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나랑 친해지고 싶다고? (1)
***
주말이 되었다. 나는 주말이면 으레 그랬듯이 공원에서 가볍게 뛴 후 체육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체육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바로 발을 멈칫했다.
평소보다 소란스러운 여자 회원들의 숙덕이는 소리, 자기 어필 하는 남자 회원들의 과격한 몸놀림은 둘째 치고, 나는 눈앞에 보이는 인물들에 잠시 눈을 비볐다.
“…….”
“허허허. 이나 왔니?”
그리고 다시 눈을 뜨자 평소보다 자애로워 보이는 아빠의 얼굴이 보였지만, 내가 신경 쓰이는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아빠의 커다란 몸집을 성의 없이 치우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놈들을 바라보았다.
“어, 누나!”
“안녕하세요~.”
꾸벅.
‘쟤네들이 왜 저기 있어…?’
여자 회원들의 열렬한 시선을 받고 있는 세 놈의 등장에 나는 떨리는 눈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들이 제게 직접적으로 인사하자 자연스레 모든 회원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마치, 서로 어떻게 아는 사이냐는 듯 강렬한 눈초리였다.
특히나, 여성 회원들의 열렬한 시선들을 외면하며 내 눈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내가 찾고자 하는 놈은 그 세 놈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찾던 놈, 서이수는 소란스러워진 주변에 아무 생각 없이 내 쪽을 봤다. 그러다 나의 강렬한 시선과 부딪히더니, 슬쩍 내 시선을 피하며 다시 샌드백을 차기 시작했다.
‘저 자식, 지금 나 무시한 거지?’
두고 보자, 서이수. 나는 이를 으득 갈고 한껏 설레어 보이는 아빠를 불렀다.
“아빠. 저게 뭔 상황이에요?”
“허허허. 우리 이수 친구들이 체육관 견학시켜 달라지 뭐냐? 그래서 이수 통해서 견학시켜 주고 있었지.”
그렇게 말하는 아빠는 눈이 빛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회원을 가입시킬 수 있다는 기대에 빠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요새 적자를 왔다 갔다 하고 있다며 한탄하는 걸 우연히 들은 적이 있었지만… 나는 기뻐하는 아빠를 슬쩍 보며 한숨을 내쉬곤 익숙한 자리로 갔다.
“왔어?”
“아, 언니. 일찍 왔어?”
자리에 서자 근처에 있던 두 살 위의 언니, 김서연이 말을 걸어 왔다.
“곧 경기라서 말이지~.”
김서연은 씨익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우리 이나도 한번 뛰어 보는 게 어때? 어? 아님 언니랑 스파링이라도 해 볼래?”
“하하…. 그건 좀.”
김서연의 권유에 나는 몸을 조심스레 뒤로 뺐다.
“우리 이나 몸놀림이면 프로는 금방인데? 한번 봐 줄게. 아님 시험 삼아 언니랑 해 볼래?”
가볍게 제안하는 그녀의 말에 슬쩍 시선을 피했다.
김서연은 이전 삶에서도 아는 사이였다. 이 체육관 안에서도 유망한 선수였지만, 체육관이 망하면서 결국 다른 체육관에 스카우트되어 이 체육관을 떠났었다. 다른 이들 다 떠나갈 때 그나마 끝까지 자리를 지켜 준 회원이었고 가장 의지했던 언니인지라 나는 이 언니에게 유독 약했다. 그래서 이 언니가 이렇게 권유할 때면 마음이 자꾸 약해졌다.
그도 그럴 게, 그 누구보다도 나와 내 재능을 사랑했고 그 때문에 내 은퇴를 안타까워하고 분노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왜 그런 이유로 네가 그만둬야 돼! 차라리, 그래, 차라리 다른 체육관에 계약해서 선수 뛰자. 네 재능을 이렇게 썩히는 건 말도 안 돼!’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언니도 참 어렸는데, 너무나 의젓해서 가족 앞에서도 흘리지 않던 눈물을 이 언니 앞에서 한없이 쏟아 냈던 것 같았다.
