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80)

#051

무도회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가 있었다.

분명 아침을 먹기 위해 만난 건데, 식사보다는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눈 것 같았다.

주로 그때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무도회 당시의 일을 언급하면서도, 차마 프란츠 공작과의 일은 물어볼 수 없었다.

초대받지 않은 무도회에 참석해서 알렉스와 굳이 다투고 가는 사람이라니.

괴팍하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이 정도로 괴팍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대체 둘은 무슨 사이인 걸까?

물어볼까 싶었지만, 딱 봐도 알렉스는, 프란츠 공작에 대한 언급은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굳이 그를 건들고 싶지 않아 내 소소한 궁금증은 속에 눌러 담기로 했다.

식사가 끝난 후에는 베로니카 아가씨와 함께 베르첼 공작가의 중앙정원을 산책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로 정원이 자리하던 곳에는 예쁜 꽃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전에 정원사 한 명이 미로 정원의 정원수가 심어진 길을 따라 꽃을 심으면 보기 좋을 거라고 했는데 그 말이 딱 들어맞았다.

주변이 탁 트여 있으니까 괜히 길 잃어버리지 않아도 되고, 꽃까지 볼 수 있으니 좋았다.

“베로니카 아가씨! 클레어 아가씨!”

산책을 막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베르첼 공작가의 하녀가 우리를 다급히 불렀다.

“앤스티스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하녀가 들려준 얘기에 나와 베로니카 아가씨는 짜맞추기라도 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녀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향했다.

문 앞에는 익숙한 장미 기사단과 처음 보는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두 기사단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는 듯했다.

기사들끼리 신경전을 벌이기라도 하는 걸까?

그때 크루거 경이 우리를 확인하고 반색했다.

“오셨습니까?”

“네, 안에 공작님 계시죠?”

“예.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크루거 경의 대답을 들은 후 감사의 의미를 담아 짧게 묵례했다.

똑똑,

아비나가 재빠르게 문 앞으로 다가가 노크했다.

“베로니카 아가씨와 클레어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와.”

아비나의 말이 끝나자 문 안에서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비나는 우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알렉스와 앤스티스 공작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앤스티스 공작님. 어제 뵙고 오늘 또 뵙습니다.”

“안녕하세요, 클레어 에버니저입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니, 앤스티스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이 아주 잠시 내게 머물렀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뒤이어 앤스티스 공작은 고개를 돌려 베로니카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절로 다정해졌다.

“레이디 베로니카. 어제 잘 들어갔습니까?”

“네. 걱정해주신 덕분에 잘 들어갔어요.”

베로니카 아가씨가 수줍게 웃었다.

단지 인사를 나눈 것뿐이었음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마치 봄날처럼 화사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역시 심상치 않았다.

베로니카 아가씨가 나와 함께 베르첼 공작가로 갈 거라고 했을 때 감동을 받은 건 사실이었지만, 혹시나 알렉스가 베로니카 아가씨의 매력에 반하면 어떡하지. 하는 그런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알렉스는 베로니카 아가씨께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베로니카 아가씨는 이번 무도회에서 앤스티스 공작을 만나게 됐다.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두 사람 사이에 얼마나 달콤한 기류가 흐르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알렉스가 내가 아는 원작과 조금 다른 것처럼 앤스티스 공작 역시도 내가 인식하는 것과 조금 다를 수도 있으니 한동안 주시해봐야겠지만…….

“이만 앉지.”

알렉스가 나와 베로니카 아가씨, 그리고 앤스티스 공작을 향해 제안했다.

그제야 베로니카 아가씨와 앤스티스 공작은 서로에게서 물러나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차라도 들지.”

알렉스가 눈짓하자 하녀는 빠르게 다과를 준비했다.

“앤스티스 공작, 그대는 메이너드 백작 영애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군.”

알렉스가 단도직입적으로 앤스티스 공작에게 물었다.

“하하, 그렇게 보였습니까?”

앤스티스 공작은 부정하지 않고 멋쩍게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러더니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베로니카 아가씨와 눈을 마주쳤다.

아무래도 이 달콤함이 없어지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처럼 보였다.

차를 가볍게 마시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내내 요지부동이던 알렉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출발하지.”

알렉스가 앤스티스 공작과 베로니카 아가씨, 그리고 나를 향해 말했다.

안 그래도 언제쯤 출발하나 궁금해하던 찰나였다.

알렉스는 앤스티스 공작과 베로니카 아가씨를 곁눈으로 짧게 흘기더니 곧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그의 말을 따라 나는 알렉스의 손에 내 손을 얹었다.

알렉스가 자연스럽게 나를 에스코트했다.

나는 뒤를 힐끔거리며 베로니카 아가씨와 앤스티스 공작이 뚝딱거리는 것을 구경했다.

항상 나보다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베로니카 아가씨였기에 이런 아가씨의 모습을 보는 게 신기하고 또 재미있었다.

뒤를 슬쩍 쳐다보는 걸 알아차렸는지 알렉스 역시 고개를 돌려 앤스티스 공작이 있는 곳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저 두 사람은 같이 두어야겠군.”

