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원수가 코앞에 있었다 (1)
***
나는 바로 그날 저녁, 부모님을 심각하게 불렀다.
“엄마, 아빠.”
“왜? 아구, 저, 저놈 시키. 내 저럴 줄 알았어.”
“나 거기 사과 좀 주소.”
엄마는 막장 드라마를 보며 사과를 깎았고 아빠는 다 먹은 사과에 포크를 엄마에게 주고 있었다. 그에 엄마가 그 손등을 찰싹 때리며 ‘알아서 주워 먹어!’ 하며 성질을 부리며 TV 가리지 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에 아빠가 의기소침하게 몸을 일으켜 사과를 꽂아서 가져가는 것까지 본 나는 다시 진지하게 본론을 꺼냈다.
“저 학원 보내 주세요.”
“응? 무슨 학원? 운동하고 싶어?”
“그럴 거면 그냥 우리 체육관에서 해라.”
“아뇨. 그거 말고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저 공부하게 학원 보내 주세요.”
툭, 포크가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모님이 동시에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나야. 너 어디 아프니?”
엄마가 걱정스레 묻고 아빠는 조용히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힐끗 보니 119가 눌려 있었다. 나는 그 핸드폰을 말없이 빼앗곤 침착히 대답했다.
“저 멀쩡해요.”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이게. 너 공부에 별 관심도 없었잖아. 그렇게 공부하라 소리쳐도 귓등으로 안 듣던 애가 무슨 일로…. 혹시 지난번에 아픈 게 덜 나았니…?”
점점 엄마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져 갔다. 나는 그 걱정을 풀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니. 저도 이제 열다섯 살이잖아요. 슬슬 진로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대학에 가고 싶어졌어요. 아직 뭘 하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공부를 하면서 찾아보고 싶어요. …안 될까요?”
조심스레 묻자 두 분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아빠가 자세를 다시 잡더니 내 두 손을 덥석 붙잡았다.
“드디어, 드디어 우리 집안에도 학자가…! 학자가 나타나는구나…!!!!”
아빠는 꽤나 감격한 얼굴로 외쳤다. 그간 집안에 대학 간 인물이 한 명도 없었다고 기뻐하는 그 모습에 나는 어리벙벙해져 있는데 옆에 있던 엄마가 뒤늦게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어머, 어머, 어머!! 이, 이럴 때가 아니지! 서윤 엄마한테 학원 좀 물어볼게요!”
“이나야! 걱정 마라! 이 아빠가 꼭 대학 보내 줄게! 빚을 내서라도 꼭!!”
“아,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정 안 되면 제가 알바해서…”
“떽!! 그런 말 벌써 하는 거 아냐! 이 아빠만 믿으렴!!”
영 힘들면 자신이 빚을 져서라도 대학에 갈 생각이었던 나는 아빠의 만류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두 분이 저렇게 좋아하실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지난 생에서도 공부해 보겠다고 할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아, 그리고 체육관도 다닐래요. 공부하려면 체력도 필요하대요.”
반에서 공부 잘하는 모범생에게 물어봐서 알게 된 일이었다. 내 말에 아빠는 감격에 겨운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라! 내가 어디 가도 체력으로 뒤처지진 않게 해 주마!”
…어, 불길한데? 너무 과해질까 싶어 만류하려는데 아빠는 이미 내 말을 듣고 있질 않았다.
“여보세요? 아, 서윤 엄마? 나 이나 엄만데….”
“이, 이럴 때가 아니지! 이럴 땐 뭘 사야 하지? 떡, 떡을 돌려야 하나?”
“아니, 그건 너무 과하구요.”
나는 일을 벌리려는 아빠를 붙잡았다. 하여간, 유난은…. 나는 두 분이 너무나 흥분해 하시는 광경을 지켜보다 어쩔 수 없이 웃고 말았다.
‘…….’
그리고 동시에 지난 생의 부모님이 생각났다. 설레발을 떨며 기뻐하는 그 모습이 마치, 내가 주니어 대회에서 첫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을 때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그럼 저 방에 들어가 볼게요!”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의 말을 듣기도 전에 황급히 자리를 피해 버리고 말았다. 방문을 닫은 나는 잠시 동안, 아주 잠시 동안 그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차츰 진정되고 침대에 몸을 뉘며 멍하니 상념에 젖어 있을 때, 불청객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벌컥!
“야! 서이나! 너 공부한다며! 구라 까지 마!”
“누나라고 불러라, 새꺄.”
나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이제는 좀 익숙한 동생의 얼굴에 베개를 날렸다. 그것을 얄밉게 피하며 다가오는 서이수는 의심쩍은 눈초리로 나를 내려다봤다.
“네가? 네가? 공부한다고?”
그 비웃는 듯한 몸짓에 저절로 짜증이 일었다. 나는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방 밖을 향해 까딱였다.
“꺼져. 내가 공부하든 말든 네가 뭔 상관이야.”
“너 학원비 빼돌리려고 그러는 거지?”
…학원비를 빼돌려? 그 말에 나는 얼굴을 싹 굳히고 누워 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뭐, 뭐야?”
동생 놈은 내가 갑자기 일어나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야. 너 학원비 가로챈 적 있냐?”
학원 얘기를 듣자마자 학원비 얘기라니. 그것도 빼돌리는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걸 보자니 느낌이 싸했다. 믿고 싶진 않지만 혹시나 싶어 떠보자 반응은 금방 돌아왔다.
움찔. 녀석의 몸이 내 말을 듣자마자 튀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얼굴을 사정없이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어디다가 썼어.”
