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서브남주 같은 녀석의 속을 알 수 없다 (2)
***
“으아아, 빡시다. 빡세.”
나는 털썩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이렇게 몸을 쓴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주 3회 정도 강도를 높여 운동하곤 있지만 이렇게 직접 오래도록 싸운 것은 심히 오랜만이었다.
아니, 이런 패싸움 자체가 처음인가?
솔직히 호기롭게 외치긴 했지만 자신이 이렇게까지 날뛸 수 있을지 예상치 못했다. 어쩐지 이전에 살았던 몸보다도 더 훨훨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중간부턴 그 감각에 휩싸여 무아지경으로 싸우다 슬슬 적당히 가열된 기분이 들었을 땐 어느새 적들은 전멸이었다.
그걸 깨닫자 바로 맥이 풀려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리고 곧 무리한 근육이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역시 프로 시절이랑은 다른 건가…. 1라운드 정도 뛴 거 같은데 벌써 기진맥진이라니…. 혼자서 싸웠으면 힘들었겠는데.’
나는 힐끗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고고히 서 있는 녀석을 쳐다봤다. 언제부턴지 몰라도 녀석도 싸움에 합류했던 게 간간이 떠올랐다. 잠깐씩 보인 그의 무용을 잠시 떠올린 나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지켜보니깐 훨씬 강하네.’
나는 군더더기 없던 그 몸짓들을 떠올리며 문득 손끝이 짜릿하게 저려 왔다.
‘아, 반휘혈이랑 좀 싸워 보고 싶은데.’
오랜만에 호승심이 불쑥 튀어나왔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애도 아니고 먼저 싸움을 걸 필욘 없었다. 게다가 저 녀석은 프로도 아니었다. 물론 프로라고 해서 그런 무례를 범해도 된다는 건 아니지만….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이젠 나랑 상관없는걸.’
나는 작은 미련을 떨어트리며 몸을 벌떡 일으켜 반휘혈에게 다가갔다.
“어디 다친 덴 없어?”
내가 안색을 살피자 녀석은 말없이 내려다봤다. 정말 새삼스럽지만 말이 없는 놈이다. 이번엔 같이 공투도 해 봤겠다 유대감이라도 조금 생겼을까 싶어 뭐라도 대답해 줄 줄 알았는데, 역시 괜한 기대였나. 괜히 민망해져 뒷목을 문지르며 눈을 슬쩍 피했다. 그러던 중 그의 얼굴에 난 잔상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너… 다쳤잖아!”
“…….”
괜찮은 줄 알았는데 이 잘난 얼굴에 상처가 있었다니! 나는 대번에 놀라 녀석의 팔을 붙들었다.
“요 앞에 약국 있어! 약 바르자!”
녀석은 잠시 눈을 크게 떴지만 경황이 없던 나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신속히 녀석을 잡아끌고 약국에서 약을 사 근처의 벤치에 녀석을 앉혔다.
“쓰라리면 말해.”
나는 상처를 빨간약으로 소독하고 면봉에 연고를 묻힌 뒤 상처 주위에 콕콕 찍었다.
“아파? 괜찮아?”
녀석은 말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는 그 대답에 안도하며 반창고를 살포시 붙여 주었다.
“다른 데는?”
그 말에 반휘혈은 잠시 저를 내려다보다 느릿하게 오른손을 들었다.
“손등 까졌었네. 쓰리겠다.”
나는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상처를 치료했다. 하지만, 조금 큰 상처라 반창고로는 부족했다. 혹시나 싶어 거즈를 사 두길 정말 잘했다. 나는 거즈를 붙이고 붕대를 꼼꼼히 감아 주었다.
“다른 데는? 또 없어?”
그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아무래도 지난번보다 덜 다친 모양이었다.
“그렇게 다구리를 쳤는데 이만하길 다행이네.”
나는 안도하며 이번엔 내 상처를 확인했다.
음. 역시 맨팔, 맨손은 좀 그랬나. 글러브도, 하물며 장갑도 끼지 않은 손은 그렇다 쳐도 여름이라 옷으로 보호되지 못한 팔꿈치의 살갗이 거의 까져 있었다.
‘…어쩐지 쓰리더라.’
나는 한숨을 쉬며 불편하게 팔을 꺾어 상처를 치료하려고 하는데, 돌연 들고 있던 약들이 휙, 하고 손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어….”
나는 망연히 빼앗긴 출처를 확인했다. 그 범인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옆에 있던 반휘혈이었다. 그는 말없이 그것들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더니 내가 녀석에게 한 것처럼 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 놀라워하며 녀석을 바라보다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어…, 음…. 고, 고마워…?”
설마 이 녀석에게서 이런 배려를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터라 얼떨떨해졌다. 반휘혈은 어떤 말도 없이 치료에만 전념했다. 나는 눈을 멀뚱히 쳐다보며 녀석이 치료하는 걸 지켜봤다. 그는 내 상처에만 집중하며 눈을 내리깔고 있어서 얼굴이 너무 잘 보였다. 그 모습은 몇 개월 전 봤던 그 얼굴과 같으면서도 또 달랐다.
‘그사이에 또 컸나….’
어쩐지 윤곽이 살짝 달라진 것 같았다. 그때는 좀 더 미소년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미청년에 더 다가간 느낌이랄까.
‘…속눈썹도 엄청 기네.’
나는 가까이 다가온 녀석의 얼굴을 관찰하며 몰래 감탄했다. 이런 미인을 언제 이렇게 가까이 구경하겠나 싶었다. 어쩌면 이게 최초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몰래 마음껏 구경할 심산이었다.
“끝.”
“응?”
