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80)

#021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일전에 베로니카 아가씨의 무도회 데뷔를 위해 세르갈로 향했을 때와는 또 다른 상황이었다.

베로니카 아가씨와 함께 이동했을 때는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무도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하면서 가느라 금방 도착했던 것 같았는데……. 같이 이동하는 사람들이 낯선 사람들이기 때문인지 지루하고 심심했다.

특히나 알렉스는 일이 밀렸는지 이동하는 내내 쌓인 서류나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책을 보는 알렉스를 주시했다.

알렉스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문득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읽고 있는 그 책 재미있어요?”

심심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묻자 알렉스가 픽 웃음을 흘렸다.

“재미있어 보이나?”

“아뇨. 전혀요.”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젓자 알렉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보는 대로야. 재미가 있어서 읽는 것도 아니고, 재미가 있는 종류의 책도 아니고.”

“일하는 거죠?”

“그래.”

알렉스는 한 번 보라는 듯 내게 책을 내밀었다.

받아 들고 보니 ‘1592년 2/4분기 재무 보고서-베르첼 가-’라고 적혀 있었다. 올해 여름 분량의 재무 보고서인 듯했다.

으, 일 때문에 보는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재미없는 책이었다.

나는 질색하며 곧바로 알렉스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근데 그 책 아무한테나 막 보여줘도 돼요? 중요한 걸 텐데.”

보통 재무 보고서라면 그 가문의 재무 상태부터 사소한 현금 흐름까지도 모두 기재되어 있는 자료였다.

메이너드 백작가에서 평생을 살아왔던 나조차도 메이너드 백작가의 재무 보고서를 읽어 본 적이 없었다.

아가씨는 종종 보는 것 같았는데, 하녀인 내가 그걸 읽을 일은 없었다. 읽으려고 시도조차 한 적도 없고.

그런데 알렉스는 그런 자료를 내게 아무렇지 않게 넘겨주었다.

지나치게 안일한 태도에 겉으로는 내색 안 했지만, 속으로는 크게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알렉스는 내가 건넨 책을 받아 들고는 입술로 호를 그렸다.

“클레어 그대가 ‘아무나’는 아니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어차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으면 여기 적혀 있는 걸 알아보기 힘들어. 메이너드 백작이 아무리 클레어 그대를 아꼈다고 하더라도 재무 쪽으로 공부를 시키지는 않았을 거야. 안 그런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가 알기로 그대는 메이너드 백작가 재정을 관리하는 하녀가 아니라, 메이너드 백작 영애의 시중을 드는 하녀니까.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일리 있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의 말이 사실이기도 했다.

메이너드 백작가에서도 재정을 관리하는 직원은 따로 있었다.

하녀장과 집사장의 직속 직원들이었는데, 매일 일에 혹사당하는지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게 어려 있었으며 늘 피로해 보였었다.

가끔 나를 보면 내 어깨를 붙잡고 ‘넌 이런 거 하지 마.’하고는 눈물을 글썽거리곤 했다.

“그래도 계속 우리 저택에서 살려면 배워둬야 할 거야. 나중에 따로 선생을 붙여주지.”

“네? 뭐라고 하셨어요?”

“못 들었나? 공작 부인의 소양에는 저택의 재무 흐름을 관리도 있다만…….”

아니, 내가 언제 거기 눌러앉는다고 했어? 착각도 유분수지!

“아뇨, 공부를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베르첼 공작 저가 아닌 메이너드 백작 저에서 하고 싶은데요? 아직 석 달을 지낸 것도 아닌데 너무 확정하고 말씀하시는 거 아닌가요?”

“그런가?”

알렉스는 더 꼬투리 잡지 않았다. 다만 특유의 오만한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근데 그 모습조차도 지나치게 잘생겨서 눈길을 빼앗겼다.

잘생긴 얼굴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긴 한 모양이었다.

지금도 알렉스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심심하기는커녕 즐겁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를 알렉스가 눈치챘다간 저 잘난 얼굴이 거만해질 게 뻔하니 나는 모르는 척 눈을 굴렸다.

“심심한가?”

“네. 엄청요. 앞으로도 마차로 한참 가야 하는데 이러다가는 심심해서 죽을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입술을 비죽거리며 대답하니 알렉스가 재무 보고서를 옆 의자에 내려놓았다.

“심심하면 읽을 만한 책을 좀 구해 줄 수도 있는데.”

“음…….”

잠시 고민에 빠졌다.

확실히 책을 읽으면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와중에 내가 책을 읽고 멀미하지 않을 확률이 얼마나 되냐는 것이었다.

