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80)

#022

“……클레어.”

아득한 정신 속으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듣기 좋은 저음이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데…….

“클레어?”

다시금 나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눈을 떴다.

흐릿하던 시야가 선명해지고 바로 앞으로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알렉스였다.

“꺅!”

갑작스러운 알렉스의 얼굴이 당황스러워 목을 움츠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왜…… 놀라지?”

알렉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내게 물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알렉스와 함께 세르갈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갑자기 눈을 떴는데 알렉스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만…….”

허둥지둥거리며 대답하자 알렉스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사실 알렉스의 얼굴이 눈앞에 있어서 놀란 것도 놀란 거였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잘생긴’ 알렉스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담겨 당황한 것도 있었다.

괜히 주변이 더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얼굴로 열이 오르는 걸 알렉스가 알아차릴까 싶어 화제를 돌리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딱히 생각나는 화제가 없었다. 그나마…….

“……저 언제부터 자고 있었던 거예요?”

분명히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밝았던 하늘이 어둠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잠깐 눈을 붙인 것 같은데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았다.

알렉스는 내 물음에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글쎄, 세 시간 정도 잔 것 같군.”

“와, 생각보다 오래 잤네요.”

마차를 타고 가느라 피곤했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게 오래 잘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터라 당황스러웠다.

“그래. 그러니까 일어나. 식사해야지.”

눈매가 날카로워서 매서운 인상을 주던 알렉스였다. 그런 그가 부드럽게 눈을 휘어 웃었다.

지금 순간만큼은 그가 언제 차가워 보였냐는 듯이 다정해 보였다.

알렉스는 웃는 얼굴과 무표정 사이의 갭이 큰 것 같았다.

“클레어?”

“네?”

내가 대답은 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알렉스가 다시금 나를 불렀다.

내가 반사적으로 대답하자 알렉스가 피식 웃었다.

“내 잘생긴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는가 보지?”

그는 자신이 잘생겼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매력적으로 웃었다.

그의 추측이 맞기는 했지만,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자존심이 상했다.

“와, 자신감이 엄청나시네요. 보통은 그런 말 창피해서 못 하지 않나요?”

내가 신기하게 바라보자 알렉스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그런 소리 많이 듣거든.”

“누구한테서요?”

“대부분의 귀족 영애들에게서.”

“아, 하긴.”

확실히 알렉스는 이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주연 중 한 명인 만큼 외모가 뛰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를 가더라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을 터였다.

수많은 귀부인과 귀족 영애들이 알렉스를 보며 설렜겠지.

몇몇은 알렉스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하기도 했을 거고.

내가 이해한다는 듯 순순히 수긍했다. 그러자 알렉스가 무언가 불만이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뿐이야?”

“네? 왜요? 제가 더 뭐 말씀드려야 했나요?”

“질투가 나진 않아?”

알렉스가 가진 불만이 바로 그거였나 보다.

“질투가 날 게 뭐가 있겠어요? 알렉스가 잘생긴 건 사실이고, 그동안 많은 귀족 영애들이 알렉스를 보면서 가슴앓이를 했을 텐데요. 딱히 그걸 듣고 질투가 나진 않는걸요?”

애초에 알렉스와 내가 특별한 사이도 아닌걸.

지금이야 알렉스를 따라서 그의 저택으로 가고는 있었지만, 사실 알렉스가 내게 사랑에 빠졌다고 말을 크게 신뢰하지는 않았다.

대체 내가 뭘 했다고 그가 내게 사랑에 빠졌다는 거야?

사랑은 원래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고는 하지만, 그게 왜 하필 나인지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알렉스는 창고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고마움을 느끼는 걸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

그러나 내 대답에 알렉스는 여전히 얼굴을 찌푸린 채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알렉스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다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았다.

“그런 면도 꽤…….”

“네?”

“아니야, 아무것도.”

뜬금없는 말을 중얼거린 게 의아해서 되물었건만, 알렉스는 고개를 저으며 내 질문에 대한 답을 회피했다.

궁금하긴 했지만, 더 캐물어봤자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아 바로 포기했다.

“식사는 나와서 하는 게 좋을 거야. 계속 그 안에만 있으면 답답하기도 할 거고. 해가 졌으니 이곳에서 하루 머물러야 할 것 같고.”

말을 마친 알렉스가 나를 향해 말했다.

“나가지.”

