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80)

#034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소파에 앉으니 베로니카 아가씨가 단도직입적으로 내게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베로니카 아가씨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알렉스가 내게 정떨어지도록 만들려 한다는 계획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베로니카 아가씨는 이미 메이너드 백작령에 있을 때부터 대략적인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내가 어떻게 하려는 건지는 알지 못했다.

“베르첼 공작님께서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내는 게 먼저겠구나.”

“그렇겠죠?”

“응. 그리고 그에 따라서 어떻게 할지를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베로니카 아가씨가 내게 조언했다.

맞는 말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걸 알아내기까지는 나도 어떻게 도움을 줄 수가 없을 것 같아.”

“일단은 지내면서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겉으로는 절 좋아한다고 하시지만, 진짜일지 아닐지는 확신이 안 서기도 하고요.”

“응. 그리고 하나 기억해 둬야 할 게 있어.”

베로니카 아가씨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간과하고 있는 게 있었나 싶은 마음에 절로 아가씨의 말에 집중했다.

“그게 어떤 거예요?”

“바로 네 마음이야.”

“…….”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말이었다.

베로니카 아가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만약 베르첼 공작님이 널 좋아하는 게 맞다면, 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가 제일 중요해.”

“제 마음이 정말 중요할까요?”

“당연하지. 네가 싫으면 싫은 거고, 좋으면 좋은 거야. 하지만 그 마음이 강요나 희생으로 인한 것이면 안 돼. 이번처럼.”

베로니카 아가씨는 말을 잠시 멈추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가씨의 눈가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꼭 눈물을 참아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내가 온 거야. 클레어, 내게는 네 속마음을 털어놓아도 돼. 언제나 내가 네 편이 되어줄 테니까.”

베로니카 아가씨는 정말 상냥했다.

만에 하나 내가 메이너드 백작가를 지키기 위해 잘못된 선택을 할까 걱정되어, 직접 알렉스를 찾아와 내 곁에 있겠다고 할 정도로.

“네, 꼭 말씀드릴게요.”

“응. 그건 그렇고 확실히 베르첼 공작가는 뭔가 다르긴 다른가 봐. 우리 저택도 제법 호화롭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여기 들어와 보니까 그 반도 못 미치는 거 같더라고.”

베로니카 아가씨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머무는 방도 그렇지만 여기도 대단한걸?”

“그렇죠? 저택 구경만 해도 시간 다 채울 것 같더라니까요?”

“그치?”

베로니카 아가씨와 대화하며 소리 죽여 웃었다.

역시 아가씨와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덕분인지 통하는 게 있었다.

“게다가 적응도 힘들어요.”

“적응? 어떤 점에서?”

베로니카 아가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가씨의 모습은 흡사 다람쥐를 연상시켰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아가씨의 물음에 대답했다.

“여기서 해주는 모든 것들이요. 가령 수발을 들어준다거나 하는 것들. 원래 다 제가 하는 것들이었는데 정작 받으려니 이상하고 어색해서요.”

“편하게 즐기는 것도 어렵니?”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 쉽지가 않더라고요. 그리고 이런 옷을 걸쳐도 뭐, 몸은 익숙하지 않으니 꼭 남의 옷을 입은 것 같은 느낌이에요. 아가씨처럼 우아한 귀족 영애면 또 몰라. 전 아무래도 안 어울리는 거 같아요.”

내가 말을 끝냈음에도 베로니카 아가씨는 답이 없었다.

마치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아가씨?”

의아함에 아가씨를 부르자 아가씨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건 어때? 여기 있는 동안 내게서 예법을 배우는 거야. 익숙해지는 법도 배우고.”

“네?”

“그럼 좀 편해지지 않을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요? 어차피 석 달 후면 돌아갈 텐데요.”

“그래도. 지내는 그 시간이 불편하기만 하면 큰일이잖아. 여기에서 할 일도 없겠다, 그 사이에 너한테 예법 가르치면 재미도 있고 좋을 것 같은데, 난?”

베로니카 아가씨는 긍정적으로 말을 꺼냈다.

내가 귀족 아가씨들의 예법을 배우고, 수발 받는 것에 익숙해지는 게 무슨 메리트가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그러나 베로니카 아가씨가 모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계셔서 차마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럼…… 외람되지만, 아가씨께 예법을 배워도 될까요?”

“응. 내가 잘 알려줄게.”

베로니카 아가씨께서 활짝 웃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그 모습을 보는 것으로도 마음이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배워서 나쁠 건 없잖아?

게다가 아가씨께서 저렇게 즐거워하시는데 못 할 것도 없지.

“그럼 피곤할 텐데 오늘은 이만 자.”

“네, 아가씨.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아가씨가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 아가씨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냐. 오늘은 편히 쉬어. 바로 옆인데 뭐 어때.”

