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
“알렉스 몸을 일으켜줄래요? 약부터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알렉스에게 부탁하자 곧 그가 나를 일으켜주었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고작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몸이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봐.”
알렉스는 숨을 고르는 나를 놔두고는 잠시 어딘가로 향했다.
뭐 하는 건가 싶어서 바라보니 그가 곧 잔과 물병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알렉스는 잔에 물을 따른 후 조심스럽게 내 손에 쥐여주었다.
“이건 안전할 거야.”
“감사해요.”
물 잔을 건네받자마자 알렉스가 이번엔 약병에서 약을 꺼냈다. 그리고 내게 한 알을 건네주었다.
나는 내 손에 올려진 작은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혀끝에 닿는 씁쓸함을 느낄 새도 없이 물을 마셔 약을 삼켰다.
효과가 언제 돌지는 모르지만 곧 있으면 괜찮아지겠지.
“이제 자도 돼요?”
닥터 마르셸로부터 회복만 한다면 별 탈 없을 거라 들었으니 알렉스도 안심했을 터였다.
내 예상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듯 알렉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그럼 잠깐만 잘게요.”
말을 마치고 눈을 감았다. 어지러웠던 세상이 천천히 암흑으로 물들었다.
***
누군가의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척 듣기 편안한 목소리였다.
내가 들어본 목소리 중에서 이런 고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베로니카 아가씨밖에 없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부유하던 몸이 천천히 정착하듯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정신이 들자마자 보이는 건 침실에 달린 캐노피였다.
“클레어가 했던 말 때문에 이곳에 있었지만, 아무래도 더는 안 될 것 같아요. 클레어와 전 앤스티스 공작가로 가겠어요.”
베로니카 아가씨가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 좋아. 대신 앤스티스 공작가까지 호위는 우리 베르첼 공작가에서 맡아도 되나?”
“네, 그리고 앤스티스 공작가에도 호위를 요청할 예정입니다.”
알렉스와 베로니카 아가씨의 목소리가 교차했다.
듣자 하니 머무는 곳을 옮기려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내가 습격자들의 타깃이 되었기 때문에 이동하는 게 더 위험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습격 다음으로 이어진 독살 시도까지 생각해 본다면, 아무래도 베로니카 아가씨의 말대로 이동하는 게 더 좋을 거 같았다.
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대화를 나누던 베로니카 아가씨와 알렉스가 몸을 돌려 나를 확인했다.
“클레어!”
“일어났어?”
알렉스와 베로니카 아가씨가 동시에 나를 불렀다.
“앗, 정말 죄송한데 머리가 울려서요.”
알렉스와 베로니카 아가씨의 목소리가 동시에 섞여 들어오니 머리가 댕댕 울렸다.
약을 먹고 자면 좀 나을까 싶었는데 썩 그렇지도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속은 메스껍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파 왔으니까.
“몸은 좀 어때?”
베로니카 아가씨가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히 물었다.
“아까 잠들 때랑 비슷한 거 같아요. 해독이 안 된 걸까요?”
이쯤 되니 나도 걱정되었다.
알렉스가 해독제를 먹였는데 지금까지 몸이 안 좋다는 건 뭔가 다른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안 그래도 네가 잠든 사이에 마법사를 불렀었어. 해독 마법을 따로 걸었는데도 안 좋은 거면 아무래도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은데…….”
베로니카 아가씨가 손을 뻗어 내 옆머리를 넘겨주었다.
알렉스는 베로니카 아가씨의 뒤에서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무슨 이야기하시는 중이었어요? 대충 들었는데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걸로 들었거든요. 맞아요?”
“응. 계속 여기 베르첼 공작가에 있는 게 썩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아서. 앤스티스 공작님께서 방을 마련해 준다고 하셨으니까 일단 그쪽으로 피신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리고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다시 돌아가자. 우리 집으로.”
베로니카 아가씨의 목소리는 나를 안심시켜주듯 차분했다.
내가 듣고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다.
“네가 결계 마법까지 걸려있는 이곳이 더 안전할 거라고 말했지만, 이제는 아니야. 클레어 너 정말 죽을 뻔했어.”
“죄송해요. 걱정 많이 하셨어요?”
내가 베로니카 아가씨의 눈치를 살피며 묻자 베로니카 아가씨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많이 했지. 네가 죽는 줄 알고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아니?”
베로니카 아가씨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그러더니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눈물이 뚝뚝 베로니카 아가씨의 뺨을 거쳐 이불로 떨어졌다.
“아가씨…….”
“너 정말.”
아랫입술을 꾹 깨물던 베로니카 아가씨가 이내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나를 감싸 안은 아가씨의 등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베로니카 아가씨는 내 손길이 이어지자 점점 더 서럽게 울음을 뱉어냈다.
나는 한동안 베로니카 아가씨를 진정시키기 위해 아가씨의 이름을 속삭이며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한참이 지나자 베로니카 아가씨가 울음을 그쳤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와중에 운 게 민망했는지 베로니카 아가씨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알렉스는 아가씨가 진정하고 나서야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더 불편한 곳은 없어?”
