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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소에 갇혀버렸다 !-18화 (18/306)

18. 체육관 문은 언제든 열려 있단다 (2)

***

그렇게 우리는 주말마다 시시콜콜히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한도훈과 이재현이랑 부쩍 친해져 연락처까지 나누었다. 친해지고 나서 알게 된 건, 그들은 원래 운동이나 싸움에 그렇게 관심 있는 애들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잘 싸우는가 물으니, 한도훈은 집안에서 이미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금수저의 냄새를 맡았지만 나는 모른 척 넘어갔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오히려 이재현이었다. 이재현은 원래 싸움에는 관심도 없었는데 자신에게 시비 트는 애들을 상대하다 보니 어쩌다 이렇게 되었다고 알려 줬다.

‘진짜 천재가 눈앞에 있었구나.’

나는 그 말에 순수한 감탄을 하며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그러고 나서 가볍지만 나름 진지하게 운동해 볼 생각 없냐는 말도 건네자 이재현은 부쩍 쑥스러워했다. 그래도 하겠다는 말은 해 주지 않았지만.

‘어, 잠깐. 그렇다면 서이수는?’

‘서이수 쟤는 운동도 하는 애가 이런 일반인한테 진 거라고…? 저, 저 한심한…!!!’

문득 든 깨달음에 나는 열심히 일하고 있던 서이수를 째려봤다. 서이수는 내 시선도 눈치 못 채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 근데 이수가 저보다 강할 거예요.”

“응?”

그때, 이재현이 내 시선이 향한 곳이 어딘지 알았는지 내 속마음을 간파하곤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나는 그 말에 뜨끔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부연 설명을 부탁했다.

“무슨 뜻이야?”

“서열이란 게 보통은 윗서열을 꺾으면 차지하게 되잖아요. 이수는 저나 다른 애들한테 서열 싸움을 안 걸어서 그대로인 거예요. 만약 걸었으면 제가 오짱이었을걸요.”

“그런 거야? 의외네?”

서이수 저 녀석, 꽤나 서열에 집착하는 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사실에 놀라워하니 이재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궁금해서 물어봤었는데요.”

후후. 재현이가 그때를 떠올렸는지 기분 좋게 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누나가 친구랑은 싸우지 말라고 해서 안 걸었다고 하더라구요.”

나는 그 말에 서이수를 봤다. 이번에 온 새로운 회원들을 지도해 주는 서이수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것을 말없이 보다가 잔잔히 웃었다.

‘짜식, 내 말 무시하는 것 같더니만…’

꽤나 자신의 말을 신경 써 준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 오늘따라 서이수가 유난히 예뻐 보였다. 그렇게 흐뭇이 바라보는데, 서이수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나를 보더니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곤 이쪽으로 다가왔다.

“뭐야?”

뭔 일인가 싶어 바라보는데, 서이수가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뼈 빠지게 일하는데, 그렇게 놀고 싶어?!”

아, 난 또 뭐라고. 나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이재현과 한도훈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너희들은 여기서 집 안 멀어? 매주 오기 안 힘들어?”

“아, 전 기사님이 태워다 줘서 괜찮아요.”

“저도 그다지 멀진 않아요.”

음. 아주 자연스레 한도훈의 금수저 어필을 들은 것 같았지만, 나는 자연스레 넘어갔다. 이제 와서 놀라기도 좀 그렇기도 했다.

“이익…! 무시하지 마! 너도 서씨 집안이면 좀 도와!”

우리들이 완전히 무시하자 서이수가 얼굴을 벌겋게 달아오르며 성질을 냈다. 나는 그 시끄러운 고함에 한 쪽 귀를 막으며 시큰둥하니 말했다.

“아, 난 체육관 물려받을 생각 전혀 없어서. 너 다 가져.”

“그럼 회비 내!!”

“어휴, 체육관에 모기가 왜 이렇게 많나 몰라.”

여름이라 그런가…. 나는 능청스레 철썩! 하고 서이수의 등짝을 후려쳤다.

“악-!!! 누나, 너 지금 나보고 모기라 한 거지?!”

“음? 무슨 소리야. 난 네 등짝에 모기가 있어서 그런 건데…. 그치? 모기 있었지?”

“네. 있었어요. 그것도 왕 큰 모기.”

“하하하….”

한도훈이 뻔뻔스레 내 말에 호응해 줬고, 이재현은 슬쩍 서이수의 시선을 피했다. 누가 봐도 서이수의 편이 없는 이 상황에 녀석은 울분이 맺혔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화를 냈다.

“아, 그럼 얼쩡거리지 말고 나가! 운동도 다 했잖아! 시험 기간이라며! 공부나 하러 가!”

나는 그 말에 움찔, 몸을 떨며 참혹히 얼굴을 가라앉히고 녀석의 목에 팔을 걸었다.

“너 이 새끼… 겨우 잊고 있었는데… 현실을 끄집어내 줘서 고오맙다아….”

“커, 커헉…. 하, 항복…! 항복…!!”

서이수가 재빠르게 내 팔에 탭을 걸었다. 나는 화풀이로 몇 초간 좀 더 조이다가 풀어 줬다. 그러자 서이수는 날이 선 고양이처럼 거리를 벌리곤 경계 어린 기색으로 나를 노려봤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도 시험이네.”

“…이제 알았어?”

한도훈이 우리들을 재밌다는 듯이 쳐다보다 말고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불쑥 말했다. 그러자 이재현이 떨떠름한 얼굴로 그의 말을 대꾸했다.

