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80)

#055

영락없이 아침이 찾아오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래도 그의 본심을 듣고 난 덕분인지 어제까지 크루거 경 때문에 불편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가씨!”

언제나처럼 식당으로 가기 위해 베로니카 아가씨와 방문 앞에서 만났다.

“오늘따라 더 기분이 좋아 보이네, 클레어. 무슨 일 있었어?”

역시 내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베로니카 아가씨였다.

아가씨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확인했다.

“그동안 신경 쓰였던 일이 어느 정도 해소돼서요. 아침이 이렇게 가뿐할 수가 없는 거 있죠?”

내가 눈을 빛내며 얘기하자 베로니카 아가씨가 작은 소리로 웃었다.

“그거 다행이네.”

“네. 그러는 아가씨는 편지 다 써서 보내셨어요?”

“……응.”

베로니카 아가씨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절로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답신이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사실, 답신 왔어.”

“벌써요?”

베로니카 아가씨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앤스티스 공작은 직진밖에 모르는 남자였다.

베로니카 아가씨와 앤스티스 공작님 사이에는 벌써 꽃향기가 나는 듯했다.

식당에 도착해 식사를 이어갔다.

“앤스티스 공작이 서신을 보냈는데.”

식사를 한참 먹던 도중에 알렉스가 운을 뗐다.

“알렉스한테도 왔어요?”

눈을 깜빡이며 묻자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너드 백작 영애에게 보내면서 나한테도 하나 보냈더군.”

“어떤 내용이에요?”

“베버론 키알의 작품이 또 하나 극으로 나온다고 하더군. 그때 또다시 함께 만날 수 있는지 묻더군.”

말을 하던 중에 알렉스가 베로니카 아가씨를 흘긋 바라보았다.

“이 주 후라고 하는데 괜찮겠어?”

“전 좋아요! 안 그래도 저번에 봤던 그 연극이 인상적이어서 다른 작품도 궁금했거든요!”

내가 쌍수를 들어 환영하자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너드 백작 영애, 그대는?”

“저도 좋아요.”

베로니카 아가씨도 곧바로 긍정을 표했다.

“둘 다 괜찮다고 했으니 서신을 보내도록 하지.”

“네!”

“감사드려요, 베르첼 공작님.”

나는 식사하는 내내 ‘롱카스티 남작의 결심’에 대해 열띤 감상을 늘어놓았다.

다행히 식당에 있는 모두가 보았기에 감상을 나눌 수 있어 행복했다.

“최근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하던데, 내게 보여줄 수 있나?”

알렉스가 문득 그림 이야기를 꺼냈다.

일부러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건데, 아무래도 페이비 경과 카인 경의 입은 너무나 가벼웠나 보다.

어제 크루거 경에 대해서 물어본 걸 크루거 경에게 고스란히 전달한 것도 그렇고, 내가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을 이렇게 쉽게 알렉스에게 말하다니.

“별건 아니고 추상화를 좀 그려봤어요. 제 내면의 신묘한 감정들을 쏟아내 봤달까요?”

“호오, 그거 굉장히 흥미롭군. 괜찮다면 오늘 보여줄 수 있나?”

“앗……. 아직 미완성인데요?”

“미완성은 미완성의 멋이 있지.”

“……좋아요. 대신 보고 놀리기 없기예요.”

“약속하지.”

알렉스가 짓궂은 표정으로 웃었다.

놀리지 않겠다고 약속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구두로 한 약속은 믿기 어려웠다.

그래도 어디서 배운 적도 없는 내 그림을 수준급 예술가의 그림과 비교해서 보진 않겠지.

“알겠어요. 그럼 식사 마치고 보여드릴게요.”

떨떠름한 기분으로 알렉스에게 대답했다.

“기대되는군.”

“허접해도 몰라요.”

“본인의 그림을 스스로 허접하다고 말하면 안 되지. 자신의 그림이니 소중히 여기는 게 좋아.”

내가 만약을 대비해 그에게 중얼거리자 그가 한쪽 입술을 틀어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에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풍경화가 추상화로 바뀌었다는 얘기는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마침내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식당을 나섰다. 그리고 곧장 내가 임시로 선물 받은 물품을 보관하는 방으로 향했다.

문 앞에 도착하자 나는 잠시 몸을 돌려 알렉스와 베로니카 아가씨를 확인했다.

두 사람은 내가 문을 열지 않고 있으니 의아해했다.

“다시 말하지만 놀리시면 안 돼요.”

“약속한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널 왜 놀리겠어, 클레어.”

내가 확답을 하자 알렉스와 베로니카 아가씨가 번갈아 답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결국 문을 열었다.

정면에 놓인 이젤 위로 내가 열심히 그린 그림이 놓여 있었다.

“흠, 이건…….”

