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원수가 코앞에 있었다 (2)
이곳은 인소 세계관, 아니, 어떤 세계관이든 통용되는 법칙이 있었다. 그건 이름도 없는 엑스트라가 여주를 납치하지 않던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는다든가! 열등감에 똘똘 뭉쳐서 그랬다든가! 아무튼 그런 이유로 여주 납치, 감금, 협박 등등을 했다가 남주에게 처참히 응징을 당하는 게 순리였다. 특히 이곳이 인소라면 더 확실했다.
다름 아닌 그 ‘인소’니깐! 인소는 클리셰 덩어리니깐! 거기에 막장까지 더한!!
근데 지금 저놈의 꼴을 보자니, 영 글러 먹은 그 싹바가지 없는 태도가 엑스트라의 길을 걸어갈 거란 의심의 뒷받침이 팍팍 돼 주는 것 같았다.
‘…역시 범죄는 아냐. 범죄는.’
아무래도 차차 녀석의 행보를 감시할 필요가 있었다. 원래는 동생이란 녀석에게 크게 신경 쓸 생각이 없었으나 생각이 바뀌었다. 우리 집안에 범죄자는 안 된다! 범죄자는! 그것도 소년범은 더더욱!!
‘그러기 위해선 저 새끼가 개기지 못하게 힘을 길러 놔야겠네.’
이번은 경험적 우위와 방심한 녀석 덕분에 찍어 누를 수 있었다. 적당히 공부용으로 체력만 키울 생각이었지만, 계획 변경이다. 어찌 됐든 피지컬 앞에선 장사 없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난 결심했다. 앞으로 좀 힘들지 모르더라도 운동과 공부를 동시에 병행해 보기로. 공부는 해 본 적 없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
……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으…. 이게 뭔 소리야아….”
머리를 써 본 적 없던 나는 좌절을 맛보았다. 학원을 다닌 지 일주일째, 칠판에 적힌 건 글씨인가, 외계어인가. 나는 머리를 싸매며 침통히 중얼거렸다.
“어려워…, 어려워…. 공부 싫어….”
그냥 운동 한다 할 걸 그랬나?
며칠 전 다니게 된 우리 집에서 운영하는 도봉 체육관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체력을 키우기 위해 운동을 하고 있는데 아빠가 내 자세를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이나야. 너 한번 이것 좀 쳐 볼래?”
아빠가 들고 있던 미트를 툭툭 쳤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자세를 잡고 툭, 쳤다.
“이나, 너….”
그리고 아빠는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봤다.
“너, 너… 다른 데서 뭐 배웠어?”
그 말에 흠칫, 했으나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해명했다.
“아니? 난 저기 있는 오빠들 따라 한 건데?”
몇천, 몇만 번이고 이 짓을 했는데 폼이 안 잡혔을 리가…. 무의식적으로도 완벽한 자신의 폼을 원망하며 대충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아빠는 오히려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왠지 지나치게 눈이 이글거리는 게 불길했다.
“너는 천재야! 이나야! 운동 배워 볼래?!”
“어? 나 공부할 건데….”
내 말에 아빠는 퍼뜩 정신을 차렸는지 멋쩍게 손을 내렸다.
“그, 그래.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그러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공부하는 걸 포기하게 하고 싶지 않았나 보다. …진짜 학자가 나타나길 원했나. 방금 완전 눈이 돌았던 걸 보면 꽤 진심이었음을 알았지만 나는 이번만큼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이미 나간 경험도 있고…, 뭐….’
좋은 성적도 거뒀으니 더 이상 욕심내진 않을 생각이었다. 물론 향상심이 없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번 생의 목표를 정했기에 이번만은 다른 길을 가고 싶었다.
‘그래도… 그 사람이랑은 붙어 보고 싶… 아니, 아니다. 잊자, 잊어.’
문득, 과거의 미련이 떠올랐으나 바로 고개를 저어 털어내 버렸다. 어찌 됐든 그렇게 아빠 앞에서 호기롭게 외치는 것까진 좋았다. 그런데 막상 책을 펼치자 나는 뼈아픈 현실에 눈물을 흘렸다.
국어는 화자의 심리가 뭐라 뭐라 하면서 사물의 비유가 어쩌고저쩌고하고 있고, 영어는 익스큐즈 미. 하이. 이딴 거밖에 모르겠다. 수학, 과학? 말해 뭐 한가. 입만 아프다.
“흐윽, 흐윽. 이 돌대가리를 어쩜 좋지.”
아빠가 학자 나왔다고 괜히 좋아한 게 아니었다. 유전적으로 돌대가리라 공부하겠다고 호기롭게 외치는 자식이 나온 게 기적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서글픈 현실에 터덜터덜 짐을 챙겨 학원을 빠져나왔다. 오늘따라 부는 바람이 더 차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도….
나는 불쾌한 냄새에 얼굴을 찌푸렸다. 누구야? 예의 없게 길에서 담배를 찍찍 피우는 새…,
“…….”
“…….”
툭. 제 손에 들렸던 담배가 떨어졌다. 그러나 마주친 우리는 침묵만을 고수했다.
***
“야. 서이수. 왜 그러냐?”
“뭘 쫄아 있어?”
옆에 있던 두 놈이 서이수를 툭툭 치며 건드렸다. 하지만, 서이수의 낯빛은 점점 창백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야.”
서슬 퍼런 목소리가 그에게 향했다. 그가 흠칫, 몸을 떨며 뒤로 주춤거리려다 주변에 써클 멤버가 있다는 걸 상기하곤 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뭐야? 아는 사람이야?”
“새끼, 여자 있었냐? 네 깔?”
“좀…, 좀 닥쳐 봐….”
