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프로가 아닌 철 밥통을 노린다 (2)
“미안한데 역시 안 되겠다. …아빠, 관장님한텐 비밀로 해 주라.”
기특해서라도 한 번쯤 스파링을 해 주고 싶었지만… 역시 안 되겠다. 아빠가 그렇게 작아진 모습을 보면서 속상해하며 원망하고 싶지도 않았고, 더는 현실에 좌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 녀석이 싫다면서 해 달라고 고집부리면 어떡하지? 얘도 보니깐 호승심 넘치는 것 같던데…. 꼬옥 나랑 붙어 보고 싶다…,’
“네.”
고 한다면, 그럼 어떡…, 응? 어어…?! 뭐라고???
“어…? 방금, 뭐라고??”
“알겠습니다.”
정말 이름만큼 시원스러운 대답이었다. 나는 좀 더 부탁해야 될 줄 알고 걱정했던 것이 무안해졌다. 그간 한도훈에게 시달렸더니 얘도 당연히 좀 귀찮게 굴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왜…,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고… 무엇보다 고집이 더럽게 강한 중학생이 아닌가…. 그런데, 얘는 예외였나 보다.
“어…, 고, 고마워?”
“싫다면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좀 아쉽긴 하네요.“
김시원은 말과는 달리 덤덤한 표정이었다. 내가 얼떨떨하게 보고 있자니, 그는 힐끗 건물 위를 바라보았다.
“이제 들어가 보는 게 어떨까요.”
“어?”
“나올 때 관장님 얼굴 안 좋던데요.”
그 말에 나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글쎄요.”
김시원은 내 의문을 슬쩍 피했다. 굉장히 석연찮은 대답에 의심스레 인상을 찌푸리니 그는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멀어지는 몸에 당황하며 황급히 움직였다.
“뭔데, 뭔데? 아빠가 왜 기분이 안 좋은 건데? 누가 사고 쳤어? 서이수? 아니면 강석현 그 자식?”
대충 짐작 가는 인물을 추리고 있자니 김시원은 잠시 나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침묵하는 그 자세에 왠지 심통이 올라왔지만 어린애를 상대로 성질을 부리기엔 자존심이 상해서 나는 뒤에서 녀석 몰래 입만을 삐죽였다.
‘이 무뚝뚝한 데다 재미없는 녀석 같으니. 기특하다는 거 취소다, 취소. 반휘혈은 그래도 귀여운 맛이라도 있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유치한 생각들을 하며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체육관에 도착해 문을 여니 그 앞에 아빠가 서 있었다.
“뭐 해요? 여기서?”
누가 봐도 수상쩍게 서성이다가 멈칫한 모양새였다. 내가 미심쩍게 바라보니 아빠는 쓱 눈길을 피하며 민망히 웃어 댔다.
“응? 으응…. 아, 아니, 네가 갑자기 이 어두운 밤에 나가길래…. 걱정돼서 나갈까 말까 고민 중이었을 뿐이야. 따, 딱히! 요즘 네가 남자애들이랑 어울려서 걱정되고 뭐 그런 게 아니라! 시원이랑 뭐 그런 사이인가 의심한 것도 아니고! 그냥 요즘 밤길이 어두워서! 어두워서 그런 거야! 이쪽은 골목길이라 치안도 안 좋잖니!”
“…….”
아빠…. 아빠도 어디 가서 연기한다고 하지 마세요.
서이수가 누굴 닮아 연기를 그리 못하는가 싶었더니… 바로 코앞에 있었구나. 나는 그 어색한 몸짓과 말투를 보며 얼굴을 흐렸다. 왜 김시원이 빨리 올라가자고 했는지 알아 버렸다. 그리고 그게 아빠랑 왜 연관이 있는가, 까지 깨달은 나는 낯이 뜨거워졌다.
“정말이라니깐? 어? 아, 근데 이건 그렇게 신경 쓰는 건 아닌데… 이, 이나 너 혹시 나, 나, 나, 남, 자….”
누가 봐도 신경 쓰는 것처럼 긴장한 얼굴이었다. 남들이 봤다면 사람 죽일 듯한 표정이었지만 한 지붕 아래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수 시절 내 코치까지 했으니 사소한 습관 같은 건 다 알고 있었다.
“하아아…. 아니니깐 걱정 마세요.”
“응? 어? 아, 아니라고? 하지만 네 엄마가….”
‘엄마…! 대체 아빠한테 무슨 바람을 불어넣은 거예요!’
나는 지금쯤 막장 드라마를 보며 욕하고 있을 엄마를 떠올리며 속으로 한탄했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아빠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나를 보다 힐끗 김시원을 봤다.
“…얘는 보길 왜 봐요? 아니라니깐요? 얜 이수 친구라 그냥 가볍게 얘기하는 거뿐이에요. 친구 누나, 동생 친구! 딱 거기까지!”
그치? 하고 동조를 얻고자 시선을 보내니 얼떨떨하게 굳어 있던 김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사이 아닙니다.”
그런데 말하는 모습이 지나치게 단호했다. 게다가 꽤 긴장했는지 몸이 굳어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김시원이 아빠에게 나와의 관계를 떠보며 한마디 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정신 교육까지도. 아빠가 그런 건 참 잘하긴 했다. 특히, 철없는 남자애들의 지도를 잘했다. 그래서 한때 중2병을 달고 사는 자식들의 부모님들께 한 인기 얻은 적이 있었더랬다. …결국 다 말아 먹어 버렸지만.
‘…근데, 왜 자기 아들은 그렇게 못 하지.’
