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아니에요.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 제가 자초한 일인걸요.”
나는 얼른 손사래 치며 아가씨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아가씨는 평소와 달리 슬픈 눈으로 나를 보며 내 말을 받아쳤다.
“그렇지 않아. 내가 그때 작물을 확인해보라고 하지 않았다면 네가 베르첼 공작님과 만나는 일도 없었을 거잖아. 그럼 네가 원하지도 않는 베르첼 공작 저로 가는 일도 없었을 거고.”
“어휴, 그런 생각 안 하셔도 돼요. 진짜로 쉬다가 올 거라니까요?”
나는 아가씨의 손을 잡고 울적해 하는 아가씨를 달랬다.
사실 이번 일로 인해 아가씨와 주인 어르신들의 마음을 알게 돼서 조금 기쁘기도 했다.
내가 그들을 좋아하는 것처럼, 그들 역시도 나를 좋아하고, 아껴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찍 부모님을 여읜 내게 이곳 사람들은 정말로 가족이 되어주었다.
메이너드 백작님과 백작 부인은 부모님처럼 날 챙겨주셨고, 베로니카 아가씨는 정말 날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다.
솔직히 알렉스를 따라간다는 게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메이너드 백작가를 위해서 하는 일에 망설임은 없을 것이었다.
“그럼 잘 다녀올게요.”
“……응.”
간신히 베로니카 아가씨를 달래고 짐을 챙겨 나왔다.
밖에는 이미 알렉스와 장미 기사단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물론, 메이너드 백작님을 비롯해 백작가의 사람들도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알렉스의 뒤에는 메이너드 백작가에서도 본 적 없는 화려하고 큰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짐은 저희에게 주십시오.”
처음 보는 사람이 내게 정중히 말했다.
보아하니 베르첼 공작가의 집사로 보였다. 집사까지 찾아온 거 보면, 알렉스가 정말 칼을 갈고 여기까지 온 모양이다.
나는 그 집사에게 짐을 넘기고 알렉스를 향해 다가갔다.
“잘 선택했어.”
알렉스가 짙게 웃었다.
나는 그런 알렉스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메이너드 백작님이 근심 어린 시선을 내게 보내고 있었다.
“그럼 백작님, 마님, 아가씨. 석 달 정도 요양하고 오는 셈 치고 다녀오겠습니다.”
“혹시라도 일이 있거든 언제든 편지를 보내거라. 그럼 널 데리러 사람을 보낼 테니.”
메이너드 백작님이 내 어깨를 살포시 두들겨 주었다.
나는 감사의 표시로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예, 백작님. 그럼 그동안 몸 건강히 계세요.”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메이너드 백작님과 백작 부인, 그리고 베로니카 아가씨를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인사를 마치고 몸을 돌리니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 숨을 크게 들이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초겨울의 아침 하늘은 유난히도 눈이 시렸다.
그래서 그런지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 같았다.
나는 눈물이 차오르기 전에 알렉스에게로 다가갔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내가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뒤이어 알렉스가 마차에 오르자, 곧 문이 닫혔다.
“출발하지.”
알렉스가 마부를 향해 명령을 내리니 곧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꼭 석 달.
베르첼 공작 저에서 무사히 보낸다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다.
최대한 얌전히 알렉스의 눈에 거슬리는 일 없이 지내다가 돌아와야지.
속으로 다짐하며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알렉스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
마차가 천천히 메이너드 백작 저에서 멀어졌다.
나는 마차에 난 창문을 통해 멀어져가는 메이너드 백작 저를 눈에 새겼다.
내가 클레어 에버니저로 태어난 이후로 아가씨도 없이 혼자 메이너드 백작령을 떠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데 새삼스러운 감상에 젖었다.
어차피 석 달 안에 다시 돌아오겠지만, 영영 떠나는 것처럼 마음이 울적하고 싱숭생숭했다.
마치 오래 살던 집을 독립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메이너드 백작저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창문을 통해 계속해서 밖을 내다보았다.
울렁거리는 마음을 다스리고 나서야 창문에서 시선을 뗄 수가 있었다.
“많이 서운한가 보지?”
“네. 그동안 메이너드 백작령을 벗어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아가씨의 데뷔탕트를 위해 세르갈로 갔을 때 빼고는요.”
“그럼 저번이 처음이었다는 이야기군.”
“뭐, 그렇게 되죠.”
23년 동안 정이 들었던 곳이었다.
어머니께서 내 나이 열두 살에 돌아가셨지만, 메이너드 백작가의 사람들은 늘 나를 딸처럼, 자매처럼 대해주었기 때문에 그 공백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어제와 오늘 확실히 느꼈다.
메이너드 백작가의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라는 걸.
고작 하녀 한 명이었다.
알렉산더 베르첼 공작이 나라는 사람을 갖길 원했다.