“뭔데? 뭔데? 야, 근데 얼굴이 좀 별로지 않…,”
“아! 좀 닥쳐 봐!”
그런데 주변 새끼들이 도와주질 않았다. 서이수는 불안하게 뛰는 심장에 손끝이 떨려 왔다. 지난번에 처맞고 나서 서이나만 보면 경계를 세우던 그였다. 저 비리비리한 몸에서 어떻게 그런 몸놀림이 나오지…? 하고 의심쩍게 바라보던 중, 우연히 그는 체육관에서 서이나가 아빠에게 인정받던 모습을 발견했다.
‘너는 천재야! 이나야! 운동 배워 볼래?!’
…그래, ‘타고났다’라는 거구나. 그 사실에 서이수는 이를 아득 갈았다. 그렇게 재능이 있는데 왜 이제야 하는 거야? 지금 나 놀려? 서이수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 꼬치꼬치 캐묻고 싶었다. 그러나 서이수는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 발을 멈추고 말았다.
‘어? 나 공부할 건데….’
…공부. 하! 공부라고?
서이수는 그 사실에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졌으면서 공부, 공부라니! 그는 주먹을 꽉 쥐며 서이나를 노려봤다. 재수 없어. 작은 중얼거림이 그의 입안에서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서이나가 저를 돌아봤다. 그들이 시선이 마주치는 건 금방이었다. 서이나는 잠시 서이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아빠에게서 뭔가를 들은 모양인지 잠시 시선을 돌리더니 무언가 고민하는 뉘앙스를 풍겼다. 하지만, 그 기색은 길지 않았다. 서이나가 곧 제 쪽을 흘긋 보더니 무언가 결심한 것처럼 자세를 한 번 더 잡았다. 그리고 그의 팔이 미트를 세차게 강타했다.
팡-!!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내려치는 스트레이트 훅. 힘이 약해 가벼운 울림이었지만 그 순간, 체육관에 있던 모든 이가 서이나를 주목했다. 경악을 담은 그 시선들 속에 서이수만은 똑똑히 느꼈다. 미트를 치는 그 몸놀림은 저를 향한 경고라고. 이제껏 비뚤게 바라보던 것도 잊고 그때만큼은 섬찟한 공포를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서이수는 다시 한번 그때와 비견된 공포를 느꼈다. 왜냐면, 그 엄청난 재능을 가진 자신의 누나가 두 눈 시퍼렇게 뜨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하냐, 서이수.”
그리고 살기를 흩뿌리며 아빠를 닮아 점점 포악해지는 얼굴을 보곤 서이수는 생각했다.
‘좆됐다.’
그는 자신이 도망갈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누나는 점차 제게로 사신처럼 다가왔다.
“뭐야? 아는 사이야? 진짜 네 깔임?”
“너 눈 되게 낮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주변 새끼들은 이 상황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자신과 서이나가 얼굴이 다르게 생겨서 밖에서 보면 남매인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오해를 빚게 되었지만… 저 새끼들은 자꾸만 자신의 명줄 당기는 소리만 하고 있어 목만 바짝바짝 타게 했다.
“깔…? 눈이 낮아?”
허, 참. 서이나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그 시퍼런 시선이 주위를 향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잠시나마 그 시선에서 벗어나게 된 서이수는 안도했다.
“야. 서이수. 친구들 제대로 사귀어라.”
그리고 화살은 다시 제게로 돌아왔다. 그는 잠시 억울한 심정이 되었다. 얘네들이랑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그냥 같은 일진 써클이라 우연히 같이 있던 것뿐인데!
“야, 넌 뭔데 지랄이냐?”
“여자랍시고 개기는 거면 봐줄 테니까 꺼져.”
그 말에 서이수는 다른 의미로 낯을 굳혔다. …아무리 지금 누나와 사이가 안 좋더라도 자신의 누나에게 그런 소릴 지껄이는 걸 듣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때릴 듯이 공격적인 자세에 서이수는 그들을 말리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와…, 대박이네. 이게 중딩이라고?”
하지만, 서이나의 말이 더 빨랐다.
‘…아니, 이 누나는 대체 도망가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자신을 빼고서라도 3:1이었다.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이제 막 운동을 배운 사람에겐 위험했다. 그래서 서이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
“야, 서이나! 뭐 하는 거야!”
나는 현 중학생의 실태에 황당해하다 말고 서이수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누나라고 부르랬지. 서이수.”
“누나?”
“서이수, 네 누나였냐?”
한순간에 팽팽했던 공기가 풀렸다. 그에 서이수가 안도하든 말든 난 녀석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자.”
“…안 가.”
“가자고.”
“안 간다고!”
이 새끼, 이거. 사춘기야, 뭐야? 아. 나이로 따지면 맞나? 나는 녀석의 고집에 골치가 아파져 인상을 찌푸렸다.
“너 진짜 말 안 들을래?!”
“네가 뭔데 이래라저래라야!”
“네 누나다, 새꺄!!!”
결국 참다 못해 소리 지르며 노려보자 서이수는 잠시 흠칫거리다가 같이 노려봤다.
파지직, 시선이 맹렬히 부딪혔다. 이제는 키가 얼핏 비슷해져 시선이 얼추 맞았다. 이 새끼, 언제 컸지? 분명 나보다 작았…,
‘어?’
나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드는 생각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 방금 무슨 생각한 거지? 왜 자연스레 이 녀석이 내 동생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지? 왜 이 세계의 삶이 내 삶이라고 자연스레 받아들인 거지?
느릿하게 찾아온 충격에 경악했다. 어느 순간부터 난 이 세계를 내 삶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걸 알 수 있던 이유가 눈앞에 있는 서이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