갑자기 울컥 억울함이 들었다. 그러나 원체 자기 자식들에게 약한 사람이란 걸 떠올리곤 체념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이나야? 아빠는 네가 아직 남자를 사귀는 게 이르다고….”
“아! 안 만난다니까요.”
나는 아직까지 끈질기게 구는 아빠의 말을 단박에 잘라 버렸다.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결국 30이 다 되도록 남자친구 한 명도 만들어 보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야 만들 수 있을 리가… 무엇보다 내 주위 인간들이 너무 어렸다. 즉, 남자로 보이질 않는단 소리다.
‘내가 양심이 있지…. 미성년자를 건드리는 건 아니야…. 진짜 아니야….’
그렇다고 성인인 남성을 노리기엔 이 몸이 너무 어렸다. 어차피 그들이 날 여자로 안 봐 줄 거고 봐 준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문제 있는 놈이니 패스. 결국 한동안 강제 솔로 생활이란 뜻이었다.
지난 생에선 하도 남자친구가 없으니깐 내게 눈치 보면서 남자 좀 만나 보는 게 어떻니…? 하고 말하던 게 누군가. 눈앞에서 제 말에 상처받아 위축된 이 양반이었다.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아빠를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참, 오늘 한숨을 몇 번이나 쉬는지 모르겠네. 나는 꼬이는 속에 뒷목을 주무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어차피 지금 누구 만날 생각 없어요. 공부하느라 머리 터질 지경인데 제가 누굴 만나요.”
“그, 그래? 그렇단 말이지? 흠흠.”
아빠는 내 말에 여전히 미심쩍어해 보이긴 했어도 한층 안도한 기색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다가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김시원의 모습을 발견했다.
애 앞에서 대체 뭐 하는 꼴이람. 괜히 민망해져 김시원에게 사과하며 안쪽을 가리켰다.
“미안. 가서 운동해.”
“…네.”
김시원은 나를 한 번, 아빠를 한 번 보곤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곤 인상을 살짝 쓰며 아빠를 노려봤다.
“쟤가 아빠 눈치 보잖아요.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시고 서이수나 제대로 봐요.”
“으음…. 알았어.”
한 소리 하자 아빠는 그 널따란 어깨를 좁히며 주춤주춤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아빠가 서이수에게 별말 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이수야, 사고 치지 말렴.’ 하고 끝나겠지.
아, 생각하니깐 갑자기 성질이 나네? 나는 점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느꼈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쓴소리를 더 내뱉었다.
“아빠가 너무 오냐오냐 키우니깐 걔가 막 나가잖아요. 좀 혼도 내셔서 정신머리 잡게 해야죠. 왜 남의 자식은 정신 교육 잘 시키면서 자기 자식은 못 하는 거예요?”
“그으… 그, 으건….”
“걔 오늘도 땡땡이친 거 봐요. 아주 체육관을 이어받을 놈이 정신머리 빠져 가지곤…! 오늘은 제대로 한 소리 하셔야 돼요! 알았죠?!”
“아, 알았어….”
나는 알지 못했다. 성질이 뻗쳐 아빠에게 한 소리를 하고 있는 그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를. 체육관에서 가장 우락부락하고 덩치 큰 관장이 그보단 머리 한 개하고 반은 작을 여자아이에게 잔소리 당하는 광경이 어떨지를. 아빠에게 한참 동안이나 애정을 담은 속풀이를 하고 나서야 저희들에게 시선이 쏟아지고 있다는 걸 나는 뒤늦게 눈치챘다. 그 시선들은 하나같이 기묘한 걸 본 듯한 표정들이었다.
아차, 어린 회원들 앞에서 너무 면박을 줘 버렸다. …이러면 관장으로서 얼굴이 서질 못한다. 뒤늦은 낭패감으로 얼굴을 굳어졌다.
“아, 그, 그래도 아빠가 코치 하나는 정말 잘하잖아요. 분명 이수도 잘 지도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도 재빨리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나는 억지로 웃는 낯을 끌어 올렸다.
“아니…. 난 글러 먹은 부모라 틀린 걸지도 몰라….”
하지만, 아빠는 내 오랜 잔소리로 마음에 크게 상처를 받았는지 바로 회복되질 못했다.
“에, 에이. 그렇지 않아요. 지금부터라도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차마 이전부터 잘했다고 입에 발린 말을 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그간 겪은 내 피눈물 나는 고생이 너무 안타깝고 억울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 부모잖아요! 좀 제대로 해 봐요!”
더 이상 못 참겠다. 자꾸만 이어지는 칭얼거림에 나는 다시 벌컥 화를 내 버리고 말았다. 원래 그리 좋은 인내심을 갖지 못한 성질머리였다. 결국 제 성질에 못 이겨 버럭 외치니 아빠는 눈꼬리를 추욱 늘어트렸다.
“그, 그래도….”
“뭔데요!”
너무 우물쭈물해서 답답할 지경이다. 나는 점점 험악해져 가는 제 인상이 느껴졌다. 여담이지만, 그걸 멀리서 본 회원들이 흠칫 놀랐다는 걸 알게 된 건 나중 일이었다. 거기에 험상궂을 때의 아빠와 똑같았다는 평도 말이다.
“걘 너무 연약한걸….”
“……네?”
“내 아들이지만 한 대 치면 뼈가 부러질 것 같아.”
나는 그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이제야 말하지만 아빠는 왕년에 강철 주먹으로 불렸던 아시안 챔피언이었다. 요즘도 웬만한 중견 선수들도 그 주먹 앞에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리고 전생에 그 주먹으로 직접 훈련받았던 게 바로 나였다.
‘그런데 뭐라고? 연약해서 못 때리겠다고? 나는 그렇게 대차게 굴려 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