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나랑 친해지고 싶다고? (2)
나는 그 대답에 한도훈을 풀어 줬다. 녀석은 잠시 뻣뻣해졌지만, 그것도 얼마 가진 않았다.
“근데 누나. 휘혈이는 안 물어보세요?”
빠르게 회복한 능글이는 또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떠보듯 물었다.
“걘 안 와?”
당연히 네 명이 있으니 뒤늦게라도 오겠거늘 하고 넘겼었는데, 아니었나?
“글쎄요?”
“…그게 뭐야?”
애매한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내가 황당해하는 반응을 보이니 한도훈은 자신도 진짜로 모른다는 답을 해 줬다.
“문자로 물어보긴 했는데 답이 안 왔어요. 걘 대체 핸드폰을 왜 가지고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메시지도 보는지 모르겠다니깐요. 봤어도 답장을 잘 안 해 줘요. 차라리 직접 만나서 전하는 게 가장 빠를 지경이에요.”
주절주절 한탄하듯 말하는 한도훈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아니, 뭔가 그러기엔 나한텐 연락을… 아니, 그건 인사 대용인가?
생각해 보니 메시지 함엔 반휘혈의 메시지가 꽤나 쌓였지만 제대로 된 메시지를 주고받은 기억이 없었다. 아니, 그건 주고받은 축에도 못 끼어들었다.
“누나는 휘혈이랑 연락해요?”
“아니. 안 하는데.”
때마침 한도훈이 궁금했는지 내게 물어 왔다.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해 주자 녀석은 놀랍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럼 왜 전화번호 가져간 거래요?”
“낸들 아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스트레칭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그럼 누나는 연락 안 해요?”
“굳이 내가 할 필요 있나…. 귀찮아.”
자꾸 물어 오는 질문에 점점 시큰둥해지자 한도훈은 오히려 신기하단 듯이 나를 바라봤다.
“누나 진짜… 관심 없나 보네요.”
“관심 없다니까….”
굳이 관심이 있다면, 그 녀석이 남주일까 아닐까 정도? 그 정도의 흥미는 나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남주라면 여주와 얼마나 세기의 사랑을 펼칠지에 대한 거라든가, 서브남주라면 얼마나 남주와 치열한 갈등을 펼칠까, 라든가….
‘아. 차였을 때 그 녀석도 상처받을지 좀 궁금하긴 하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도 안 나올 것같이 차갑고 무뚝뚝한 녀석이 과연 세상 무너질 듯 괴로워할지는 궁금하긴 했다.
“이제 대충 궁금한 거 끝났지? 나 운동 좀 하게 절로 가라.”
내가 훠이훠이 손을 내젓자 한도훈은 뚱하니 입을 내밀었다. 어이구? 저 이쁘장하게 생긴 건 알아 가지고 저런 표정도 짓나? 나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녀석의 등을 세차게 쳤다.
팡!
“견학 왔으면 곱게 견학이나 하고 가. 회원 가입 해 주면 더 좋고.”
“으아아….”
시원하게 쳐 주니 한도훈이 등을 부여잡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한도훈은 뭐라 한마디 하려 입을 열었지만, 내가 한 대 더 칠 기세로 손을 들어 보이자 재빨리 내 곁에서 멀어졌다.
‘엄살은.’
나는 그 모습에 코웃음을 쳐 주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 문득, 연락이 없다던 반휘혈이 생각났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폰을 들어 툭툭, 키패드를 두들겼다.
[다른 애들은 체육관 왔는데 넌 안 와?]
발신 버튼에서 살짝 망설였지만 금방 마음을 잡고 버튼을 눌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물어보고 싶은 기분이었다. 스스로도 변덕스러운 기분에 민망히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기대하진 말자.”
친구들 연락도 안 주는데 내 연락을 볼까 싶었다. 역시 괜히 보냈나 싶은 기분이 뒤늦게 들었다.
“에휴. 신경 써 봤자 뭐 하냐.”
나는 폰을 저 멀리 던져 두고 샌드백 앞에 섰다.
이거나 차면서 잊어버려야지. 원.