짧은 생각 끝에 답을 내렸다.

책을 읽고 싶긴 하지만 그래도 멀미하며 고생하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잘생긴 알렉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시간을 죽이는 게 더 나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냥 할 일 없이 시간이나 죽이죠, 뭐.”

“그렇다면야.”

두 번 권하지 않는 알렉스의 단호함에 눈이 가늘게 떠졌다.

“더 안 권하시는 건가요?”

내 말에 알렉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권했어야 했나 보군. 그럼 내가 심심하지 않도록 함께 대화를 하는 건.”

“아뇨, 괜찮아요. 하시던 일 계속하세요.”

심심함을 해소한다고 알렉스의 관심을 받는 것은 또 사양이었다.

내가 손사래 치며 거절하자 알렉스가 나를 빤히 주시했다. 그런 그를 보며 재차 거절의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결국 알렉스는 옆에 놓아두었던 재무 보고서를 들어 다시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알렉스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할 일도 없는데 창밖이나 보면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창밖으로는 수풀 따위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차가 움직이고 있었는데, 하도 비슷한 풍경뿐이다 보니 뭐가 바뀌는 건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무겁게 감기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잠의 마수에 빠져들었다.

***

부스럭거리던 클레어의 옷자락 소리가 잦아들고, 색색거리는 작은 숨소리만이 마차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알렉산더는 갑작스럽게 조용해진 클레어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 재무 보고서에서 눈을 떼었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클레어는 마차 벽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 앞머리 아래로 곱게 닫혀있는 눈, 오뚝한 코와 작게 벌어진 입술 안에는 하얀 치아가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알렉스는 천천히 클레어의 얼굴을 살폈다.

혹시라도 그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그녀에게 부담으로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자제하며 일에 집중한 것이었다.

물론,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 것도 사실이기는 했다.

하지만 클레어가 잠든 지금만큼은 잠시라도 마음 놓고 클레어를 눈에 새기고 싶었다.

깨어 있을 때는 알렉산더를 경계하느라 잔뜩 긴장한 모습만 보이더니, 잠드니까 긴장이 모두 해제되어 얼굴이 순하게 풀려 있었다.

평상시에도 지금처럼 경계를 풀면 좋으련만, 아직 클레어에게 그런 것까지 바라는 건 욕심인 듯했다.

이제 드디어 클레어를 저택으로 데려갈 기회가 생겼다.

꼬박 넉 달이 걸린 일이었다.

그간 알렉산더의 머릿속에 내내 클레어가 생각이 났다.

될 수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자신의 곁에 그녀를 데려오고 싶었지만, 그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을 배신한 케일럽의 잔당이 저택에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케일럽의 잔당들을 남겨둔 채로 클레어를 저택으로 데려왔다가는 그녀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또한 클레어의 존재가 알렉산더의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알렉산더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을 준 놓은 상대가 클레어였다.

만일 클레어가 인질로 잡힌다면, 알렉산더는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클레어를 데려오는 대신 배신자들을 색출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일주일 전, 그 잔당들을 소탕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더 이상 배신자가 없는 것을 확인하기까지 일주일의 시간이 더 걸렸다.

알렉산더가 예상한 것보다 너무 많은 시간이 들었다.

그럼에도 클레어는 그대로였다. 넉 달 사이에 그녀가 변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알렉산더가 팔짱을 풀고 마부석을 작게 두들겼다.

그러자 마부석과 연결된 창이 열리며 마부가 얼굴을 드러냈다.

“천천히 가지. 최대한 부드럽게.”

알렉산더가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마부를 향해 지시했다.

“예, 분부대로 합지요, 공작 각하.”

마부가 대답을 마치자 알렉산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렉산더는 마차 옆에 놓여있던 쿠션을 들어 클레어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받쳐 벽과 머리 사이에 쿠션을 넣어주었다.

마차가 흔들리고 있으니 딱딱한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뒤이어 알렉산더는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어 잠든 클레어에게 덮어주었다.

갑자기 몸에 무언가가 닿아서인지 클레어가 나직이 신음을 내뱉었다.

혹 깨어나는 건가 싶어 알렉산더가 클레어의 덮인 눈꺼풀을 응시했지만,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이 짧은 순간에도 자신이 그녀가 깨어날까 긴장했다는 것이 경이로워, 알렉산더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가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일이 생긴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클레어는 꿈에도 모를 것이었다.

알렉산더는 그녀의 고갯짓에 따라 흘러내린 머리칼을 그녀의 둥근 귓바퀴 너머로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옷이 스치는 소리가 꽤 컸을 텐데도, 클레어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