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가끔은 혼자 있는 시간도 중요하니까요.”
크루거 경이 난간에 잔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 말에 크루거 경을 향해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앗! 그럼 혹시 저 때문에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으신 건가요?”
졸지에 크루거 경의 시간을 방해한 사람이 되었다.
뒤늦게 몰려온 미안함에 되돌아갈까 고민하던 중, 크루거 경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생각해 보니 혼자 궁상떨고 있는 것보다 둘이서 대화라도 나누는 게 더 좋을 듯하군요.”
“그거 저 위로해주려고 하시는 말씀이죠?”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크루거 경은 정말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긴가민가했지만, 이대로 찜찜하게 도망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크루거 경의 말처럼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럼 정말 여기 있어도 되는 거죠?”
“예.”
크루거 경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안 추워요?”
숄까지 걸쳐 입은 나와 달리 크루거 경은 가벼운 포엣셔츠에 검은색 바지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초겨울이라는 것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가벼운 차림새였다.
“괜찮습니다. 추위는 별로 못 느껴서요.”
“대단하시네요. 전 사실 지금도 조금 추운데.”
“아, 그럼 들어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에요. 안에만 있기도 좀 답답한걸요.”
“그렇군요.”
크루거 경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반응에 숄을 추슬렀다. 뒤이어 그가 들고 있는 술잔을 확인했다.
“그런데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사이에 묻기는 좀 그렇지만, 예의상 안 물어볼 수도 없는 내용이었기에, 최대한 그가 기분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뇨.”
그는 먼 산을 바라보며 시간을 끌다가 대답했다.
내 직감이었지만, 남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별로 좋지 않은 일이 그에게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가 말하지 않는데 굳이 억지로 캐물어서는 안 될 것 같아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크루거 경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산만 바라보았다.
나 역시 그의 시선을 따라 산을 바라보았지만,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산이었다.
아마 그가 보고 있는 건 산이 아니라 말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겠지.
“공작님의 갑작스러운 제안 때문에 난감하시죠?”
한참 침묵을 유지하던 크루거 경이 내게 물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웃었다.
알렉스의 부하인 그에게 곤란했다는 소리를 하기도 그랬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크루거 경은 그런 내 마음을 이해했는지 술병을 집어 들다가 문득 나를 확인했다.
“잔을…… 하나만 챙겨왔는데 어떡하죠?”
그가 막 술을 따르려다 내 눈치를 보았다. 생각보다 세심한 배려에 나는 작게 놀라고 말았다.
나는 그를 보며 잠시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괜찮아요. 원래 술 별로 안 좋아해요. 맛없잖아요.”
“그럼 죄송하지만, 저 혼자 마시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고개를 한 번 숙여 다시 양해를 구한 크루거 경이 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검붉은색 포도주가 잔에 차올랐다. 반면 술병에 들어있던 포도주는 바닥을 보였다.
“벌써 한 병을 다 마셨네요?”
크루거 경은 생각보다 주당인가 보다.
별생각 없이 보이는 대로 말했다. 그러자 크루거 경이 빈 술병을 들어 보았다.
“얼마 안 마셨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비었군요.”
술을 다 마셔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그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떠올랐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고개를 돌려 정원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클레어 양께서는 이곳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시간이 좀 남아서 저택 구경이나 해볼까 해서 돌아다니던 중이었어요. 그러다 크루거 경이 보여서 온 거고요. 겸사겸사 정원도 구경하고요.”
“아, 그렇군요. 저택은 마음에 드십니까?”
“예쁘긴 한데……. 제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어요? 어차피 제 것도 아닌걸요.”
“…….”
크루거 경은 잠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클레어 양의 것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제가 알렉스와 결혼이라도 하면 그렇다는 말씀이시죠?”
그렇다는 의미로 크루거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반응에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장미 기사단과는 몇 번 대화를 나누어 봤지만, 그들의 반응은 아직까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크루거 경은 정말로 제가 알렉스와 결혼하길 바라세요?”
“글쎄요. 바란다기보다는-.”
“이해가 안 돼요. 알렉스, 그러니까 베르첼 공작님께서 그렇게 나온다고 해도 반대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딜 봐도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요. 대귀족인 베르첼 공작님과 고작 하녀일 뿐인 제가 결혼하다니요?”
“…….”
