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가씨. 아가씨.”
어디선가 아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자 낯선 방의 전경이 내 시야에 담겼다.
여기가 어디더라?
눈을 몇 번 깜빡인 후에야 뒤늦게 내가 어디에 있고, 또 어디를 향하던 중이었는지 깨달았다.
“일어났어요.”
뻑뻑한 눈을 손으로 매만지며 상체를 일으켰다.
잠깐 잔다는 게 푹 잔 모양이었다.
대신 마차를 타면서 축적되었던 피로가 싹 가신 느낌이었다.
“몇 시예요?”
“11시 반입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네. 주인님께서 밖에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비나의 말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절 기다린다고요?”
“네.”
아비나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한 적 없는 거 같은데요.”
“어머, 그러신가요? 제가 듣기로는 시장에 같이 가기로 하셨다던데요.”
“시장? 아!”
뒤늦게 생각이 났다.
마차에서 오늘 하루 바이퍼에 머무르면서 쇼핑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말만 그렇게 했다 뿐이지 실제로 몇 시부터 나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바로 떠올릴 수가 없었다.
“금방 나갈게요.”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일단 잠깐 파우더룸으로 가시는 건 어떠실지요?”
아비나의 말에 내 상태를 짧게 점검했다.
넋을 놓고 자느라 내 상태를 간과하고 있었다.
한참 침대에서 뒹군 탓에 구겨진 옷에 헝클어진 머리까지.
이 상태 그대로 나갔다가는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었다.
“일단 파우더룸으로 향하시는 게 좋겠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매무새를 살피는 내가 안쓰러웠나 보다. 아비나가 상냥하게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녀를 따라 도착한 파우더룸에는 전면에 커다란 거울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거울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저 이러고 나갈 뻔했네요.”
당황스러운 마음에 아비나에게 말했다.
“조금만 손보면 될 거예요.”
아비나는 익숙하게 빗을 들어, 내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마차에 탈 때는 하나로 묶어놓았는데 지금은 그녀의 손을 따라 아래로 찰랑거렸다.
굽이친 갈색 머리칼은, 빗이 지나갈 때마다 결이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았다.
아비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고 익숙한 절차대로 내 옷차림을 정돈해주었다.
“이제 되셨어요.”
“고마워요, 아비나. 아비나는 실력이 정말 뛰어나네요. 저는 사실 이런 재주는 없는 편이라 이런 쪽으로 손질 잘하시는 거 정말 부러워요.”
파우더룸을 나서며 아비나를 칭찬했다.
나였으면 대충 빗다가 뒷머리는 제대로 정돈하지 못하고 나왔을 텐데.
침실과 거실을 지나쳐 문을 열고 나오자 마침내 알렉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입술을 꾹 닫은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그의 옆에 다가섰다.
4층에서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얀 건물에 붉은 지붕들이 이어지고 있었고, 허전한 부분을 나무를 위시한 식물들이 채우고 있었다.
뒤이어 건물 지붕과 대비되는 선명한 초겨울의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와, 풍경이 이렇게 좋은 줄 알았으면 베로니카 아가씨와 함께 왔을 때 6층으로 예약할 걸 그랬어요.”
내가 감탄을 터트리자 알렉스가 내게 시선을 주었다.
“왜 4층으로 했지? 당연히 6층이 더 소음이 없고 좋을 텐데.”
“에이, 보셨잖아요. 제가 계단 올라가면서 헉헉거린 거. 차마 거기까진 올라가기 힘들 것 같아서 4층으로 잡은 거였어요.”
“저런. 그런 줄 알았으면 우리도 예약할 때 4층으로 할 걸 그랬군.”
“아니에요. 어차피 방을 잡은 거 어떻게 하겠어요? 그리고 전 지금도 만족해요. 어차피 여기 계속 오르락내리락하지는 않을 거잖아요.”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하자 알렉스가 흡족해하며 웃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부르신 거예요? 조금 더 늦게 나가도 되었을 텐데요.”
아직 12시가 되기도 전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일찍 부른 건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일찍 가서 일찍 돌아올 생각인가?
“아직 점심 전이니까 나가서 외식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어.”
“외식이요?”
“왜, 싫은가?”
“아니요! 좋아요!”
바이퍼에서 여유롭게 돌아다닐 시간을 얻었으니, 맛있는 걸 찾아서 먹어보는 것도 꽤 즐거울 것 같았다.
“얼른 가요!”
급한 마음에 알렉스를 재촉했다.
알렉스는 못 이기는 척 나를 따라 계단을 내려왔다.
올라올 때는 그렇게 힘들더니 내려가는 건 한순간이었다.
단숨에 1층에 도착하고 보니 장미 기사단 다섯 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클레어 양.”
오전에 나와 대화를 나누었던 크루거 경이 알은체하며 나를 향해 꾸벅 인사하더니 근처로 다가왔다.
“오늘 공작님과 클레어 양을 보필할 겁니다.”
“아, 크루거 경도 같이 가시는군요!”
반가움에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러자 페이비 경이 입술을 비죽이며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희도 가는걸요? 단장님만 반겨주시지 말고 저희도 반겨주세요.”