그리고 나는 익숙하게 자세를 잡고 운동에 집중했다.
***
“후…!”
나는 후두둑 떨어지는 땀을 대충 털어 내고 수건으로 닦았다. 으아아, 확실히 움직이고 나니깐 개운했다. 나는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푸는데, 입구 쪽이 조금 시끄러운 게 느껴졌다. 특히 여자애들이.
아까부터 서이수 친구 놈들 때문에 오늘 한층 수선스럽긴 했지만… 아까보다 더 소란스럽다고 할까. 그 이상함에 나도 자연히 문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어?”
“…….”
늘씬하게 빠진 몸. 그리고 모델 수백 번은 뺨을 치고 갈 외모의 주인공이 저기에 서 있었다. 즉, 반휘혈이 왔다는 말이다. 나는 예상치 못한 인물에 놀라워 눈을 크게 뜨는데 이재현도 반휘혈을 발견했는지 다가가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답장 하나 없길래 오늘 안 오는 줄 알았어.”
반휘혈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친구한테도 반응 없는 걸 보니 정말 초지일관적인 놈이었다. 혹시 나한테 답장이 왔나 메시지를 확인하니 도착한 메시지는 하나도 없었다. 이 역시 그다지 놀랍진 않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냥 온 건가? 뭐가 됐든 저 녀석이 여기에 온 게 중요한 거지, 뭐. 나는 대충 납득하며 녀석에게 다가갔다.
“왔어?”
“…….”
내 인사에 반휘혈은 폰을 들더니 여느 날과 같이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응]
…이번엔 ‘안녕.’이 아니네? 게다가 뭔가 대화가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더 말을 건네면 또 메시지로 답해 주려나?’
문득 호기심이 나를 자극했지만, 제 온몸이 땀에 젖었다는 걸 깨달았다. …땀 냄새 맡는 건 싫을 테고 나도 땀 냄새를 풀풀 풍기며 있고 싶진 않아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이수는 저기에 있어. 난 슬슬 간다.”
이제 슬슬 회원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특히, 몇몇은 당장이라도 날 붙잡고 늘어질 것 같아 그 전에 튀고 싶었다.
“어. 벌써 가게요?”
그런데 훈훈한 놈, 이재현이 왠지 아쉽다는 듯 반응을 보였다. …얘랑은 별로 얘기해 보지도 않았는데, 얜 왜 이럴까.
“여기 있어 봤자 땀 냄새밖에 더 나겠냐. 그리고 밥 먹어야 해서.”
하지만, 의문이 든 것과는 별개로 한시라도 이 자리를 뜨고 싶은 게 먼저였다.
“어. 그럼 저희랑 같이 먹어요. 저희도 점심 먹어야 돼요.”
“아니, 괜찮…,”
거절하려는 그때, 지잉-, 하고 핸드폰이 울렸다. 너무 타이밍에 맞게 울리는 알림에 저도 모르게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보낸 발신자와 내용에 동공이 흔들렸다.
[반휘혈 로부터 메시지가 왔습니다.]
[같이 먹어.]
“…….”
나는 시선을 올려 반휘혈을 쳐다봤다. 반휘혈은 나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그 시선에서 압박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그래. 먹자.”
왠지 얼떨떨하긴 했지만 그 반휘혈이 같이 먹자는 기회가 언제 올까 싶어졌다. 아니, 근데 얜 입 놔두고 왜 메시지로 말을 하는 거지? 기이함에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와중에 이재현이 우리 둘을 묘하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반휘혈의 이상한 행동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서로 기묘한 의문에 이상한 적막이 흐르고 있는데, 서이수와 그 친구들도 반휘혈을 발견했는지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어? 휘혈이 언제 왔어?”
“아. 방금 왔어.”
서이수의 물음에 이재현이 대답했다.
“뭐야? 안 올 줄 알았는데. 문자 보긴 봤나 봐??”
한도훈이 신기하단 듯이 반휘혈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여전히 반휘혈은 반응이 없었다. 한도훈은 그런 반휘혈이 익숙한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나를 봤다.
“누나 이제 가게요?”
“…아니, 늬들이랑 밥 먹는다.”