알렉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자그맣게 웃었다.

알렉스는 앤스티스 공작이 베로니카 아가씨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이 이상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불쑥 고백했던 알렉스도 크게 다르게 보이지는 않았다.

“왜 웃지?”

“별거 아니에요.”

미주알고주알 알렉스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속으로만 웃음을 삼켰다.

응접실에서 나오자 장미 기사단과 베르첼 공작가의 고용인들이 우리를 따랐다. 곧이어 앤스티스 공작가의 기사들과 그 고용인들 역시 뒤를 따랐다.

연극 한번 보러 가는데 굉장히 많은 사용인들이 우르르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단순히 몸만 왔다 갔다 할 수는 없기 때문이겠지.

이런 걸 고려해서 알렉스가 아예 극장을 대관해버린 것 같았다. 그냥 돈이 넘쳐나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저택 현관을 나서나 주랑현관 앞으로 마차 두 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무도회장으로 가기 위해 마차에 올랐을 때와 같았다.

“나와 클레어는 이쪽에 탈 테니 앤스티스 공작, 그대와 베로니카 백작 영애는 뒤에 있는 마차를 타는 게 좋겠군.”

“그러죠.”

베로니카 아가씨는 알렉스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앤스티스 공작 역시 순순히 대답했다.

그는 알렉스의 권유가 오히려 마음에 든 것처럼,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나는 알렉스의 도움을 받아 수월하게 마차에 올랐다.

뒤이어 알렉스가 마차에 오르고 곧 마차가 출발했다.

“지금 보러 가는 건 무슨 연극이에요?”

“롱카스티 남작의 결심, 이라는 제목의 연극이야. 베버론 키알이 대본을 썼다는군.”

“아, 그래요?”

들어도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짧게 수긍하고 말았더니 알렉스가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베버론 키알, 모르나?”

“유명한 사람이에요?”

“세르갈에서 제일 유명한 문호야. 듣자 하니 이번 작품도 명작이라 하더군. 그대도 좋아할 거야.”

수도에서 유명하다고 하니 내가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애초에 연극은 주로 귀족들이 향유하는 문화라, 서민인 내가 잘 알 리가 없었다.

그래도 유명한 사람이 대본을 썼다니 궁금해졌다.

마차가 곧 극장 앞에 도착했다.

미리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있었는지, 극장 앞에서 대기 중이었던 직원 몇 명이 우리를 반겼다.

우리는 곧 극장으로 안내되었다.

미리 얘기가 되어 있었던 건지 나와 알렉스가 한쪽에 준비된 자리에 앉았고, 베로니카 아가씨와 앤스티스 공작은 따로 준비된 자리에 앉게 되었다.

나는 어색하게 의자에 앉으며 멀리 있는 베로니카 아가씨의 자리를 바라봤다.

“왜? 메이너드 백작 영애가 신경 쓰여?”

“네? 아, 네.”

“괜찮을 거야. 그쪽에도 혹시 몰라 장미 기사단을 보내 놨으니 이상한 일이 생기면 바로 대응할 수 있을 거니까.”

그런 쪽으로 걱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알렉스의 배려가 고마웠다.

누가 뭐래도 베로니카 아가씨는 내게 가족 같은 사람이었기에 은연중에 베로니카 아가씨를 계속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알렉스의 말대로 베로니카 아가씨 근처에는 자일 경과 페이비 경이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괜찮겠지?

나는 짧은 생각을 마치고 자세를 바로 했다.

타이밍 맞추어 연극이 시작되었다.

***

“안 돼…….”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싸웠지만, 결국엔 운명 속에서 희롱당하는 롱카스티 남작의 이야기에 나는 깊이 빠져들었다.

롱카스티 남작은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의 비참한 결정에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자, 여기.”

“고마워요, 알렉스.”

알렉스가 건넨 손수건을 건네받아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그렇게 슬펐나?”

“그러는 알렉스는 안 슬펐어요?”

지금까지 연극에 몰입해서 보느라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슬펐지.”

알렉스는 담백하게 말했다. 조금도 슬프지 않은 말투였다.

“아니, 정말 슬펐어요? 그런데 반응이 왜 이래요?”

“글쎄. 이게 내가 이번 연극을 감상하는 방법인가 보군.”

“아…….”

하긴. 내 감상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왠지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자리를 옮기니 베로니카 아가씨와 앤스티스 공작은 이미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아가씨! 그리고 앤스티스 공작님까지…….”

두 사람의 눈가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 다, 롱카스티 남작의 감정에 깊게 이입하며 감상했나 보다. 바로 나처럼.

“정말 명작이야…….”

베로니카 아가씨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보고 싶을 정도예요.”

나는 베로니카 아가씨의 말에 바로 맞장구를 쳤다. 베로니카 아가씨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큼, 나중에 또 오도록 하지요. 그럼 이만 돌아갈까요?”

앤스티스 공작은 최대한 울지 않은 척하려 빙긋 미소를 지었지만, 그래도 눈가의 붉은 기를 없앨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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