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하인과 하녀까지 동행하다 보니 내 생각보다 인원이 많아졌다.
출발하기 전에 인원을 최소한으로 줄였음에도 열 명이 넘어가게 되었다.
그래도 알렉스와 단둘이 있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알렉스와 단둘만 있으면 아무래도 계속 알렉스의 말솜씨에 휩쓸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차라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게 더 나았다.
막 태번을 나와 발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그러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알렉스.”
“왜 그러지?”
“시장은 어디일까요?”
바이퍼가 메이너드 백작령에 속해 있기는 했지만, 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메이너드 백작령의 중심지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바이퍼까지 나왔음에도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모르나?”
예상외라는 듯이 알렉스가 내게 되물었다.
“네. 보통 바이퍼에 왔을 때는 태번 바깥으로 나가 본 일이 없어서요. 아시다시피 제가 베로니카 아가씨를 모시는 몸이고, 아가씨께서 바이퍼까지 와서 시장에 갈 일은 없으니까요.”
“그것도 그렇군. 난 너무 당당히 걷기에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머쓱한 기분에 괜히 주위만 둘러보았다.
그러자 알렉스 쪽에서 피식하고 바람 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이쪽으로 와. 내가 안내하지.”
“알렉스는 길 알아요?”
“이래 봬도 상단을 운영하면서 이곳저곳 많이 다녀본 편이야. 바이퍼에 자주 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시장이 있는 곳 정도는 알아.”
“오, 그거 다행이네요. 그럼 빨리 가요.”
일단 밖으로 나오는 것까지는 내가 이끌었지만, 길은 알렉스를 따라가기로 했다.
알렉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시끌벅적한 시장 입구였다.
“와, 정말 도착했네요.”
“당연하지. 설마 안 믿은 건 아니겠지?”
“설마요. 자, 이제 안으로 들어가요!”
예상했던 것보다 시장에는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사람 사는 생기가 느껴져서 보기 좋았다.
몇 걸음 가지 않아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안 그래도 점심 먹을 시간인지라 출출한 참이었는데 마침 잘되었다.
“알렉스, 이쪽으로 가 봐요. 저기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 거 같아요.”
“기꺼이.”
달큼하고 고소한 냄새가 가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장 한쪽에 파이를 파는 노점상이 있었다.
“저거 먹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야 배고프기도 하니 먹어도 상관없었지만, 알렉스나 장미 기사단은 또 다를 수도 있었다.
일단 본격적으로 시장을 둘러보기 전에 점심을 길거리에서 사 먹기로 했지만, 음식이나 위생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대가 원하면 나도 좋아.”
알렉스가 곧바로 대답했다.
거북스럽게 여기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다른 분들은요?”
고개를 돌려 장미 기사단을 보았다.
“공작님께서 괜찮으시다 하니 저도 괜찮습니다.”
“저도 좋아요.”
“상관없습니다.”
“하하, 저야 뭐든 괜찮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미 기사단 역시 이견은 없었다.
“그럼 제가 가서 사 오겠습니다.”
모두가 동의하자 아비나가 말했다.
“저도 같이 가요.”
그녀에게 말했지만, 그녀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가씨께서는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 클레어.”
내가 재차 말하려는 찰나에 알렉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려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내 손님이라는 내 말을 자꾸 잊는 것 같군.”
“그래도요. 이 정도는 같이 할 수 있는 거니까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그래도 전 정말 괜찮으니 여기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결국 아비나가 파이를 사기 위해 가판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괜히 일을 시킨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신경 쓰여?”
“아무래도 그렇죠. 제가 먹자고 했는데 다른 사람한테 일을 시킨 게 되었잖아요.”
멋쩍어하며 웃자 알렉스가 나를 다정히 내려다보았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자주 있을 텐데 익숙해져 보는 건 어때?”
알렉스가 넌지시 제안했다.
그 말처럼 앞으로 이런 일이 자주 있을 터였다. 적어도 내가 베르첼 공작가에 있을 석 달 동안은.
어차피 베르첼 공작가로 올 때도 석 달 동안 휴식이나 취해 보자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노력해 볼게요.”
노력까지 할 만한 일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적어도 알렉스와 있는 순간만큼은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 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알렉스의 곁에서 아비나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 않아 아비나가 파이를 잔뜩 사든 채로 돌아왔다.
그녀에게서 파이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 물었다.
파이 안에는 절인 소고기가 듬뿍 들어가 있었다.
짭짜름한 소스가 적절히 빵에 배어들어 속이 촉촉했다.