“아까랑 비슷해요.”
“닥터 마르셸을 다시 호출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알렉스가 하인을 부르더니 닥터 마르셸을 다시 불러오라 일렀다.
“일단 이동은…… 하는 거죠?”
“그래야지.”
알렉스가 짧게 대답하고는 곧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눈은 평소와 달리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몸이 괜찮아지는 대로 먼저 앤스티스 공작가로 이동하도록 해.”
미련이나 강요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담담한 말투였다. 그리고 알렉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는 미안한 일뿐이군.”
“…….”
“남은 일을 먼저 처리하고 난 후에 그대를 불렀어야 했는데, 내가 다 처리했다고 착각하고 있던 모양이야.”
언제나 자신감 넘치던 알렉스였건만, 오늘은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위험에 빠트려서 미안해, 클레어.”
알렉스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때, 닥터 마르틴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신중을 기하며 꼼꼼히 나를 진찰했다.
“음, 메스껍고 어지러운 건 독으로 인해 소화 기관이 상하여 그런 것 같습니다. 속이 울렁거리면 어지럼증까지 동반될 수도 있고요. 그러니 앞서 드린 약을 사흘 동안 꾸준히 드시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그것뿐인가?”
알렉스는 못마땅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닥터 마르틴은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쩔쩔매며 고개를 조아렸다.
“예, 이 늙은이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하루 정도는 저택에서 대기하도록 하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도록.”
“예, 알겠습니다.”
알렉스의 막무가내인 지시에 닥터 마르틴은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몇 개의 주의사항을 읊어주던 그는 곧 침실을 나갔다.
알렉스가 내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어깨에 닿은 그의 손은 차가워진 몸을 녹여줄 만큼 따듯했다.
“좀 더 자둬. 몸이 회복하려면 한동안은 휴식이 필요할 거야.”
“네.”
안 그래도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힘들었다.
그러나 쉽게 잠들 수 있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그전까지도 계속 자고 있었던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이 계속 지켜보는데 태연히 자고 있을 만큼 나는 태평한 성격이 아니었다.
“알렉스.”
“뭐지?”
내가 알렉스를 부르자 알렉스가 곧장 내게 대답했다.
“정말 죄송한데 쉴 수 있게 자리를 좀 피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 그러지.”
뒤늦게 알렉스가 방에서 나갔다. 그를 보좌하는 이들도 곧 방에서 나갔다.
침실 안을 채우고 있던 사람들이 나가니 한결 편안한 기분이었다.
“나도 나갈까?”
베로니카 아가씨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요. 아가씨가 있는 것만으로도 제게 얼마나 힘이 되는데요. 괜찮으시면 같이 주무셔도 되고요.”
“응.”
베로니카 아가씨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일단은 필요한 것들만 싣고 가면 돼. 나머지 짐은 천천히 보내면 되니까.”
베로니카 아가씨가 하인 한 명, 한 명에게 맡을 걸 설명하며 능숙히 통솔했다. 다들 아가씨의 말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앤스티스 공작은 그 옆에서 기사들을 지휘했다.
나는 근처에 서서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클레어.”
그때 옆에서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스는 차분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그는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단지 한참 동안 나를 주시하기만 했다.
“클레어, 곧 출발할 거야!”
베로니카 아가씨가 내 이름을 외치며 손짓했다. 나는 잠시 아가씨가 있는 방향을 확인했다가 다시 알렉스를 올려다보았다.
“저, 가볼게요.”
“……그렇게 해. 그대가 앤스티스 공작가로 가는 동안 장미 기사단이 그대를 호위할 거야.”
“네.”
알렉스에게 정중히 인사를 한 뒤 베로니카 아가씨가 있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베르첼 공작님과 인사는 마쳤니?”
베로니카 아가씨는 다시는 알렉스와 내가 만날 일 없는 것처럼 물었다.
고개를 돌려 알렉스를 돌아보았으나, 그 자리에 알렉스는 없었다.
“아마도요.”
“그럼 가자.”
“네.”
베로니카 아가씨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앤스티스 공작이 뒤이어 마차에 오르고, 곧 마차가 출발했다.
앤스티스 공작은 말없이 베로니카 아가씨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눈빛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생각이 많아 보였다.
하녀인 내가 달갑지 않은 거겠지. 그렇다고 베로니카 아가씨의 말을 거스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함께하는 거고.
불편한 티를 팍팍 내는 그를 보자니, 어쩐지 앤스티스 공작이 악역처럼 느껴졌다.
악역은 알렉스인데…….
나도 모르게 창문 밖을 확인했다.
베르첼 공작가가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생각을 정리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이걸로 알렉스와 메이너드 백작가가 얽힐 일은 더 없는 거니까.
목적대로 되었으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제 알렉스와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고 평화로웠던 일상에 돌아가자.
길게 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히히힝!
“어어!!”
말이 거칠게 우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기우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