그 덕분일까, 선수에 대한 큰 집착이 별로 없었던 건 그때 다 쏟은 눈물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미안해. 언니.”
그래서 이 현생에서도 제 재능을 간파하고 권유하는 언니한테 조심스러운 거절을 입에 담게 된다. 선수에 대한 미련은 지난 삶에 다 내려 뒀다. 만일, 그때 언니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후회로 점철되어서 또 미련하게도 체육관이 망하든 망하지 않든 상관없이 붙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매번 권유해 줘서 고마워.”
이전 삶에서도, 이번 삶에서도 제대로 자신을 알아봐 주는 그 자세가 고마웠다. 그리고,
“…그래? 정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씨익 웃으며 이렇게 자신의 거절에 부드러이 물러서 주는 배려까지 말이다. 제게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해 주는 권유와 물러서는 배려 모두가 고마웠다. 이걸 보면 사람은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란 걸 느끼게 했다. 지금의 언니는 지난 생에서의 저보다도 어리지만 여전히 나에게 존경스러운 언니였다.
“뭐, 그건 그렇고!”
김서연이 갑자기 내 귓가에 얼굴을 붙였다.
“저 앞날이 아주 창창할 듯이 보이는 저 아이들이랑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응? 응? 김서연이 흥미로운 기색으로 내게 속삭였다. 나는 그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동생 친구들이야.”
내 말에 김서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히죽거렸다.
“그냥? 그으냥? 혹시 저 중에 네 남친은 없고?”
쿡, 쿡. 옆구리를 찌르며 능글맞게 웃는 모습에 나는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쟤네들 중딩이거든…?!”
내 나이가 몇인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중딩이랑 사귄단 말인가!
“중딩이라 해도 너랑 한 살 차이잖아? 뭘 그리 정색해?”
아참, 그렇지. 나는 그간 잊고 있던 현실을 정확히 파고드는 김서연의 말에 의표를 찔려 할 말을 잃었다. 황당해하며 나를 보는 김서연의 시선을 한껏 외면하며 나는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아, 아니이…. 내 취향은 연하보단 연상이란… 뭐 그런 뜻이지.”
“오~. 그래?”
내 말에 김서연이 히죽 웃었다가 짐짓 엄한 얼굴로 바꿨다.
“그래도 오빠가~, 오빠가~, 하면서 저 잘난 맛에 사는 열등한 놈들은 조심해야 돼. 알았지?”
나는 그 말에 바로 인상을 구겼다.
“강석현 같은 놈? 트럭으로 줘도 싫어.”
스무 살이나 처먹었으면서 그보다 어린 중딩이나 고딩을 건드리는 꼴이 여간 꼴사나운 게 아니었다. 오뽜가~, 오뽜가~, 하면서 유세를 떠는 게 얼마나 꼴 보기 싫던지…. 그때마다 그 같잖은 꼴을 나와 서연 언니가 퇴치한 게 몇 번이던가. 나는 치를 떨며 팔을 북북 긁었다.
“그렇지. 우리 이나, 이 언니가 믿는다. 나중에 누구 사귀면 꼭 소개시켜 줘? 내가 검사해 줄게. 아, 코치님 부르신다. 나중에 또 얘기하자!”
찡긋, 위트 있는 윙크를 보내며 김서연은 떠났다. 나는 그에게 알겠다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친언니가 있었다면 저런 느낌이었을까? 이전 삶에선 형제자매가 없었다 보니 유독 친언니처럼 따랐었다. 그리고 이번 삶에서도 변함없는 그 모습은, 가끔씩 정처 없이 헛도는 내 영혼을 안정적으로 붙잡아 주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그렇게 김서연과 헤어지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근처로 다가왔다.
“누나, 누나.”
능글이, 한도훈이었다.
시선을 돌려 보니 한도훈은 내 근처에 앉고 자신을 가리켰다.