결국 시선의 압박에 져 버린 나는 어쩐지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답해 줬다.
“아, 진짜요??”
하지만, 그런 내 기분과는 달리 한도훈은 활짝 웃으며 제 말을 반겼다.
‘…얜 대체 왜 나한테 관심 있는 거지?’
그 웃는 얼굴을 보자니 얼떨떨함과 의문이 찾아왔다. 내가 대체 뭘 했다고? 딱히 한 건 없지 않나? 고개를 갸웃하다가 결국 어깨를 으쓱이며 의문을 떨쳐 냈다.
“난 씻고 올 테니까 먹을 거 정해 놔.”
“네에~.”
한도훈이 성실히 답해 주는 걸 나는 녀석을 기묘하게 바라보다 자리를 떠났다. 대답 하나는 참 잘해 주는구나. 옆에 있는 친구와 참 비교가 될 정도로 싹싹한 녀석이었다. 여전히 능글거리는 느낌이 있지만.
‘쟤가 이짱…이랬나?’
아직도 오글거리는 명칭이었지만… 순위가 하나 차이인데, 정말 극과 극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한도훈이 밝은 갈색 머리라 그런지 외형도 대비되는 것 같았다. 물론 외모는 반휘혈을 못 따라갔지만… 뭐, 예쁘긴 예쁘니깐.
나는 샤워실에 들어가기 앞서 몰려 있는 녀석들을 흘끗 보았다. 각기의 개성을 가졌지만 그만큼 매력이 있는 아이들이 체육관 문 앞에 모여 있었다.
‘으음…. 하지만, 역시 2퍼센트 부족해. 얼굴이라든가, 성격이라든가.’
그들은 내가 알고 있던 인소 사대천왕으로 유명하기엔 조금 애매했다. 잘생기긴 했지만 눈에 확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야 될까? 거기에 성격도 개성적인 편이긴 하지만, 또래의 평범한 아이들이란 인상이 강했다. 무엇보다 쟤네들 또래 중에 차기 사대천왕으로 유명한 애들이 있던 걸로 기억했다.
‘…누군진 모르지만.’
분명 저놈들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쟤네들이 차기 사대천왕 후보가 아니란 말은 아니었다. 요즘 저 녀석들 학년 중에 사대천왕 후보가 여럿 등장해서 요즘 내 또래들의 치열한 논쟁거리였다. 동쪽의 도방…, 서쪽의 강해…. 과연 차기 사대천왕은 누구인가…. 순위 변동이 어쨌네…. 등등 대충 이런 느낌으로. 내가 이걸 어떻게 아냐면… 그냥 반에만 들어가면 듣기 싫어도 이런 얘기가 늘 오간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엔 매일같이 반사적인 거부감에 얼굴을 찌푸리고 들어갔지만 2년이나 지나고 저 녀석들까지 알고 나니 이제는 뻔뻔한 얼굴로 반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임이 틀림없었다.
사실 서이수 찾으러 가는 것도 이런 루트를 통해서 할 수 있는 거였다. 유독 일진에 관심이 많은 녀석이 반에 한 명씩은 있었기 때문에 그 소문을 타고 알음알음 서이수 멱살 잡으러 가기도 쉬웠다.
‘…근데, 대체 그런 정보는 어디서 얻는 걸까.’
하지만, 그다지 알고 싶진 않았다. 이 이상 발을 디뎌서 자신이 지금 처한 현실에 타격을 입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뭐… 어쨌든, 대충 이런 논쟁거리를 거의 매일같이 겪다 보니 자연스레 드는 생각이 있었다. 막연한 추측뿐이지만, 저 녀석들이 차기 사대천왕으로 올라 고등학생이 되면 메인 스토리가 시작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그만큼 저 녀석들은 요 몇 년 동안 가장 핫한 이슈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때부턴 나는 방관자로서 저 녀석들을 지켜보게 될까, 아니면…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뒷목을 주물렀다.
‘그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지 뭐.’
거의 반년 좀 넘게 남긴 했지만…. 괜찮겠지? 나는 속 편한 생각을 하며 샤워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