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현실은 상상보다 더한 법이다 (1)
그 메시지에 눈을 끔뻑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왜 기다리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만 없으면 그 예쁘장한 여자애랑 입술도 비비고 그럴 텐데…? 완전히 거슬린 돌멩이 같은 입장인 자신을 왜 기다리라고 하는 걸까? 이해가 되질 않아 반휘혈을 쳐다보자 반휘혈은 어느새 여자애를 떼어 낸 후였다. 그러자 여자애가 반휘혈을 붙잡았다.
“기다려! 저 여잔 무슨 사이야?!”
“…….”
반휘혈은 여자애의 말에 아무 말 없이 차갑게 내려다보며 냉정히 팔을 뿌리쳤다. 하지만, 여자애는 신경을 못 쓴 건지 안 쓴 건지 다시 한번 그 팔을 붙잡았다.
“…뭐, 상관없어. 여자친구가 아니어도 괜찮아. 응? 네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뭐든 할게.”
몸을 착 밀착한 상태로 은근슬쩍 가슴까지 비벼 오는 게… 보통이 아니었다. 그 몸짓으로 전하고자 하는 뜻은 멀찍이 있던 나라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민망한 광경에 결국 눈을 돌렸다.
‘어유, 요즘 애들 발랑 까진 것 봐. 어우, 망측해라.’
슬쩍 달아오른 볼을 느끼며 힐끗힐끗 보면서 조용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그걸 눈치챈 반휘혈은 제게 딱 강렬히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그 시선과 정면으로 다시 마주친 나는 저절로 멈춰 서 버리고 말았다.
“…….”
어디 갈 생각하지 말라는 압박까지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평소라면 읽기 힘든 그의 의중 때문일까, 나는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이 민망한 상황에 쉽사리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런 내 갈등을 반휘혈은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녀석은 붙잡힌 팔을 다시 거칠게 떼어 냈다. 그 모습은 마치 더러운 걸 묻은 것만치 경멸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번엔 여자애도 그 거절을 느꼈나 보다. 여자애는 안색을 굳힌 채 반휘혈을 올려 보고 있었다. 반휘혈은 여자애를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다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 어어??”
그리고 녀석은 내 팔목을 낚아채곤 그 골목을 빠져나왔다. 뭐라 할 새도 없이 잡아끄는 그 손놀림엔 깊은 짜증이 배어 있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얼떨떨하니 그 손길에 끌려갈 따름이었다.
***
얼마나 걸었을까, 인적이 없는 작은 공원이 나오자 녀석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 긴 다리가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걸 뛰다시피 겨우겨우 따라잡던 나는 갑자기 멈춰 선 그 등에 하마터면 코를 박을 뻔했다.
“으왓! …뭐, 뭐야, 무슨 일이야…?”
나는 평소완 다른 녀석의 분위기에 조심스레 물었다. 팔목이 잡힌 걸 항의할 생각도 쏙 들어갔다.
그러나 반휘혈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랑은 달리 무표정한 얼굴이 아니었다. 인상이 살풋 구겨져 있는 게 누가 봐도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그런 낯선 반휘혈의 모습에 나는 비어 있는 손으로 뒷목을 문질렀다.
‘뭔 일 있었나?’
그냥 평소처럼 여자가 치근덕거리는 것밖에 못 봐서 잘 모르겠다. 설마 여자가 해코지라도 했나…? 상상은 안 갔지만 나름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나는 난처히 녀석을 바라보다가 주위를 둘러보곤 잡힌 손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녀석의 어두운 시선이 나를 향했다.
“여기에 서 있기도 뭐하니깐, 앉을래?”
나는 녀석을 살살 잡아끌며 공원 벤치로 인도했다. 반휘혈은 별 반항 없이 내가 잡아 끄는 대로 따라왔다.
‘뭐지, 왜 이렇게 순순하지?’
갈수록 모르겠다. 오늘 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얘가 이렇게 순순하면서도 저기압이지? 이렇게까지 기분이 나쁜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저절로 눈이 데록데록 굴려졌다. 대체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사람 위로하는 건 서툰데, 큰일이었다. 게다가 얘는 한도훈이나 이재현처럼 살가운 성격도 못되었다.
“음…, 아까 그 여자애 때문에 그래?”
방금 했던 추측을 입에 올려 봤지만, 반휘혈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건 맞다는 걸까, 틀리다는 걸까. 좀체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
“어…, 그 여자애가 무슨 짓 했어? 막 네가 싫다는데 덤벼든 거야?”
반휘혈은 또 여전히 침묵했다. 나는 그 답답함에 작게 속을 앓다가 아, 하고 번뜩 드는 생각이 있었다.
인소 남주 또는 서브남주의 고질병은 무엇이다? 가정사! 그놈의 가정사가 있지 않던가! 게다가 서이수도 얘 가정사가 좀체 좋질 못하다는 뉘앙스를 내비치기도 했고!
‘…근데, 그걸 내가 함부로 캐도 되나…? 좀 그렇지 않나…?’
나는 갈등했다. 이 문제를 과연 자신이 물어도 되는 것인가, 아닌가. 이걸 물어보고 맞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만약, 마아아안약! 얘가 날 좋아하기라도 한다면? 이 인소 세계관은 어떻게 되는 거야? 진짜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런 빙의, 환생 스토리를 너무 많이 봐서 아니라고 확신을 못 하겠다.