십 대 중반의 미소년이 내게 서운한 티를 내고 있으니 왠지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그럼요. 당연히 환영이죠. 원래 외출은 다 같이 가야 재미있잖아요.”
내 말을 듣고 난 후에야 페이비 경의 인상이 펴졌다.
그는 나를 향해 다시금 입을 열려다가 눈을 들어 알렉스를 확인하고는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크루거 경의 뒤에 섰다.
크루거 경은 익숙하다는 듯 난처한 미소를 지은 뒤 알렉스를 확인했다.
“먼저 가시면 바로 뒤따라가겠습니다.”
“그렇게 해.”
알렉스가 허락을 내리고는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클레어.”
정중하게 내민 손이 아직도 어색했다.
보통은 당사자가 아니라 제삼자로서 지켜보는 게 다였는데…….
주저하며 알렉스의 손에 내 손을 포갰다.
“그럼 가 보실까요, 레이디?”
“레이디요? 아, 네!”
좀처럼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태번을 나서자 생기가 가득한 길거리가 우리를 반겼다.
“점심은 어디서 먹을 거예요?”
“글쎄. 일단 알아본 바로는 근처 레스토랑이 유명하다더군.”
“아예 식당에서 끼니를 채우고 가려는 거군요.”
“왜? 안 되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고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알렉스는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눈썹을 기울였다.
“식당에서 제대로 식사를 마친 후에 시장을 돌아다니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그러면 뭔가 좀 아쉽잖아요.”
“그럼 어떤 방법이 있지?”
“이건 괜찮으실지 좀 걱정이 되긴 하는데요.”
“괜찮으니까 얘기해 봐. 그대가 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으니.”
알렉스가 대답을 재촉했다.
“시장에서 간단한 길거리 간식들을 사서 끼니 대신 먹는 건 어때요? 구경하면서 먹으면 더 맛있을걸요?”
가끔 휴가와 야시장 서는 날이 겹치면 식사를 거르고 시장에서 파는 음식을 산 뒤 구경하면서 먹고는 했다.
그건 전생에서도 비슷했기 때문에 딱히 이런 것에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귀족인 알렉스나 장미 기사단에게는 어떨지 모르는 일이었다.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을 불결하게 여기며 거부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기왕이면 내 의견이 받아들여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내 바람과는 달리 알렉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길거리 간식이라면…….”
“뭐, 그때그때 다르죠. 바이퍼 시장은 처음이라 저도 뭐가 있는지 몰라요.”
“그럼 검증되지도 않은 곳에서 처음 보는 음식을 먹는다는 건가?”
“네.”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알렉스는 고민에 빠진 듯했다.
내가 하겠다는 건 뭐든 들어주겠다고 했으니 차마 거절하기도 어려울 터였다.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 건데 싫으시면 제대로 말씀해 주세요. 괜히 싫은데 억지로 드셨다가 탈이라도 나면 더 큰 일이거든요.”
내 말에 알렉스가 더 깊은 고민에 빠진 듯했다. 자리에 서서 턱을 매만지는 모습이 조금은 귀엽게도 느껴졌다.
아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감상이야?
귀여워? 알렉스가?
그는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컸다. 게다가 오랜 시간 검을 수련한 탓에 덩치도 나보다 훨씬 거대했다.
그런 그가 귀엽게 느껴진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외출에 들떠서 잠시 헛생각을 했나 보다.
“……어? 클레어?”
“네? 부르셨어요?”
상념을 비집고 들어온 알렉스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알렉스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확인했다.
“혹시라도 몸이 안 좋으면 말해.”
“아니에요. 저 멀쩡해요. 잠깐 딴생각한 거예요.”
차마 알렉스가 귀엽게 느껴져서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어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렸다.
알렉스는 내가 미덥지 않았는지 한참 나를 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이 있다면 언제든 나한테 얘기해. 알겠어, 클레어?”
“네, 그렇게 할게요. 근데 왜 부르신 거예요? 결정하셨어요?”
“그래. 그대 말대로 한번 해 보도록 하지.”
거절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알렉스는 긍정을 말했다.
“정말이에요? 후회하지 않으세요? 길거리에 내놓고 파는 음식인데도요?”
“그렇대도.”
“그럼 기사분들도요?”
알렉스의 대답으로는 모자라서 함께 외출하기로 한 장미 기사단을 확인했다.
“전 상관없습니다.”
“전 좋아요! 저도 한번 해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걸어 다니면서 먹는 거.”
“주군의 뜻이라면.”
“나에겐 익숙한 일이지. 걱정 마십시오, 클레어 양.”
“클레어 양이 제안한 일이니 괜찮겠죠.”
알렉스와 페이비 경, 카인 경, 그리고 자일 경과 테넌트 경이 순서대로 대답했다.
“그럼 다들 괜찮다고 하신 거예요. 전 책임 안 져요.”
만약을 대비해 보험을 걸어두듯이 말했다. 다행히도 그들에게서 불만이 터져 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그럼 갈까요?”
“그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