대체 어느 귀족이 하녀 한 명 지키려고 베르첼 공작과 대적할 수 있을까?
그냥 나 하나 알렉스에게 넘겨버리고 나면 알렉스와 좋은 친분을 유지할 수 있을 텐데,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끝까지 내 의견을 존중하여 내 안위를 걱정해주었으니 내가 감동을 안 받으려야 안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내가 그 사람들을 위해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딱 석 달만 베르첼 공작저에서 보내고 나면, 원작처럼 되는 일도 없을 거니까.
물론, 석 달 정도 나를 지켜보고 나면 알렉스도 나에 대해 흥미를 잃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섞여 있었다.
애초에 알렉스가 좋아해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으니까, 나를 가까이 두고 지켜보면 금세 나에 대한 감정이 식을 것 같았다.
뭐, 그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이지만.
어쨌든 나는 그 김에 베르첼 공작저에서 휴양을 보내는 것이다.
베르첼 공작 저라면 웬만한 호텔보다도 시설이 뛰어날 것이고, 설마하니 알렉스의 손님으로 온 사람, 그것도 표면적으로는 알렉스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베르첼 공작 저에 가게 되었는데 나에게 일을 시키지는 않을 테니 편안하게 쉬면 될 터였다.
“꼭 석 달 후면 다시 메이너드 백작령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는 것 같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알렉스가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다.
나는 어디에서 티가 났나 싶어 두 손을 들어 뺨을 매만졌다.
“제가요? 아닌데요?”
아닌 척해보려 했는데 생각보다 얼굴에 티가 많이 묻어나는 모양이었다.
알렉스는 낮은 비음을 흘리며 보석처럼 파란 눈동자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런 생각은 무용할 거야.”
“왜요?”
“내가 그대의 조건을 왜 수락한 줄 아나?”
사실 알렉스가 고작 석 달이라는 시간만 허락한 데에 의문이 들기는 했다.
알렉스로서는 아주 불리한 조건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알렉스는 순순히 내가 내건 조건을 모두 수락해주었다.
마치 해보라는 듯이.
그게 떠올라 눈을 굴리며 이유를 추측하고 있었는데 알렉스가 말을 이었다.
“석 달이면 충분하거든. 그대에게 메이너드 백작가가 아닌 베르첼 공작가를 선택하게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자신감 있는 소리에 나는 조금 불퉁한 마음이 들어 입술을 삐죽였다.
“그건 모르는 일이죠. 제가 23년이나 살아온 곳보다 석 달 정도 지낸 곳을 선택할 거라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닌가요?”
“글쎄, 과연 그럴까?”
오만해 보일 정도로 알렉스는 자신에 차 있었다.
내가 돌아온다는 선택을 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혹시 내가 알렉스의 꿍꿍이에 잘못 말려든 게 아닐까?
머리를 쓴다고 썼는데도 알렉스의 속을 알 수 없으니 오히려 내가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알렉스를 바라봤다. 그러자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그 이상 말해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너무 얄미웠다.
속을 알 수 없으니 결국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없었다.
설마하니 석 달 뒤에 못 가게 감금이라도 하려는 걸까?
내가 석 달 정도 베르첼 공작 저에서 호화로운 생활 좀 한다고 해서 메이너드 백작가를 저버릴 리가 없는데.
애초에 메이너드 백작가는 내 집이었으니까 돌아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좋은 생활을 해도 내 집, 내가 쉴 수 있는 장소가 제일 좋은 거 아니겠어?
“혹시 절 감금하실 건 아니죠?”
설마. 이 정도로 날 붙잡을 이유가 없잖아. 제발 내 기우이기를 바라며 나는 조심스럽게 알렉스를 올려다봤다.
알렉스는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런, 들켰나?”
“네?!”
기겁해서 소리치자 알렉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야. 그런 걸 할 리가 없지.”
알렉스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농담이라 했지만, 나는 일순간 소름이 돋아 차마 웃으며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뭐야, 나 진짜 잘못 생각한 거 아니야?
지금이라도 계약 조건 다 무르고 메이너드 백작 저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다시 생각해 보니 알렉스라면 충분히 사람을 감금하고도 남았다.
애초에 이 소설 19금 피폐물 소설 속이었잖아?
피폐물의 기본 중 기본은 감금인데, 내가 왜 그걸 간과했지?
헉, 이러다가 석 달 내내 호화로운 생활은커녕 감옥 같은 곳에서 평생 보내게 되는 건 아닐까?
내가 눈만 굴리며 반응이 없자, 알렉스가 다리를 느릿하게 꼬더니 고개를 얕게 기울였다.
“뭐, 취향이 그쪽이라면 존중해줄 수는 있지.”
“저, 전혀 아니거든요?”
“그건 아쉽군.”
아쉽긴 뭐가 아쉬워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악역한테 제대로 잘못 걸린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