가까이 다가간 알렉스가 턱을 매만지며 말끝을 흐렸다. 미간을 좁히고 있는 게 꽤나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베로니카 아가씨는 눈을 깜빡이며 내가 열심히 그린 그림을 살폈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두 사람의 주변을 배회했다.

“괜찮은걸? 클레어, 네가 그린 거라고?”

우리 상냥한 베로니카 아가씨는 내 그림을 보는 시선조차도 친절했다.

“추상화랬지? 정확히 어떤 걸 표현한 거야?”

베로니카 아가씨가 순수하게 감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렇게 계속 거짓말을 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절대로 밝히고 싶진 않았는데…….

“사실…… 아니에요.”

“응? 무슨 소리야?”

내가 기어가듯 작게 말하니 베로니카 아가씨가 의문을 표했다. 내 말이 잘 들리지 않은 듯했다.

“사실 추상화 아니에요. 풍경화인데…… 페이비 경하고 카인 경이 추상화라고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해서…… 추상화라고 말한 거예요.”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었다.

베로니카 아가씨는 민망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클레어!”

알렉스가 돌연 내 이름을 외쳤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채 끌어당겼다.

눈 깜빡하는 사이에 몸이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묵직한 충격 일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눈을 몇 번 깜빡인 이후에야 굳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날 잡아끈 것은 알렉스였다. 내가 벽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다름 아닌 알렉스의 몸이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경황이 없어 입을 뻐끔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장미 기사단이 나와 베로니카 아가씨, 그리고 알렉스를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하나같이 무기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알렉스의 손에도 언제 뽑았는지 검이 들려 있었다.

“이게 무슨…….”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하하 호호 이야기꽃을 나누고 있었는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일까?

“클레어. 클레어?”

베로니카 아가씨가 나를 불렀다.

“네, 네?”

“내 손 잡아.”

당황해서 더듬거리며 말하자 베로니카 아가씨가 굳은 표정으로 내 손목을 잡았다.

내 손목을 쥔 베로니카 아가씨의 손은 차가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베로니카 아가씨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베로니카 아가씨가 겁에 질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내가 그린 그림에는 화살 두 개가 꽂혀있었다.

화살의 꼬리는 내가 서 있던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습격이 바로 내 뒤에서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만일 알렉스가 이를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나를 구하지 않았다면 과녁이 되는 건 그림이 아니라 내가 되었을 것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상황을 파악하긴 했지만, 알렉스에게 확인차 물었다.

알렉스는 매섭게 굳은 표정으로 사방을 주시했다.

“습격이야.”

알렉스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차갑고 날카로웠다.

나는 이런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잠시 묻어두었던 때의 기억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피투성이가 된 시체가 눈앞으로 그려지는 것 같았다.

“크루거.”

알렉스가 사방을 경계하며 크루거 경을 불렀다.

“예, 공작님.”

크루거 경이 곧바로 대답했다.

눈을 감으니 다른 감각들이 더욱 섬세하게 살아났다.

“자일, 카인과 함께 클레어와 메이너드 백작 영애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

“예, 알겠습니다.”

“대신 두 사람의 몸에 상처 하나 나서는 안 될 거야.”

“……예.”

크루거 경이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몇 사람의 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크루거 경과 자일 경, 그리고 카인 경의 걸음 소리일 터였다.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마침 나를 부르려던 자일 경이 나와 눈을 맞추고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으십니까?”

크루거 경이 나와 베로니카 아가씨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저, 저도 아직은 괜찮아요.”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입을 벌리면 그대로 심장을 뱉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절 따라오십시오.”

“알겠어.”

“네.”

크루거 경이 앞장서기 시작했다. 베로니카 아가씨와 내가 그런 크루거 경의 뒤를 바짝 쫓았고, 자일 경과 카인 경이 우리의 뒤에서 경계를 서며 따라왔다.

달려가면서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었던 이유는, 나를 잡고 있는 가녀린 손 때문이었다.

나는 곁눈질로 베로니카 아가씨를 살폈다.

베로니카 아가씨의 창백한 안색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불안한 듯 눈동자가 흔들렸고,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게다가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베로니카 아가씨가 얼마나 겁에 질렸는지 조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베로니카 아가씨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마치 나를 지키려는 듯이 굳건하게 내 손을 쥐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나를 붙잡고 있는 베로니카 아가씨의 손을 떼어냈다.

베로니카 아가씨가 당황스러워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아가씨를 향해 억지로 엷은 미소를 지어냈다. 나는 괜찮다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뜻을 담아.

뒤이어 나는 손을 뻗어 베로니카 아가씨의 손을 잡았다.

놓쳐서는 안 되는 건 베로니카 아가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나 역시도 베로니카 아가씨의 손을 굳게 그러쥐었다.

내 의도를 알아차린 베로니카 아가씨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우리는 크루거 경을 따라 이동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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