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현실은 상상보다 더한 법이다 (3)
“…아! 뭐! 좋아하는 거야 나중에 생길 수도 있고! 당장 없을 수도 있는 거지!”
새삼스럽지만 삭막한 이 녀석의 삶의 일부를 본 것 같아 나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이 살았다니. 음식에 관한 주제였지만 다른 주제도 별반 다를 바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눈을 데록데록 굴리다가 지잉-, 하고 울리는 진동에 폰을 확인했다. 언제 오냐는 서이수의 재촉 문자였다. 나는 그것을 보다가 불현듯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근데 너, 왜 인사를 문자로 하는 거야?”
지금 보니 말을 아주 안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잘만 말할 거면서 왜 이제껏 말도 없이 메시지만 줄기차게 보냈는지 모를 일이었다.
“…….”
그런데, 아까부터 잘만 말하던 녀석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나는 그 모습에 눈을 가늘게 뜨며 녀석을 추궁했다.
“뭐야, 뭔데? 왜 굳이 메시지로 보낸 건데? 내가 인사해 달라고 해서? 근데, 그건 대충 제스처로 해도 됐잖아. 왜? 어?”
반휘혈은 나를 앞지를 모양인지 빠른 걸음으로 쑥쑥 걸어갔지만, 나는 녀석을 붙잡았다. 멀리 도망 못 가게 팔을 붙잡고 매달리니 반휘혈도 처음엔 버티다가 한숨을 내쉬며 포기했다. 승리의 미소를 지어 주자 녀석은 못마땅한 듯이 나를 보다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
“응?”
“목소리, 듣기 싫잖아.”
“…….”
나는 그 말에 잠시 벙쪘다가 곧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길은 이미 어두워졌지만 그 말을 하는 녀석의 얼굴이 붉어진 게 보이는 것 같았다.
“푸흣, 큭, 으하하하!! 그게 뭐야! 인사는 해 주고 싶은데, 남들 앞에서 목소리는 내뱉긴 싫었다 이거야? 하하하하!!”
설마 이런 귀여운 생각을 했을 줄이야! 나는 끅끅거리며 배를 부여잡았다. 아, 너무 웃어서 눈물 나올 것 같아. 세상에. 이 자식, 영 못 써먹을 커뮤니케이션 장애일 줄 알았는데, 이런 남모를 고충을 겪고 있었구만? 나는 히죽히죽 웃으며 녀석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그럼 왜 나한텐 그렇게 편하게 말하는데? 오히려 네 친구들보다 내가 더 많이 본 것 같다? 내 기분 탓이냐?”
그간 한도훈에게 들은 말로는 학교에서 늘 보는데도 목소리 듣기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라고 들었다. 그런 걸로 따지면, 자신은 단둘이 있을 때마다 거의 들을 수 있었으니, 꽤나 많지 않은가.
“…그냥,”
반휘혈이 잠시 머뭇거리다 작게 중얼거렸다.
“상관없을 것 같아서.”
그리고 피했던 시선을 마주 보며 말을 더 이었다.
“나보단 동생을 더 신경 쓰는 게 보였으니까.”
그래서 내 목소리 따윈 관심 없을 것 같았어. 담담히 이어지는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말은 맞는 말도, 틀린 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서이수에게 정신 팔려서 이 녀석에게 신경을 안 쓰고 있던 게 맞긴 하다. 서이수 그 자식은 언제 어디서 사고 칠지 모를 시한폭탄이었기 때문에 내 신경이 거의 그쪽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이 녀석의 목소리에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점도 얼추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목소리에 관심이 없던 건 아니었다. 너무 말이 없어 말하는 거 자체가 희소한 게 문제였다. 그래서 반휘혈이 입을 열 때 자연스레 내 눈동자는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래서 남들 다 걸리는 변성기를 굳이 신경 쓴 적은 없었지만, 이 녀석만은 예외였다. 지난날의 나와 비교해 보면 세심하게 짚고 넘어갈 정도로, 나는 나름 이 녀석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 그렇구나.”
하지만, 이 말을 하면 내 앞에서 다신 말을 안 할 것 같아 나는 침묵을 택하기로 했다. 침묵은 금이라고 한 사람이 누구냐. 아주 뼈에 깊이 새길 명언입니다. 선생님.
“그, 그럼 단둘이 있을 땐 편하게 말해. 일일이 타자 치기도 귀찮잖아.”
그리고 나는 잠시 말을 끊고 반휘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반휘혈도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힘들 때도 편하게 연락해. 들어 줄 테니까.”
딱히 뭘 해결해 주진 못하겠지만, 때론 고민을 들어 줄 청자는 아주 소중한 법이었다. 나는 잠시 흔들리는 녀석의 눈동자에 미소를 담고 말했다.
“그러니까 너도 내가 힘들 때 내 고민 들어 주는 거야. 어때?”
혹여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조건도 걸어 주었다. 진짜 말할 일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말이다.
반휘혈은 가만히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탐색하는 듯한 그 눈길이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그의 눈과 입이 작게 호선을 그렸다.
“…응.”
작게 끄덕이는 그 몸짓을 눈치챈 건 조금 나중이었다. 나는 그가 보여 준 자그마한 미소에 잠시 넋을 놓았다.