베로니카 아가씨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도 앞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내가 억지를 부리자 결국 아가씨가 못 이기는 척 미소를 흘렸다.

“그럴래?”

“네!”

문을 나와 아가씨가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다시 내가 머무르는 침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침대에 곧바로 몸을 눕혔다. 적당히 푹신한 침대와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예법…… 이라.

하녀로서 지켜야 할 예절은 배웠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평민이었다. 귀족은 아니다 보니 귀족 여인들이 익히는 예법은 잘 몰랐다.

그나마 베로니카 아가씨께서 하시는 것을 보아 왔을 뿐이다. 분명 눈으로 보는 것과 직접 하는 것은 천차만별이겠지?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긴장되는 마음 반, 설레는 마음 반이었다.

***

언제 어떻게 준비가 된 건지 아침부터 화려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나는 건물 1층에 위치한 식당으로 향하게 되었다.

“클레어!”

식당에는 이미 베로니카 아가씨와 알렉스가 앉아있었다.

“다들 안녕히 주무셨어요? 두 분 모두 일찍 오셨네요. 제가 너무 늦었나 봐요. 죄송합니다.”

멋쩍은 기분으로 알렉스와 베로니카 아가씨를 향해 사과했다.

귀족인 두 사람을 기다리게 만들었다는 것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베로니카 아가씨는 날 이해해줄 테지만, 알렉스는 언제고 내게서 마음을 돌려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와! 클레어 오늘 정말 예쁘다! 너무 사랑스러워!”

베로니카 아가씨가 나를 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잘 어울려요?”

“그럼!”

베로니카 아가씨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파우더룸에서 거울로 살펴봤을 때도 무척 예뻤는데, 내 눈에만 그런 게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게다가 베르첼 공작가의 치장을 맡는 하녀는 무척이나 솜씨가 좋았다. 그녀의 손을 거치고 나니 마치 내가 귀공녀가 된 듯했다.

수줍은 기분으로 내 옷차림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알렉스를 확인했다.

잠시만. 내가 왜 저쪽을 본 거지? 나도 모르게 나온 반응에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때 알렉스보다도 베로니카 아가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서 와서 앉아. 식사해야지.”

“네!”

내가 테이블 근처로 다가가자 알렉스가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그를 주시했다. 뭐 하려는 건가 싶은 찰나에 그가 한쪽 의자를 빼고는 내가 앉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여기 앉지. 레이디 클레어.”

레이디라는 과한 호칭까지 붙이는 알렉스의 말에 멋쩍음을 숨기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뻘쭘한 기분으로 알렉스가 빼준 의자에 앉았다.

상석인 알렉스의 오른편 자리였으며, 베로니카 아가씨의 맞은편이었다.

내가 착석하길 기다린 듯 하녀들이 식사를 내오기 시작했다.

알렉스와 베로니카 아가씨가 먼저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조금 늦게 두 사람을 살펴보다가 천천히 식기를 들었다.

그동안 호텔과 태번을 거쳐오며 식사했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있으면 안 될 자리에 온 것 같았다. 내가 정말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걸까. 이러다 체할지도.

“왜 그러지, 클레어? 혹 불편한 거라도 있나?”

내가 자꾸 흘끔거리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알렉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뇨! 이런 자리에 있는 게 어색해서 그랬어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

곧 식사가 다시 시작됐다.

“오늘 조금 바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나?”

“아유, 그럼요. 알렉스 바쁜 거야 제가 다 아는데 당연하죠.”

오늘은 알렉스 없이 온전히 휴식할 수 있는가 보다, 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아니, 나 말고 클레어 그대.”

“저요? 제가 바쁠 거라고요? 왜요?”

알렉스가 말한 바쁘다는 대상이 바로 나였다.

어째서?

이곳에서 나만큼 한가한 사람은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 피곤하면 일정을 미룰 테니 편하게 말해.”

“피곤하진 않은데요.”

“그럼 됐어. 예정했던 대로 일정을 진행하도록 하지.”

“잠깐만요! 무슨 일정인데요? 제 일정이라고 하셨는데 전 아무것도 들은 게 없는데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렉스는 짐작했다는 듯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오늘 그대가 이곳에서 입을 드레스와 액세서리 등을 맞출 거야.”

“…….”

“아무래도 내가 미리 준비한 옷들은 기성복이다 보니 사이즈가 정확히 맞지는 않을 테니까.”

알렉스는 별거 아니라는 것처럼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돈 생각은 하지 말고 갖고 싶은 거 전부 생각해놔. 오늘이 아니더라도 그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줄 테니까.”

“근데 저만 해주시는 건가요?”

조심스럽게 알렉스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이곳에 같이 온 베로니카 아가씨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베로니카 아가씨가 나를 보며 엷게 웃었다.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클레어. 이번 석 달은 온전히 너를 위한 시간을 보내 보렴.”

베로니카 아가씨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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