“인사 안 해 줄 거예요? 전에 인사해 준다 하지 않았어요?”
그 말에 나는 잠시 벙찌어졌다. 아니, 그런 걸 왜 기억하고 있데…? 하지만,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기다리는 녀석을 외면하긴 힘들었다.
“어어, 그래. 안녕.”
결국 떨떠름히 인사해 주자 한도훈은 만족했는지 빙긋 웃었다. 나는 이제 비켜 주려나 싶어 다시 스트레칭을 재개하는데, 예상과 달리 한도훈은 떠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누나는 오늘 뭐 할 거예요?”
“…그냥 몸만 풀 거야.”
“누나도 스파링 같은 거 해요?”
한도훈이 초롱초롱한 눈길로 기대하듯 물었다. …다들 왜 하나같이 이런 것만 묻나 모르겠다. 그렇게 내가 링 위에 서는 게 보고 싶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해 줄 말은 단순했다.
“안 해.”
“왜요, 왜요? 누나 꽤 잘할 거 같은데. 선수 안 뛰어도 스파링 정도는 하잖아요?”
지난번에 체육 교사로 진로를 정했단 걸 의외로 기억해 주고 있었나 보다. 나는 녀석을 새삼스레 잠시 바라봤다가 이내 시큰둥하니 시선을 돌리며 설명했다.
“…다치면 공부하기 힘들어.”
“누나 공부 잘하나 보다. 거의 공부만 하네요? 가끔은 저희랑도 같이 놀아요.”
아니, 공부 못하…, 이걸 설명해 줄 의리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굳게 입을 다물며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끼리 놀아.”
“에이, 사양하지 마시고요~. 같이 놀면 재밌을 거예요~.”
한도훈의 끊임없는 조잘거림에 스트레칭하던 것을 멈추고 녀석을 봤다. 눈이 마주치자 한도훈은 활짝 웃어 보였다. 나는 그 얼굴을 언짢게 보며 말했다.
“나 별로 재미없어. 저기 가서 샌드백이나 치든가 해.”
저기, 너를 보는 여성 회원들의 집요한 시선이 느껴지지 않니? 네가 샌드백 한번 쳐 주면 아주 좋아 죽을 거란다. 대충 이짱 정도는 된다고 했으니 폼도 나쁘지 않을 거 아냐. 나는 눈으로 어서 가라고 재촉했지만, 한도훈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아닌데요?”
“뭐?”
생각도 못 한 부정에 눈살을 찌푸리자 한도훈은 여전히 저를 보며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누나 되게 재밌어요.”
“…내가?”
난생처음 듣는 말이었다. 지난 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쉽게 들어 보질 못했다. 한도훈의 평이 이해가 되질 않아 갸웃거리자 녀석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지난번에 노래방에서 막…!! 으읍!!!”
“하하하. 우리 도훈이 심심했구나? 누나랑 그렇게 스파링이 뜨고 싶었니??”
나는 신속히 녀석의 어깨에 팔을 걸고 우리를 집요하게 쳐다보는 여성 회원들은 보이지 않게 그 입을 틀어막았다.
이 능글이 때문에 그간 잊고 지냈던 흑역사가 실토될 뻔했다. 그 일 떠오를 때마다 수없이 이불을 찬 게 몇 번이던가. 게다가 아빠와 함께 있는 자리에선 절대 그 말은 하면 안 됐다. 안 그래도 내가 운동 쪽으로 가지 않던 걸 아쉬워하시는 분인데 이 사실을 알았다간….
‘이나야. 넌 챔피언이 될 수 있어!!!’
하면서 투지를 불태울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아, 이걸 알면 서연 언니도 득달같이 달려들지도. 두 사람이 동시에 덤벼들면 감당할 수 없어진다. 상상만으로도 서늘해지는 간담에 나는 살벌히 눈을 뜨며 한도훈에게 작게 속삭였다.
“조용히 해라. 링 위에서 합법적으로 뒤지기 전에.”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