 하인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아무래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이 어떤 일인지를 가장 잘 파악하겠지. 무언갈 알고 일하는 거니까.
“아, 글쎄 손님이 왔다지 뭡니까? 그것도 어마어마한 사람이요.”
“손님이요?”
갑자기 웬 손님?
저택에 손님이 방문할 때는 미리 꼭 연락을 준 후, 약속 때가 되면 방문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리고 이미 예견되어 있던 방문이라면, 이렇게 분주하게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원래는 미리미리 손님 맞을 준비를 해놓고 차분히 대접하는 것이 순리였다.
그런데 이렇게 혼란스럽게 준비하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미리 오기로 한 손님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 손님이 누구인데요?”
“거 있잖습니까. 베르첼 공작님이라고.”
“……네?”
아니,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어처구니가 없어서 멀어져가는 하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베르첼 공작이 왔다고? 알렉스가?
메이너드 백작님과 약속도 잡지 않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방문을 했단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이지?
당황스러움에 나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설마 나 때문인가?
참나, 나는 목숨을 구해줬는데 대체 왜 자꾸 이런 식으로 불편하게 얽히느냔 말이야.
아니지. 나를 만나러 온 게 아닐 수도 있었다.
아무렴, 하녀 한 명 만나려고 메이너드 백작령까지 오는 게 말이나 돼?
내가 뭐 중요한 사람도 아니고.
그래, 나 때문은 아니겠지. 그럼…….
헉!
역시 무도회에서 아가씨를 뵌 걸로 다른 마음을 품은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알렉스가 베로니카 아가씨와 만났다는 걸 그날의 대화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 그때 강렬한 스파크가 일 듯이 사랑에 빠져버린 건 아닐까?
안 돼!
아가씨와 알렉스는 절대로 접점이 생겨서는 안 되었다.
아가씨의 불행을 막기 위해서, 또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알렉스가 무슨 생각인지를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아까 그 하인에게 어디로 가야 알렉스가 있는지 물어보지 못했지만, 대충 그가 어디서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것 같았다.
메이너드 백작 저가 내 구역이기도 했으니 찾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었다.
본관 1층에 위치한 메인 응접실이었다.
“에버니저 양!”
응접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장미 기사단의 큰 곰, 자일 경이 나를 발견하고는 알은체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기어코 다시 만나는구나. 나는 그들에게로 다가가 가볍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더 예뻐지셨군요.”
“오랜만.”
“잘 지냈어요?”
“오랜만입니다.”
내 인사를 받은 다섯 명의 기사들은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내게 인사했다.
“그나저나 이곳까지는 무슨 일이세요? 보아하니 연락도 없었다고 하던데요.”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서 시간을 끄는 것보다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들에게 물었다.
“글쎄요. 우리가 말해줄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장미 기사단의 단장인 크루거 경이 난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기밀 사항이나 뭐 그런 얘기인 건가 싶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페이비 경이 방긋 웃으며 문을 가리켰다.
“안에 공작 각하 혼자 계시니 들어가 보세요.”
“제가요?”
내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