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
식사를 마치고 나니 금세 밤이 찾아왔다.
마차에서 잠들 때까지만 해도 낮이었는데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하녀 한 명이 내게 따뜻한 차를 내주었다. 안 그래도 손이 시렸기 때문에 감사 인사를 작게 전했다. 나는 그대로 잔을 손으로 감싸 쥐고 차를 홀짝거렸다.
“알렉스.”
그러다 문득 궁금증이 생겨 알렉스를 불렀다.
“왜 그러지?”
알렉스가 날카로운 눈초리를 휘어 웃으며 나를 보았다.
“잠은 어디서 자요?”
주변에 설치된 막사를 흘긋거리며 알렉스에게 물었다.
혹시 나도 막사 같은 데서 자나? 캠핑처럼?
조금 기대하는 마음으로 알렉스에게 물었다. 그러자 알렉스가 한쪽을 가리키듯 턱짓했다. 고개를 돌려 보자 우리가 타고 왔던 마차가 있었다.
“마차에 누울 수 있는 자리를 준비해뒀어. 거기서 자면 돼.”
“아…….”
솔직히 실망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바깥에 나왔는데, 난 당연히 막사에서 자는 줄 알았다.
물론 그렇게 자는 것보다는 사방이 막힌 마차가 더 편안하고 따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기대했던 것이 있었기에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실망한 것 같은데, 막사에서 자고 싶나?”
“네! 그래도 돼요?”
알렉스가 마음을 바꿀세라 빠르게 대답했다. 알렉스가 손을 들어 턱을 매만졌다.
“뭐, 안 될 것은 없지만, 막사에서 잘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자리가 애매하긴 하군.”
“……그럼 어쩔 수 없고요.”
아깝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알렉스는 무슨 생각인지 나를 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아니면, 내가 쉴 막사로 들어가는 건?”
“네?”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클레어 그대를 위해서라면 자리를 좀 내줄 수도 있는데.”
“됐거든요? 그냥 마차에서 잘게요.”
“그거 아쉽군.”
알렉스가 낮은 소리로 웃었다.
어쩜 웃는 소리조차도 저렇게 감미로운지. 이게 바로 주연의 혜택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새침하게 알렉스를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알렉스의 옆에 있다가는 알렉스에게 홀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모닥불 앞에 앉아 분위기가 좋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고개를 들어 나를 확인한 알렉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자려고?”
“네. 이만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럼 그렇게 해.”
아쉬워하는 알렉스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곧장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 안에는 언제 준비해 두었는지 사람 하나 누워서 잘 수 있는 간이침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그 간이침대에 누워 창문 바깥을 올려다보았다.
까만 밤하늘 사이로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이 보였다.
밤이 늦었지만, 낮잠을 많이 잤기 때문인지, 아니면 바깥에 있을 알렉스를 의식했기 때문인지 쉬이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
예상했던 대로, 잠이 오지 않았다.
아가씨를 모시고 수도로 데뷔탕트를 치르러 갔을 때는 잘만 잤었는데, 지금은 눈이 말똥말똥했다.
아무리 잠을 청하려 노력해 봐도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질 뿐이었다.
한참이나 간이침대 위에서 뒤척거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잠도 안 오는데 계속 누워있으니 괜히 기분만 축축 처지는 느낌이었다.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은데 마땅히 생각나는 것도 없어서 조심스럽게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눅눅하고 차가운 새벽의 공기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에 깊게 차올랐다.
새벽 내음은 흙냄새와 수풀 냄새가 섞여 청량했다.
나는 가벼운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초를 서는 소수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의 인영이 보이지 않았다.
알렉스도, 장미 기사단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다들 자러 간 모양이었다.
하긴, 밤이 늦었으니 깨어 있는 게 이상하기는 했다.
나처럼 낮에 잠을 많이 잤거나 보초를 서야 하는 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은 잘 시간이니까.
쉽게 수긍하고 돌아보니 아까 내가 앉아 있던 자리가 그대로 있는 것이 보였다.
밤중에 들판에서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기도 하고, 괜히 길이라도 잃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게 될 것 같아서, 그냥 간이의자에 앉았다.
여기 계속 앉아있다가 잠이 올 것 같으면 다시 마차로 돌아가 잘 생각이었다.
“불, 다시 붙여드릴까요?”
보초를 서던 사람이 내게 다가와 모닥불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밖에 오래 있을 건 아니라 괜찮아요. 달도 밝고요.”
“그래도 추울 겁니다.”
우려스러워하며 말하니 나도 딱히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확실히 초겨울인데다 해가 지고 나니 공기가 차가웠다.