“맛있네요!”
내가 고르고도 혹시 맛이 별로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맛있었다.
감탄을 터트리며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괜찮군. 길에서 파는 건데도 제법이야.”
알렉스도 작게 감탄했다.
“그렇죠? 원래 이런 시장에서 파는 음식이 별미라니까요?”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에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서 먹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걸어 다니면서 먹는 것도 묘해.”
귀족들에게 있어서 식사는 앉아서 하는 것이었다.
설령 무도회에서 간식을 먹는다 하더라도 이동하면서 먹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는 그게 교양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원래 그렇게 먹는 거니까요. 시간도 절약되고 얼마나 좋은데요.”
알렉스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시장 안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메이너드에서 즐겼던 야시장에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이곳 바이퍼 시장 역시 볼 만한 게 제법 많았다.
거리에 자신이 만든 장식품이나 액세서리를 늘어놓고 파는 이들도 제법 있었고, 식사가 될 만한 간식을 파는 노점상도 많았다.
그때 멀리 사람들이 모여있는 게 보였다.
“저긴 뭐 하는 곳이기에 사람들이 모여 있을까요?”
“글쎄. 궁금하면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럼 가 봐요.”
나는 자연스레 알렉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도 곧 나와 보폭을 맞추며 따라왔다.
“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후에 보인 건 화려한 마술쇼였다.
눈앞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비둘기를 보고 모두가 탄성을 터트렸다.
“이거 좀 구경해도 돼요?”
“당연하지. 그대가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해도 돼.”
“고마워요.”
알렉스에게 짧은 인사를 남긴 후 묘기를 구경했다.
마술사는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기도 했고, 카드를 찢어버린 후 다시 똑같은 카드를 꺼내 보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엉뚱한 곳에서 나타나는 마술을 선보인 마법사가 관객을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나도 그들처럼 눈을 즐겁게 해준 마술사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마술사는 인사를 마친 후 관객들이 떠나기 전에 모자를 들어,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돈을 수거했다.
혹시 몰라 챙겨 왔던 비상금 2 쿠퍼를 지불했다. 즐거움을 준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알렉스도 금화를 꺼내 마술사에게 건넸다. 뜻밖의 큰 금액을 받게 된 마술사가 알렉스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역시 돈은 많고 볼 일이었다.
나도 돈만 많으면 턱턱 비용 지불할 텐데.
“왜 그러지? 혹시 또 내게 반했나?”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말에 난감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거 아쉽군.”
알렉스는 조금도 아쉽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자리를 옮겼다.
“그대는 이런 걸 좋아하는 것 같군.”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재미있잖아요. 신기하기도 하고. 알렉스는 별로였어요?”
“아니, 꽤 재주가 좋더군. 그리고 그대가 좋았다니 나도 좋아. 원한다면 후일 이런 쪽으로 유명한 이를 불러 보도록 하지.”
“정말이요?”
기대를 품고 그를 바라보자 알렉스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기대할게요.”
빈말이라고 해도 생각해서 해준 말이었으니 기분은 좋았다.
시장 안쪽으로 들어가니 음식을 파는 가판대들이 잔뜩이었다.
“이 안쪽으로는 크게 볼 건 없는 거 같아요.”
“그런 것 같군. 아무래도 축제나 야시장처럼 특별한 날이 아닌 이상, 즐길 만한 게 크게 없는 것 같군.”
아쉬워하며 말하자 알렉스가 동의했다.
그래도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시간이 제법 흘렀기 때문에 슬슬 돌아가서 쉬어도 될 것 같았다.
아쉬움을 머금고 걸음을 돌렸다. 시장으로 왔던 길을 거슬러 한참을 걸으니 태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태번 분위기가 조금 묘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베르첼 공작가 사람들이 알렉스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무슨 일이지?
나갈 때와는 다른 분위기에 의아해하는 찰나, 익숙한 사람과 마주칠 수 있었다.
옅은 밀색의 머리칼과 어두운 갈색 눈동자. 바짝 마른 체형에 멀대 같은 모습.
“데릭?”
내 소꿉친구인 데릭이었다.
하지만 데릭이 내 앞에 있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나와 같이 메이너드 백작가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역시도 사적으로 바이퍼에 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놀라서 묻자 데릭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나 때문이야.”
데릭이 대답하기도 전에 계단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그리운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내 시선이 닿는 곳에 사랑스러운 분홍색 머리칼의 귀공녀가 있었다.
“베로니카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