무심코 손을 내밀려다가 문득 내 몸을 덮고 있는 재킷을 확인했다. 분명히 잘 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거 혹시 알렉스 거예요?”

“그래.”

알렉스가 당연하다는 듯이 긍정했다.

나는 잠시 그의 재킷을 바라보다가 그에게 건네기 위해 옷을 내밀려 할 때였다.

“그냥 입고 있어. 어차피 해가 져서 바람이 차. 걸치고 있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어색하게 내밀었던 옷을 회수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던 찰나에 알렉스가 내게서 재킷을 가져가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감사합니다.”

“천만에.”

짧게 대꾸한 알렉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알렉스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자, 알렉스가 에스코트하듯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이런 대우는 처음이었다.

고작 마차에서 내려 식사하기 위해 잠시 이동하는 사이에 안내를 받은 것뿐이었지만, 상대가 귀족인 알렉스다 보니 나도 꼭 귀족 아가씨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마차에서 내리자 베르첼 공작가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루 정도 머무를 수 있도록 천막이 쳐졌고, 몇몇 사람들은 불을 피워두고 식사를 만들고 있었다.

분주히 돌아다니는 사람들 사이로 장미 기사단 역시 보였다.

장미 기사단은 먼발치에서 나를 향해 가볍게 인사했다. 나 역시도 그들을 향해 인사했다.

“이쪽으로 와. 자리를 마련했으니까.”

알렉스가 그런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알렉스를 따라 도착한 곳에는 모닥불과 간이테이블과 간이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야. 앉아.”

“네.”

알렉스가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고 보니 하녀들이 테이블에 음식을 준비해주었다.

그 모습을 확인해 보니 꼭 캠핑을 나온 기분이었다.

“이동 중이라 제대로 된 식사는 아니지만, 한술 뜨는 게 좋을 거야.”

“아니에요. 이 정도도 훌륭해요.”

“그거 다행이군.”

알렉스가 안심이라는 듯 표정을 풀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하고는 식사가 차려진 테이블을 확인했다.

드레싱을 곁들인 샐러드, 얇게 저민 베이컨과 토마토소스에 절인 콩, 계란프라이 두 개와 빵 두 조각, 그리고 양송이 수프까지.

베르첼 공작가라는 위신을 생각한다면 분명 단출한 메뉴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동 중에 준비한 것치고는 훌륭한 식사였다.

“잘 먹겠습니다.”

조심스럽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베이컨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었다. 그리고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짭짤한 베이컨의 맛에 만족감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주변에서 내 쪽으로 모여드는 시선을 확인했다.

베르첼 공작가의 사람들이 멀리 거리를 두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들 조금 놀란 눈치였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주의 깊게 살피다가 알렉스를 힐끗거렸다.

“저기요, 알렉스.”

“왜 그러지?”

빵을 뜯어 막 입에 넣던 알렉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저 때문일까요?”

혹시나 싶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보고 있으니 아무래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는 걸까?

아닌데…….

나도 메이너드 백작가에서 베로니카 아가씨를 모신 경력만 십 년이 넘었다.

어렸을 때야 아무것도 몰랐다고 쳐도 정식으로 아가씨의 하녀가 된 뒤로는 예의범절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내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혹시 알렉스의 옆자리에서 식사하는 것 때문에 그러는 걸까?

그건 좀 일리가 있었다. 베르첼 공작인 그와 하녀인 내가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것부터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알렉스가 내 말에 고개를 들어 베르첼 공작가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러자 그들은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영 찜찜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클레어 그대가 아니라 나 때문인 것 같군.”

“아, 그래요? 저 때문이 아니라니 그건 다행이네요.”

난 또 나 때문에 다들 저렇게 쳐다보나 했네.

석 달을 같이 보낼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편하게 지내려면 그들과도 사이가 좋아야 할 텐데, 저렇게 날 불편하게 보고 있으면 같이 지내기 껄끄러울 뻔했다.

“근데 왜 다들 알렉스를 보고 있는 건데요?”

“그런 게 있어.”

“…….”

대답을 회피하는 알렉스를 보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알렉스가 내게 알려줄 의무가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시금 고개를 돌려 보니 멀리서 사람들이 이쪽을 흘끔거리는 게 보였다.

“얼른 식사하지. 식겠어.”

“아, 네. 하고 있어요.”

내가 여전히 베르첼 공작가의 고용인들에게 관심을 두자 알렉스가 헛기침하며 식사를 재촉했다.

그제야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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