말없이 속으로 감탄하며 얼굴을 꼼꼼히 구경하는데, 웬 낯선 소리가 들렸다. 의아함에 반문하자 어느새 고개를 든 녀석과 두 눈이 딱 마주쳤다.
“끝났어.”
허…얼? 얘, 얘 지금 나한테 말 건 거야…?!
치킨을 먹은 그날, 그것도 미세한 중얼거림 이후로 처음 듣는 목소리에 나는 경악했다. 아니, 오늘 무슨 날인가? 얘가 치료도 해 주고 말도 해 주고!
‘계 탔네, 계 탔어! 오늘 엄마한테 로또 하나 사 보라고 해 봐야겠다.’
속으로 결심하는데 가까이 있던 녀석의 얼굴이 멀어졌다. 좀, 아니, 많이 아쉬웠다. 나는 쩝, 하며 입맛을 달래곤 뒷목을 주무르면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어, 고마워.”
반휘혈은 내 말에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도와준 거야?”
변성기가 지나려는지 미성과 낮은 음성이 미묘히 섞였다. 하지만, 듣기에 거슬리진 않았다. 오히려 외모에 걸맞게 중성적인 느낌이라 신비로운 분위기마저 풍기고 있었다. 나는 그 물음에 말없이 녀석을 보다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냥, 아는 얼굴이라서?”
그대로 지나치기엔 찝찝하잖아. 그리고 걔네들 재수 없었고, 치사하게 한 명을 상대로 쇠 파이프가 뭐냐?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자 그는 내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나는 그 침묵에 말을 잠시 멈추고 눈을 도르륵 굴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기분 나빴어?”
내 말에 반휘혈은 한쪽 눈썹을 작게 까딱였다. 그 모습마저 그림 같다니, 이건 반칙이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뒷말을 이었다.
“그 자꾸 알은체한다든가, 이번에도 도와준 거라든가….”
매번 저만 알은체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이쯤 되면 자신이 눈치 없이 그에게 인사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기분이 나빴다는 말을 들으면 다음부턴 안 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아니.”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반휘혈은 저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아, 그래….”
난 이상한 놈이구나…. 그렇구나…. 나는 먼 산을 보며 시선을 피했다. 그건 그렇고 이건 인사해도 된다는 뜻인가, 아니란 뜻인가 갈피를 못 잡겠네.
“그래서… 앞으로도 알은체해도 된다고?”
반휘혈은 내 말에 빤히 쳐다보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대답에 안도의 숨을 내쉬곤 피식 웃었다.
“알았어. 아, 그리고 너도 좀 인사해 줘. 나만 인사하기 뻘쭘하단 말야.”
내 말에 반휘혈이 시선을 슬쩍 피했다. 나는 그 모습에 어이없이 웃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난 간다. 아, 내 동생… 그러니깐 서이수 보면 집으로 기어들어 오라고 전해 줘.”
바이 바이. 나는 손을 흔들며 작별했다. 녀석은 이번에도 마주 인사해 주진 않았지만 왠지 인사를 받은 듯한 기분이 들어 이번만큼은 상쾌한 기분으로 집에 들어갔다.
***
그리고 약 1시간 후, 서이수가 방으로 득달같이 들어와 내 어깨를 짤짤 흔들어 댔다.
“야!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대체!”
“뭐, 어, 가, 아.”
너무 흔들려 말이 뚝뚝 끊어졌다. 서이수는 어깨를 흔들던 걸 멈추곤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내게 말했다.
“반휘혈이 나한테 말 걸었다고!”
“반휘혈이?”
“그래! 누나가 나보고 집으로 기어들어 오라고 했다며!”
오. 설마 그걸 성실히 한 자, 한 자 전부 다 전해 줄 줄이야. 혹시 그건가? 같이 싸워서 유대관계를 느끼기라도 했나? 나는 기대치 않았던 결과에 멀뚱히 눈을 깜빡이다가 씨익 웃었다.
“뭐어, 너보단 친해진 것 같다.”
“아, 그러니깐 그게 뭔데!”
“비밀. 안 가르쳐 줌.”
그날, 이수는 시끄럽게 매달렸지만 나는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패싸움을 했다는 걸 알려 봤자 좋을 거 하나 없기도 했고, 서이수를 골려 줄 마음도 컸기 때문이었다.
***
“어. 이수야.”
“어? 누나? 누나가 왜 여기 있어?”
그 일이 있고 나서 며칠 후, 아무 생각 없이 패스트푸드점에 왔다가 서이수와 마주쳤다.
“어, 누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 그래.”
그리고 서이수의 동료인지 친구인지 잘 모르는 일진 패거리도.
“누나, 야자 짼 거야? 오늘 체육관 가는 날 아니잖아.”
“어. 오늘은 쉬려고.”
나는 매주 월, 화, 목, 금 야자를 하고 있었고, 수, 토, 일은 운동하는 날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그래서 야자를 하지 않고 밖에 나와 있는 모습이 꽤나 신기했는지 서이수가 자꾸 나를 붙잡았다.
“그럼 누나도 같이 먹자.”
“아니, 난 테이크아웃…,”
“같이 먹어요.”
“에이, 누나. 같이 먹어요~. 여기 빈자리 있어요!”
너희들은 대체 누구길래 내게 친한 척이냐. 나는 나름 건장한 중딩 놈들의 애교에 똥 씹은 얼굴로 변했다가 서이수가 하는 말에 멈칫했다.
“휘혈이도 온다고 했어. 같이 먹고 가.”
오. 그 반휘혈도…? 걔도 이런 데 오는구나? 귀티 나게 생겨서 그런지 상상이 잘 안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