정말 스토리는 하나도 모르지만 소설 내용에 영향을 주고 싶진 않았다. 난 자고로 눈에 띄는 것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웬만하면 거의 방관만 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서이수 뒤치다꺼리하다 보니 그것도 반 이상은 물 건너간 게 보여서 남몰래 피눈물을 흘리는 중이었다.
요즘 내 위치는 등장도 안 할 엑스트라에서 이름은 안 나오는 엑스트라쯤으로 올라왔을 것 같은 그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만일, 반휘혈이 남주라면 이름 나오는 엑스트라로 급부상할 것 같지만… 서브남주일 경우엔 그 언저리에 머무르는 이름 없는 엑스트라. 딱 그 위치일 것 같았다.
물론, 메인 스토리가 진행되어야 정확히 감이 잡히겠지만… 점점 이 소설 내용에 나도 발을 들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빙의된 시점부터 그른 건가? 이미 피할 수 없는 강을 건넌 건 설마 2년 전부터…?’
나는 2년 만에 찾아온 깨달음에 벼락 맞은 충격을 먹었다. 세상에, 그동안은 서이수가 범죄만 저지르지 않게 하기 위해 물살뿐인 이 몸뚱어리에 근육을 끄집어 넣어, 서이수 새끼 사람 구실 하게 만들기 위해 열심히 산 것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부분은 전혀 의식하지 못했었다.
아니, 아니다. 이미 엑스트라 오브 엑스트라일 법한 서이수를 사람 만들어 놓은 게 문제인 건가? 그리고 그 위치가 남주 또는 서브남주일지도 모를 반휘혈과 같은 그룹으로 놓게 만들고?
‘망했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지? 평소엔 전혀 생각도 안 했던 부분들이 쏙쏙 생각나고 꼬리 물듯 답이 펑펑 나왔다. 그것도 2년 만에. 하하. 역시 나는 돌대가리가 맞나 보다.
뒤늦은 낭패감에 나는 절망했다. 왠지 영혼이 빠져나가 해탈한 기분도 들었다. 아, 몰라. 이왕 이렇게 된 거 남주 또는 서브남주일 것 같은 얘 가정사 들어 봐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이름도 안 나올 엑스트라에서 스쳐 지나가듯 이름 나오는 엑스트라로 격상할 뿐인걸? 하하하…. 젠장.
나는 속으로 욕을 되뇌며 체념했다. 이젠 될 대로 되란 심정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옆에서 우울한 기운을 뿜어내는 녀석 기 좀 살려 줘야겠다.
한숨을 내쉬고 싶은 걸 참다가 자연스레 내려간 시선 덕에 아직도 팔이 붙잡혔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것을 떼어 낼까 싶었지만 꽉 붙들린 힘이 느껴져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에겐 사람의 온기가 필요한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난 조용히 심호흡을 한 뒤,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혹시, 가족 일…이라든가, 그런 거야?”
조심스레 묻자 그간 땅에 박혀 있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예상치 못한 내 말에 놀랐는지 그 눈은 커다랗게 뜨여져 있었다. 하지만, 곧 그 눈은 다시 침잠하듯 가라앉았다. 그것은 얼핏 공허해 보였지만, 그 안엔 수많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난 그를 통해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눈치챘다.
“…말할 상대가 필요하다면, 들어 줄게.”
긴장했던 것과 달리 내 목소리는 꽤나 덤덤히 흘러나왔다. 반휘혈은 나를 말없이 바라보았고, 나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너는,”
얼마쯤 지났을까, 길고 긴 침묵 끝에 간신히 입이 열렸다. 여전히 변성기를 지나는 것 같은 소리였지만 지난번보다 더 낮아진 목소리였다.
“왜 서이수한테 그렇게까지 해 주는 거야?”
“……?”
갑자기 서이수 이름은 왜 나오는 건데…? 궁금증이 치밀어 당장이라도 묻고 싶었지만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이런 내 노력에 응하듯 반휘혈이 계속 입을 열었다.
“이해가 되질 않아. 너도, 서이수도.”
반휘혈은 잡고 있던 내 팔목을 놓고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풀린 손목은 이제야 피가 도는 것처럼 저릿한 감각이 들었다. 왠지 이 녀석의 감정이 손목께로 타고 올라오는 기분이라 조심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평범한 가족이란 건 다 그런 거야?”
그 가려진 얼굴엔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까,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것은 그 감싼 얼굴 사이로 나온 목소리가 비통에 젖어 있기 때문이었을까.
“왜, 왜, 나는…, 너희는…”
차마 정리되지 못한 감정이 익숙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방황을 계속 말없이 지켜봤다.
“바보 같아. 전부, 전부 바보 같아.”
그는 제 머리를 더 숙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왜 없는 거야….”
그리 중얼거린 그의 등은 평소 커다랗게 느껴지기만 하던 것과 상반되게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반휘혈은 상체를 숙인 채 여전히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겨우 끄집어낸 감정을 억지로 삼키듯이, 그렇게 웅크리고 있었다.
“…그럴지도.”
그런 그 고통을 차마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나는 억지로 자신의 감정을 감내하는 이 어린 남자아이를 위해 무슨 말이 필요할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바보 같을지도 모르겠네. 아니, 바보 맞네.”
자신의 솔직한 감정뿐이었다.
“적어도 나는 바보가 맞는 것 같아.”
난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해가 저물어 점점 어두워지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