“알렉스야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주변 사람이라면! 아니, 아니지. 하다못해 알렉스의 최측근인 장미 기사단이라면 반대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게 맞겠죠.”
크루거 경은 내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지금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는 건가요?”
“예.”
“그럼 어떤 경우인데요?”
“클레어 양의 말대로 상대가 베르첼 공작님이지 않습니까.”
“…….”
당최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어쨌든 제가 아는 공작님이시라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그것이 돈이든, 권력이든…… 심지어 그것이 사랑이라 할지라도 말이죠.”
그건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알렉스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야말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걸 크루거 경이 알고 있다는 건, 내가 아는 원작의 알렉스가 지금의 알렉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이런 얘기가 불편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대답하지 않고 있으니 크루거 경이 씁쓸한 표정으로 내게 사과했다.
“아니에요. 사실 다들 알렉스를 말리지 않길래 왜 그런 건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다들 크루거 경처럼 생각하는 거군요.”
“……아마도요. 그리고 이전에도 말씀을 드렸듯, 공작님께서는 외로운 분입니다. 클레어 양처럼 좋은 분이 곁에 있다면 분명 긍정적인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테고요.”
크루거 경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크루거 경은 내가 알렉스와 맺어지는 것을 찬성한다는 듯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그 생각에 이견은 없는 듯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누군가 반대하고 벽에 부딪혀야 좀 더 명분도 서고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돌아갈 수 있을 텐데.
그렇다고는 해도 알렉스의 부하들이 알렉스를 반대하고 나서는 건 큰 의미가 없나?
어차피 다 무시하고 진행하면 될 테니까.
한다고 하면 귀족들의 여론이나 황실의 반대쯤은 있어야 하는 건가?
“만일.”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크루거 경이 입을 열었다.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고 작은 목소리였다.
아마 내가 그의 옆에 서 있지 않았더라면 들리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내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그의 동공이 조금 풀려 있는 것 같았다.
“만일 클레어 양께서 시간이 지나도 공작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떠나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나중에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크루거 경이 절 도와주실 거라고요?”
“예.”
“그거 든든하긴 한데요. 그래도 되는 거예요?”
“안 될 것도 없죠.”
정면으로 시선을 옮긴 크루거 경이 잔을 기울였다. 붉은 포도주 양이 줄어들더니 이내 잔이 비어버렸다.
크루거 경은 잔을 입에서 떼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언제 몽롱했냐는 듯 빙긋 웃었다.
“그럼 저는 술도 다 마셨으니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편안히 구경하시길 바랍니다.”
“네.”
크루거 경이 나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나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인사를 한 후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봤다.
나는 그제야 천천히 정원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초겨울이었음에도 정원은 꽃이 피어있었다. 아마 꽃에는 보존 마법이 걸려있을 것이다.
귀족들 사이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는 건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메이너드 백작가에는 인위적으로 개화 상태를 유지하는 꽃은 없었다.
마님께서 억지로 피어있는 꽃을 싫다 하셨으니까…….
자고로 살아있는 것은 살아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마님의 지론이었다.
지금 메이너드 백작가의 정원은 앙상했다.
그래도 곧 다가올 봄에 화려한 꽃이 피어날 테니 그때를 기다리는 맛이 있었다.
무릎을 굽혀 앉은 채 소담스럽게 피어있는 꽃을 내려보았다. 그리고 꽃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차가운 공기와 달리 손끝에 닿은 꽃잎은 미지근했다.
마법의 증거였다.
정원만 보아도 메이너드 백작가와 베르첼 공작가는 너무도 차이 났다.
그렇기는 해도 꽃을 보니 역시 좋긴 했다.
나처럼 잠깐 머물렀다가 떠날 사람에게는 좋은 눈요깃거리가 되어 주었다.
그때 찬 바람이 외부에 드러난 목가를 스쳤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숄을 여몄다.
“으, 추워.”
아무래도 오늘 외부 산책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시에 나는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
문제가 생겼다.
얼마나 정신을 빼놓고 걸어 나온 건지 주변에는 온통 풀뿐이었다. 간간이 조각상과 장식품 따위가 놓여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수풀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길을 찾지 못하겠거든, 지나가는 하인이나 하녀를 붙잡고 물어보면 된다고 했던 아비나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말대로 할 수가 없었다.
주변에 물어볼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떡하지?”
내 나이 스물세 살.
베르첼 공작가 내에서 길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