“으음~. 뭐, 상관없잖아? 나야 뭐 늘 똑같으니까.”

“…….”

이재현은 한도훈의 말에 더 떫은 얼굴이 되었다. 평소 자주 웃어 주는 녀석이 저렇게 표정을 굳히니 여간 낯선 게 아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슬쩍 끼어들어 물었다.

“뭐야, 뭔데? 한도훈 저 녀석 설마 공부도 안 하면서 전교 1등, 뭐 이런 거야?”

설마 여기에서 또 인소 클리셰가…?

“에이, 그 정돈 아니에요~.”

내 말에 한도훈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여전히 이재현의 얼굴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석연찮은 느낌에 내가 추가 설명을 요구하듯 그들을 바라보는데, 기다리던 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걔 전교 2등이야.”

서이수는 똥 씹은 얼굴로 슬쩍 다가와 한도훈을 못마땅한 듯이 바라보았다. 잠깐 사이에 기분이 풀렸나 싶었지만 여전히 내겐 거리를 벌리고 있어 그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거기에 신경 쓰지 않고 그 뒤에 들려온 진실에 같이 똥 씹은 얼굴로 한도훈을 바라보았다.

“따로 공부도 안 해.”

“…….”

“수업 시간에만 집중하면 다 그 정돈 하지 않나요?”

한도훈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이 재수 없어 보이는 건 기분 탓이 아닐 거다.

“도훈이 너… 나랑 거리 좀 두자.”

아무래도 너와 친해지는 건 시기상조였던 모양이다.

“네…?! 왜요?! 아니, 근데 얜 전교 1등인데요!!”

한도훈이 내 말에 정색하더니 저만 당할 순 없다고 생각했는지 옆에 있던 이재현을 끌어들였다.

“걘 원래도 범생이잖아.”

“재현이는 납득한다.”

저놈도 전교 1등이란 게 놀랍긴 했지만, 이재현이라면 어째선지 납득이 됐다. 오히려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고, 저 소악마 능글이 놈한테 전교 1등 자리를 놓쳐 주지 않아서 정말 대견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이재현에게 따뜻하게 웃어 주며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재현아,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공부하느라 힘들지? 초콜릿 사 줄까?”

“아, 그럼 저 cba초콜릿으로 사 주세요.”

이재현이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내 말에 반응했다. 나도 같이 웃어 주며 문을 가리켰다.

“앗! 차별 반대! 저도 사 줘요!”

“가자. 누나가 편의점 털어 줄게.”

“감사합니다.”

“아, 난 오면서 콜라.”

“오키.”

“나만 무시하는 게 어딨어요! 제가 이렇게 잘난 걸 어떡하란 말이에요!”

어휴, 끝까지 재수 없는 자식 같으니. 한도훈을 제외한 우리는 모두 짜게 식은 얼굴을 지었으나, 한도훈에게 말을 걸진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나와 이재현은 끝끝내 한도훈의 말을 무시하며 나가 버렸다.

“이재현! 너 배신이야! 아, 누나!!”

“하하, 재현아. 날씨 참 덥다. 그치?”

“빨리 편의점에나 가죠.”

우리는 뒤에서 왁왁거리는 걸 귓등으로 들으며 하하 호호 얘기를 주고받았다.

“유치하게 자꾸 이럴래…?!”

그리고 이것은 한도훈이 완전히 삐질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

삐진 한도훈을 겨우 달랜 주말이 지났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반휘혈은 또 그날 이후 체육관에 좀체 들리지 않았다. 한도훈이 옆에서 와 달라고 계속 말했다고 했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날 온 건 말 그대로 변덕이었던 건가?’

좀체 알 수 없는 속내에 갸웃하며 녀석을 마주하지 않은지 몇 주가 지날 때였다.

“어…, 음….”

“…….”

나는 또 우연히 반휘혈과 만났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입이 잘 떨어지질 않았다.

“휘혈아, 저 사람 누구야?”

왜냐면, 모르는 여자가 반휘혈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키스할 것처럼 말이다. 굉장히 민망하고 무안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악의 타이밍에 골목길에 들어선 나는 속으로 서이수를 욕했다.

평소라면 이 길은 지나가지도 않았을 텐데, 하필 서이수가 오늘 아파 가지곤 단골 분식집의 어묵이 먹고 싶다고 할 게 뭐람. 아니, 뭔가 음식이 땡긴다는 점에서 꾀병 아닌가? 싶었지만 엄마의 등쌀에 밀려 터덜터덜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러다 지름길이 보였다. 이 길은 좀 어둑한 편이었다. 평소라면 절대 안 갔겠지만 오늘따라 그냥 서둘러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게다가 지금은 날이 훤해 괜찮겠지 싶어 후딱 갔다 오자는 생각에 들어갔다가 본 게 이 장면이었다.

나는 이 낯간지럽고도 민망한 장면에서 어서 속히 사라지고 싶어졌다. 나이는 먹을 대로 먹었지만 이제껏 연애 한번 해 보지 못한 숙맥 중의 숙맥이 바로 나였다. 그래서 서둘러 사라지려다, 반휘혈이 빠른 속도로 스마트폰을 두드리는 걸 목격했다. 그러자 서둘러 뒷걸음질 치던 발이 무색하게도 급히 멈춰 섰다.

곧 단조로운 진동이 내 주머니에서 울렸다.

[반휘혈 로부터 메시지가 왔습니다.]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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