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80)

#029

정리가 다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 알렉스가 마차로 복귀했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분주한 소리가 들리더니 뒤늦게 마부가 마부석과 연결된 창을 열었다.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그래.”

알렉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창문을 통해 바뀌는 전경을 구경했다.

“지루해도 조금만 참아. 여기서 반나절도 안 되는 거리에 마을이 있으니까.”

“거기서 머무를 건가요?”

“그래. 원래는 지난 밤에 거기서 머물러야 했어.”

“아, 하긴 그랬겠네요.”

당연한 얘기였지만, 베로니카 아가씨와 함께 세르갈로 향할 때 들렀던 루트와 일치하는 모양이었다.

“출발은 내일이 될 거야. 마을을 그냥 지나치면 또 야영을 해야 할 테니까.”

“전 야영도 괜찮은 것 같은데요.”

혹시나 싶은 마음에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알렉스는 날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걸 원하나?”

그렇다고 대답하려다가 멈추었다.

나야 아무것도 안 하고 즐기기만 하는 입장이라 또다시 야영하게 된다면 즐겁겠지만, 이는 나만 즐거운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런 거, 저런 거 모두 준비하려면 윗사람들이 아니라 아랫사람들이 힘들어지겠지.

아마도 막사를 설치하고 제거하는 일이나, 그 외 자잘한 모든 것들을 처리하기 위해 많은 노동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게 얼마나 번거롭고 귀찮은 일인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어쨌든 메이너드 백작가의 고용인이었으니까. 그렇다고 고용주인 백작님이 싫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힘들었을 뿐이지.

거기까지 생각을 마치고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괜히 편하게 갈 수 있는 방향이 있는데 나 좋자고 모두를 고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 사람들 모두 모르는 사람들이니 더더욱 불편했다.

“아니에요. 제가 헛소리했어요.”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알렉스가 한쪽 눈썹을 기울였다.

“왜 갑자기 포기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신 도착하는 마을에서 실컷 즐기는 것은 어떻겠어?”

“마을에서요?”

“그래. 크지는 않지만 상업이 발달한 곳이라 시장 구경하는 맛도 있을 거고.”

알렉스의 말에 혹했다. 다음에 있는 마을은 메이너드 백작령 중에서도 바이퍼라는 마을이었다.

메이너드 백작령과 수도인 세르갈을 잇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상인들의 왕래가 활발했다.

그런 곳에 상업이 발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돼요? 하지만 저 나올 때 돈 안 챙겼는데요.”

알렉스를 향해 빈손을 보여주었다.

사실 출발할 때 모아둔 돈 좀 챙겨왔지만, 그건 정말 비상금이었다. 언제 또 어떻게 돈이 필요하게 될지 모르니까!

게다가 하녀의 월급이라는 게 그렇게 넉넉하지만은 않은 터라 사치를 부릴 수는 없었다.

“그대에게 돈을 내라고 하지 않을 거야. 말하지 않았나? 그대는 손님이야. 모든 건 내가 지불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요?”

그가 거짓말을 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확답을 듣고 싶었다.

알렉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난 한 입으로 두말은 하지 않아. 믿어도 좋아. 정 못 믿겠다면 계약서라도 작성해 줄 수 있어.”

“앗, 아니에요. 그런 걸로 뭐, 계약서까지…….”

내가 손사래 치며 사양하자 알렉스가 흥미로워하며 팔짱을 꼈다.

“만일 내가 말은 이렇게 하고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러지?”

“그럼 눈으로만 즐기면 되죠, 뭐.”

“눈으로만?”

“네, 눈으로만요. 그냥 구경만 하는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오늘 하루는 충분히 지나갈걸요?”

“하지만 구매하지 않는데 어떻게 재미있을 수가 있지?”

알렉스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제야 나는 알렉스가 갖고 싶은 모든 것을 가지고 마는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나 같은 소시민들과 달리 알렉스는 무엇이든 구할 수 있으니…….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꼭 사야 하나요? 사면 좋기야 하겠지만 이것저것 눈으로 보면서 즐기기도 하는 거죠.”

“……그렇군.”

여전히 이해 못 하는 눈치였지만, 알렉스는 일단 내 말에 수긍했다.

그를 보며 소리 죽여 웃었다.

“빨리 도착하면 좋겠네요.”

“속도를 높이는 게 좋겠어?”

지나가는 소리로 꺼낸 말에 알렉스가 반응했다.

“아니, 뭐,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요.”

***

우리가 바이퍼에 도착한 건 10시쯤이었다.

내가 어제 마차에서 잠드느라 지체한 세 시간의 거리가 이만큼 차이가 났던 모양이었다.

바이퍼에 들어선 베르첼 공작의 행렬은 광장을 지나 듀나인 태번에 도착했다.

호텔이 있다면 거기 머무르는 게 제일 좋겠지만, 바이퍼에는 호텔이 없었다.

대신 바이퍼에서 가장 큰 숙소로 듀나인 태번이 있었다.

1층과 2층에는 식당과 주점을 운영하고, 3층부터 6층까지 여관을 겸하는 곳이었다.

지난번에 베로니카 아가씨와 함께 이곳을 지나갈 때도 이 태번에 묵었던 기억이 있었다.