불을 지피면 그래도 추위를 이겨낼 수는 있을 터였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내가 어색하게 말하자 경비병이 빙긋 웃으며 다시 멀어졌다. 곧 그가 횃불을 가져와 장작 위에 불을 지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병사가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자리를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이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새롭게 피어나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타닥거리는 장작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듣기 좋았다. 절로 심신이 안정되는 소리였다.
나는 조용히 소리에 잠겨 내 상황을 천천히 되짚어보았다.
여러모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알렉스가 베로니카 아가씨 대신에 내게 사랑에 빠졌다.
원작의 알렉스가 베로니카 아가씨에게 구애하게 된 시점은 빗속에서 죽어가던 알렉스를 구하고 1년이 지난 후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지?
그때로부터 몇 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알렉스가 나를 데리러 왔다.
시기상으로도 맞지 않았고, 상대도 맞지 않았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게 진실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차치하더라도 이 일이 내게 알려주는 바는 명확했다.
이대로 간다면 메이너드 백작가가 무사하리라는 것.
내가 원작의 베로니카 아가씨처럼 행동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사실상 최악의 일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내가 원작과는 달리, 아가씨와 반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말일 텐데…….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알렉스의 사랑은 베로니카 아가씨에게 있어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원작 속의 아가씨는 알렉스의 구애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알렉스가 베로니카 아가씨를 얻기 위해 아가씨의 주변을 망가트렸다.
비뚤어진 소유욕에 불탄 알렉스는 날이 갈수록 베로니카 아가씨를 옭아맸고, 그 과정에서 메이너드 백작가를 괴멸시켰다.
……그럼 난 뭘 해야 하지?
알렉스의 구애를 받아들이고 연애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
아니, 적어도 석 달간 알렉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비위를 적당히 맞추는 거라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비위를 맞춘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서류를 남겨놨다고 하더라도 서류를 마냥 믿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원작의 알렉스는 여자를 손에 넣기 위해 메이너드 백작가를 괴멸시킨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과연 내가 계약서를 작성하고 남겨놨다고 해서 그 계약서의 내용을 순순히 따를 사람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에게 제안했던 딱 석 달, 그사이에 알렉스의 비위를 맞추면서 동시에 그의 마음에서 멀어져야만 했다.
과연…… 할 수 있을까?
내가 소설에 나오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베로니카 아가씨처럼 누구나 한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운 것도 아니었다.
나도 나름 내가 예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아가씨에 비할 바는 아니지…….
그래서 더 의문이었다. 알렉스가 내 어떤 점을 보고 내게 사랑에 빠졌다는 건지.
아가씨의 역할을 대신한 것만으로 과연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게 맞는지.
원인을 모르니 알렉스의 마음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실패할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몹시 우울해졌다.
석 달이라는 시간 제약을 걸었음에도 오히려 자신만만하던 알렉스의 모습을 떠올리니 더더욱 자신이 없어졌다.
어떻게 해야 알렉스가 내게서 정이 떨어질 수 있을까?
“안 자고 여기서 뭐 하는 거지?”
한참 생각에 빠져있던 내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확인했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더니 역시나 알렉스의 목소리였다.
알렉스는 어디서 들고 왔는지 담요를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러고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내 옆에 앉았다.
그가 나를 보는 눈빛이 나른했다. 자다 깬 건가?
“밤이 깊었는데 무슨 생각을 하기에 여기 이러고 있는 거지? 걱정이 있다면 내게 말해봐. 해결해 줄 테니까.”
부드럽게 재촉하는 알렉스의 말에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어깨를 감싼 담요를 여미며 말문을 열었다.
“석 달 동안 베르첼 공작 저에 가게 되었는데 뭐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요.”
목소리에 절로 근심이 담겼다.
자세한 이야기를 그에게 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내 고민의 주요 골자였기에 간략하게 그에게 말했다.
내 말에 의아함을 느낀 알렉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설마하니 가서 일이라도 할 생각은 아니겠지?”
“에, 설마요. 안 시키실 거잖아요. 안 시키는데 제가 일을 왜 하겠어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는데 알렉스가 대답이 없었다.
“혹시 시키실 생각이었어요?”
“글쎄.”
알렉스가 애매하게 말을 끊었다.
“……아니죠?”
내가 주저하며 묻자 알렉스가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저러니까 정말 일이라도 시킬까 봐 불안했다. 설마 아니지?
하지만 알렉스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히 아니지.”
알렉스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을 확인하고 난 후에야 나는 그를 따라 어색하게 웃었다.
놀리는 걸 뻔히 알면서도 철렁하는 내가 야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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