처음 봤다. 반휘혈이 미소를 짓는 것을. 나는 잠시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곧 이상해하는 반휘혈의 시선을 알아차리곤 정신을 차렸다.
“너… 웃을 줄도 아는구나?”
그리고 나는 짐짓 심각하게 감상을 늘어놓았다. 막상 말해 놓고도 이상한 헛소리를 했다는 걸 자각했다. 당연히 반휘혈이 코웃음을 칠 거라 예상했건만 웬걸. 반휘혈은 오히려 내 말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제 입가를 슥 만져 댔다.
마치 자신이 웃었는지 몰랐다는 것처럼.
제 입매를 잠시 동안 더듬던 반휘혈은 돌연 발걸음을 빨리했다. 마치 도망가는 것 같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나는 뒤늦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같이 가! 기다려!”
그러다 잠시 한눈판 사이에 쑥쑥 멀어져 가는 그 등을 발견하곤 뜀박질로 서둘러 쫓아갔다.
***
말은 그다지 많진 않았지만 나쁘지 않았던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귀가를 위해 다시 길을 걷던 중이었다.
“음….”
막상 헤어질 시간이 되니 도통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왠지 저 녀석을 그 집에 보내는 게 달갑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면 반휘혈은 또 그 사람들을 만나야겠지. 그리고 또 괴로워할 거란 생각에 좀체 진정되지 않아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느려졌다.
“저기, 휘혈아.”
반휘혈이 나를 돌아봤다. 하지만, 나는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말 해도 될까? 나 너무 오지랖 부리는 거 아냐?’
입을 열기 전까지 수차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이런 소리 함부로 하면 안 되는데, 그런데도 자꾸만 공원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 자꾸만 마음이 약해졌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그 공허했던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래, 역시 말해 보자.’
결심을 다진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
녀석의 눈이 수상쩍게 가늘어졌다.
“아, 아니! 오해하진 말고! 그냥, 네가 집에 들어가기 싫어할 것 같아서…. 정 들어가기 싫으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잠은 이수 방에서 자면 되니깐.”
그 시선에 황급히 변명했다. 반휘혈은 내 말을 듣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꼴깍, 긴장하며 답을 기다리길 잠시. 그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 의외의 대답에 나는 좀 놀랐다. 당장이라도 집을 나오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그런 내 생각을 틀렸다는 걸 알려 주듯 반휘혈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괜찮아. 아직은.”
나는 먼저 앞서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녀석 몰래 작게 감탄했다.
‘생각보다 성숙하네.’
충분히 도망가고 싶을 텐데도 도망가지 않는 그 뒷모습이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서이수 그 자식이 반휘혈의 반의반이라도 닮으면 참 좋겠다, 진짜.’
같은 나이인데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그 덜떨어진 놈을 생각하니 이가 절로 으드득 갈렸다.
‘어, 근데 뭐 빼먹은 게 있던 거 같은데?’
나는 불현듯 느껴지는 기시감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질 않아 어깨를 으쓱이며 털어 내곤 앞서가는 녀석을 서둘러 따라잡았다.
***
“다녀왔습니다~.”
“이나야, 늦었네? 무슨 일 있었어? 딱 연락하려고 할 때 왔네.”
반휘혈과 헤어진 후 집으로 들어오자 엄마가 마중 나왔다. 나는 친구를 잠깐 만나서 늦었다고 설명하는데, 방에서 서이수가 나와선 내 행색을 보더니 인상을 팍 찌푸렸다.
“뭐야, 어묵은?”
목감기에 걸려선지 목소리가 사정없이 긁혀서 나왔다. 나는 그제야 까먹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아.”
“아? 아아??? 코, 콜록, 콜록!!”
서이수는 황당함에 소리를 지르다가 기침을 토해 냈다. 나는 그 기침 소리를 들으며 난처히 뒷목을 주물렀다.
“미안, 미안. 다음엔 꼭 사 올게.”
나는 성질을 부리는 서이수를 설렁설렁 달래며 방으로 쏙 들어갔다. 문밖에서 서이수가 뭐라 뭐라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핸드폰을 열어 문자를 보냈다.
[잘 들어갔어? 괜찮아?]
보내자마자 몇 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응.]
나는 그 말에 가볍게 안도하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괜찮다니 다행이다…. 하지만, 그래도 불안은 채 가시지 않아 재빨리 다시 키패드를 두들겼다.
[무슨 일 있음 연락 줘 알았지???]
[응.]
이번에도 답장은 금방 왔다. 순 짧은 대답들뿐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그 대답들을 훑으며 한숨을 푹 내쉬니 피로가 밀려왔다.
나는 눈을 끔뻑이다가 더는 문자가 안 온다는 걸 깨달았다. 아까 울어서 그럴까, 어쩐지 눈이 뻐근한 게 잠이 몰려들었다. 점점 감기는 눈꺼풀이 느껴지자 나는 졸린 정신을 겨우 붙잡으며 느릿느릿한 손을 움직였다.
[잘ㅈ ㅏ]
겨우겨우 메시지를 만들고 나서야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던 눈꺼풀이 닫혔다. 그리고 잠겨진 수마 너머로 잠시 후, 조금 뒤늦게 핸드폰이 울리고 새로운 내용이 열람되었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