“뭐, 뭐가!”
“학원비. 어디다가… 아니, 너 얼마나 빼돌렸어.”
기억 속에 이 녀석이 학원을 다닌 적은 3개월 남짓이다. 이것도 장남이라고 엄마가 겨우겨우 사정해서 다니게 한 거였다. 친구가 다닌다는 학원에 다닐 거라면서 학원비를 가져갔었는데… 설마,
“너 학원 간 거 거짓말이었어?”
“누, 누가 거짓말이래!”
녀석의 눈이 사정없이 떨렸지만 이 자식은 오히려 배 째란 듯이 소리쳤다.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며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이 미친 새끼가 빼돌릴 게 없어서 엄마, 아빠 돈을 빼돌려?!”
“뭐 하는 거야!”
녀석은 맞은 머리에 발끈했는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왜 치게? 치게? 어디 쳐 봐.”
이 녀석이 아무리 아빠한테서 훈련을 받았더라도 그 기간은 매우 짧았다. 거기에 프로의 정상까지 한순간이나마 갔던 내가 쉽게 질 리가 없었다. 설상 이 자식이 예의를 밥 말아 먹어 주먹을 휘두를지라도 응수할 수 있기에 할 수 있는 도발이었다.
“이익…!”
그리고 안타깝게도 녀석은 얼굴이 시뻘게지며 내 도발에 걸리고 말았다.
‘진짜 걸리란 의미는 아니었는데….’
나는 가볍게 혀를 차며 정확히 배로 향하는 주먹에 바로 손바닥을 펴 그것을 막았다. 곧 퍽, 하고 짧은 타격음이 울렸다.
‘…좀 아픈데?’
나는 굳은살이 박히지 않은 여린 손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통증에 인상을 살풋 찡그리다가 바로 녀석의 손을 붙잡고 팔을 꺾어 썩을 동생 놈의 머리를 침대에 박아 버렸다.
상상 이상으로 이 몸은 그냥 맨주먹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여렸다. 그래도 주먹이 막힌 게 여간 당황스러웠는지 방심한 썩을 놈 덕분에 일이 수월했다. 뭐 운동도 안 해 본 누나가 이렇게 몸을 잘 쓸 줄 몰랐겠지.
“돈 어디다 빼돌렸어.”
“아, 아파…! 아프다고…!!”
팔이 꺾인 채 온몸을 사용해 짓누르고 있으니 서이수가 고통을 호소했다.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다시 물었다.
“말해. 서이수.”
“말…할게! 말할게!”
나는 그 말에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그러자 서이수가 후다닥 거리를 벌렸다. 그는 한껏 경계 어린 얼굴로 나를 보다가 내가 조용히 째려보니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수…,”
“수?”
“술 사 먹었어….”
“…….”
할 말을 잃었다.
‘잠깐…, 지금 얘가 몇 살이었지? 나보다 한 살 어리지 않았나? 그러니까 열네…,’
“이 미친 새끼가 죽으려고 환장했냐? 어?!”
“으아아악!! 아파! 아프다고!!!”
내가 사정없이 녀석의 등짝이며 머리통이며 휘갈겼다. 서이수는 온몸을 막으며 내 손을 막기에 급급했다.
아무리 이곳이 인소 세계라 술이고 담배고 어린놈들이 쉽게 접한다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적어도 그냥 PC방 같은 곳에 썼다는 말을 기대한 내가 바보였다. 나는 아찔해져 오는 시야에 머리를 붙잡자 서이수는 조용히 내 눈치를 보다가 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야.”
흠칫, 녀석의 몸이 화들짝 놀란 것처럼 튀었다. 그리고 누가 봐도 겁먹은 것처럼 조심스레 거리를 벌렸다.
“왜, 왜에…!”
그러면서도 제게 기죽기는 영 싫었던 모양인지 서이수는 앙칼지게 저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코웃음을 치며 진지하게 말했다.
“너 다신 그러지 마라. 진짜.”
“…….”
“대답.”
“나, 남이사….”
같잖은 허세에 내 인상이 저절로 사납게 찌푸려졌다. 서이수는 내 얼굴을 보곤 움찔했다. 하지만, 바로 꺾기엔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인지 바락바락 소리쳤다.
“내, 내가 뭘 하든 네가 뭔 상관이야?!”
쾅! 서이수는 그 말을 지껄이곤 신속히 방을 나가 버렸다. 남겨진 나는 잠시 이 상황에 벙쪄 버렸다.
“뭘 잘했다고 성질이야…?”
허! 참.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져 헛웃음을 흘렸다.
“저 웬수 새끼…. 뭐, 술? 저거 미친 새끼 아냐?”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찼다. 미성년자에게 술을 팔진 않을 테니 뭔가 약한 애를 괴롭혔거나 지나가는 어른을 협박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잠깐.”
혹시 쟤도 뭐 그런 거야? 일짱이니, 이짱이니 뭐 그런 거?
갑자기 드는 합리적 의심에 이미 닫힌 문을 더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설마 저 녀석이 소설 속 내용과도 연관이….
“…쟨 아무리 생각해도 주연상은 아닌데? 못해도 이름 없는 똘마니인데?”
저 찌질이가 주연, 하다못해 조연일 리도 없었다. 아주 잘 쳐줘야 여주 괴롭히는 엑스트라 오브 엑스트라라 남주에게 처맞는 역할이면 몰라. 아니, 설마…,
“…저 새끼 범죄 저지르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