마차가 태번 앞에 멈추어 섰다.

알렉스가 먼저 밖으로 내리고 그가 내 손을 잡아주었다.

바닥에 두 발을 딛고 서서 듀나인 태번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바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미리 베르첼 공작가의 사람들이 도착하여 예약을 해 둔 덕인지, 오래 걸릴 것 없이 바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1층 식당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

우리가 머무를 곳은 6층이었다.

하필이면 층계도 높은 탓에 오르느라 폐가 찢어질 것 같았다.

목적지인 6층까지 올라왔을 때는 더 이상 걷기 힘들어서 잠시 멈추어, 선 채로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많이 힘드나?”

알렉스는 옆구리를 잡고 상체를 숙인 채 숨을 몰아쉬는 내게 물었다.

“아뇨, 하나도…… 안 괜찮아요…….”

이래서 태번보다는 호텔이 좋았다.

호텔에는 보편적으로 마법석을 이용한 승강기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나마 아가씨랑 왔을 때는 4층이었기에 이렇게 힘들지 않았는데…….

한참 숨을 고르고 난 후에야 좀 살 것 같아 뒤늦게 상체를 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됐나?”

알렉스가 나를 염려하며 물었다.

졸지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다는 생각에 얼굴을 붉혔다.

“네, 괜찮아요.”

얼른 대답하고 자세를 똑바로 하자 직원이 계속해서 안내해주기 시작했다.

“이곳이 아가씨께서 머무르실 곳입니다.”

직원은 내가 귀족 가문의 영애라고 생각했는지 정중한 태도로 내게 말했다.

슬쩍 안을 보니 응접실처럼 생긴 거실이 보였다. 아마도 안쪽으로 들어가야지 침실이 나오는 구조인 것 같았다.

“열쇠는 제게 주세요.”

아비나가 직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나를 보좌할 것이라 했으니 앞으로 그녀와 떨어질 일은 특별한 경우 빼고 없을 터다.

“그리고 공작 각하께서 사용하실 방은 바로 옆입니다.”

직원이 알렉스가 머무를 방의 문을 열어주었다.

이번에 내가 배정받은 방과 다를 바 없는 구조의 방이었다.

알렉스는 직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이곳으로 와.”

“하룻밤 머무는 건데 무슨 일이 있으려고요?”

“글쎄. 뭐든.”

의뭉스럽게 대꾸하는 알렉스를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런 일이 있을 것 같지 않네요.”

알렉스는 그런 대답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피식거렸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그래.”

알렉스의 말을 듣고 바로 내 방으로 향했다.

아가씨가 사용한 방도 이와 같은 구조였기에 새삼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마차를 타고 반나절 달려온 피로를 좀 풀고 싶었다.

거실을 지나 곧바로 침실에 도착한 나는 그대로 침대에 몸을 실었다.

몸을 부드럽게 받쳐주는 침대의 감촉이 좋았다.

마차에 마련된 간이침대도 제법 푹신한 편이기는 했지만, 지금 이곳처럼 편안하지는 않았다.

마음껏 쉴 수 있는 도착하니 피로가 절로 풀리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눈이 사르르 감기고 있었다.

“아가씨, 아비나입니다.”

아비나의 목소리가 침실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뒤늦게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들어가도 될까요?”

“네, 들어오세요.”

허락을 내리자 곧 조용히 문이 열렸다. 아침에 보았던 아비나가 변함없는 모습으로 침실로 들어왔다.

“불편한 점은 없으신가요? 혹 불편하신 부분이 있다면 객실 변경을 해보겠습니다.”

“아니에요. 불편한 거 없어요.”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아비나가 나를 보았다.

“아가씨, 제게는 말을 편히 놓으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전 지금도 충분히 편하거든요. 이대로 말하게 해주세요.”

내가 빙긋 웃자 아비나 역시 미소를 띠었다.

“다름이 아니라 침대와 거실 협탁에 놓인 설렁줄을 흔들면 제가 찾아올 겁니다. 그러니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저를 찾으시면 됩니다.”

“네, 알았어요.”

“그럼 편히 쉬세요.”

아비나가 정중히 인사하고 침실을 떠났다.

나는 그때까지 뻘쭘하게 앉아있다가 그녀가 완전히 나갔을 때가 되어서야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사실 아비나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해야 할 일인데 그녀에게 보살핌을 받고 있으니 영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뭐, 석 달 동안 잠시 이런 대우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냥 석 달 동안 베로니카 아가씨처럼 귀족 영애가 된 기분을 좀 누려도 되지 않을까?

대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하겠지만.

생각을 마치고 푹신한 이불 사이에 몸을 굴렀다.

달큰하고 포근한 향기가 났다. 그것만으로도 금세 몸이 노곤해졌다.

아직 점심 식사하기까지 시간이 좀 남아있는 상태였고, 다른 사람들도 이것저것 하느라 바쁠 테니 지금은 괜히 나가서 그들을 신경 쓰이게 할 필요 없었다.

대신 잠시만이라도 눈을 붙이는 게 좋을 것 같아 무거운 눈꺼풀을 그대로 감아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