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프로가 아닌 철 밥통을 노린다 (3)
“…….”
“이, 이나야…?”
아빠가 나를 조심스레 불렀다. 나는 그제야 내 인상이 최고조로 험악해졌음을 깨닫고 바로 얼굴을 풀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풀리진 않았지만 어쨌든 위협을 주진 않을 정도론 풀었다.
“아빠.”
나는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최대한 정제한 상태로 아빠를 불렀다. 아빠는 자신이 뭔가 실수를 한 건가 싶었는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빠에게 단호히 말했다.
“걔 그렇게 연약하지 않아요.”
우선 내가 때려 봐서 안다. 물론 아빠가 뭘 염려하는지 알고 있다. 자신도 서이수에게 우스갯소리로 약골이라 놀리지 않던가. …뭐, 진심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아무튼! 그래서 오짱이네 뭐네 한 거에 놀라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노래방 녀석이 태산고 일짱이라는 사실을 듣고 깨달았다. 같은 일짱이라던, 아니, 고등학생이나 중학생을 떠나서 반휘혈이 비정상적으로 강했다는 걸. 그간 자신이 인소 세계란 이유로 일짱을 너무 미화시켰다는 걸 알게 됐다. 무엇보다 삼짱이라는 김시원을 지켜보자니 녀석은 서이수와 스펙이 비슷했다. 아니, 김시원이 서이수보다 재능은 더 있어 보였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찌 됐든 서이수는 자신의 입으로 자기는 약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은 객관적으로 보면 맞긴 맞았다. 하지만, 아빠의 기준은 그것보다 더 웃돌았다. 나름 전도유망해 보이는 선수도 영 글러 먹었다고 혀를 끌끌 차시는 분이니 당연한 기준이었다.
어쩌면 서이수가 삐뚤어진 게 아빠의 영향도 없잖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정받고는 싶은데 아빠가 제대로 상대를 안 해 주니 그 섬세한 데다 마음도 심약한 놈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억울하겠는가. 그걸 표출한다는 게 엇나간 방식으로 나온 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보니 좀 불쌍…,’
할 리가!!!! 나는 이를 아득 갈며 지나간 서이수의 행적에 분노가 치솟았다. 아무리 엇나갔어도 정도가 있지! 요 2년간 내가 얼마나 그 자식 뒤꽁무니 쫓으며 사고 치지 않게 단단히 잡았는지 아는가!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열 가지가 넘는다! 진짜 내가 뒷목 잡고 쓰러지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그만큼 서이수는 개판 중의 개판이었다!
‘근데! 그 쌍놈의! 멱살을! 붙잡고! 사람 만들려고! 노력한 게! 누군데!’
그건 내가 아니라 아빠가 했어야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 아빠라는 사람이 자식이 연약해 보인단 이유 하나만으로 제대로 된 훈육조차 못 한다니! 이게 말이야, 방구야?!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아빠 기준이 너무 높다구요! 걔도 맷집 있고 나름 쓸 만해요!”
정말 나름이긴 하지만 어찌 됐든 쓸 만하긴 하다! 선수로 키우면 챔피언은 무리더라도 랭킹은 나름 높은 선수가 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아빠는 내 말에 영 마땅찮은 모양인지 시원찮은 표정을 지었다.
‘저놈의 망할 똥고집!’
저놈의 똥고집 때문에! 어?! 내 속이 안 뒤집힐 수가 없다. 지난 생에서도 고집 못 꺾어서 체육관 망했는데! 이번에도 망하고 싶나! 이런 부분 때문에 더 들키기 싫은 거라고! 표현은 잘 안 하는 편이긴 하지만 서이수 그 녀석이 내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내가 선수 쪽으로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었을 땐 얼마나 화를 내던지…. 아, 아무튼! 서이수 그 녀석이 자기한테 인정받고 싶은 거 알아, 몰라?! 근데 대놓고 약골 취급 해 버리면 얘가 안 삐뚤어지겠냐고, 어?!
하지만, 이 사실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순 없었다. 정말 이 순간만큼 제가 빙의자인 게 한스러울 수가 없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으면 한결 수월했을까. 아니, 그렇다고 저 새끼를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고. 아오, 진짜.
나는 자꾸만 부글부글 끓어올라 터질 것 같은 성질을 안간힘으로 죽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수 너무 무시하지 말고 제대로 키워 봐요.”
체육관 망할 일 없게. 나는 뒷말은 조용히 삼켰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말해 봤자 쓸모없었다. 그리고 서이수가 체육관을 이어받으면 오히려 아빠보다, 아니 나보다도 체육관 운영을 잘할 것 같았다.
요 한 달간 늘어난 회원들 케어 매뉴얼을 만든 건 다름 아닌 서이수였다. 최근 신규 회원들은 남자도 많긴 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게 여자였다. 하지만, 그간 우리 체육관을 등록하러 오는 건 대부분 남자라서 그에 대한 적절한 매뉴얼이 없었다.
그래서 아빠는 땀을 뻘뻘 흘리며 갈팡질팡하던 중이었는데, 서이수가 몇 번 테스트랍시고 이것저것 진행해 보더니 매뉴얼을 뚝딱 만들어 버렸다. 진짜 공부는 내가 아니라 쟤가 해야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정도로 신속한 대응에 나는 녀석 몰래 감탄했었다. 게다가 그런 일 잘하는 모습이 여자애들 사이에서도 크게 작용했다. 입소문을 제대로 탔는지 신규 회원이 또 늘어 버렸다. 재작년부터 시작해 줄곧 아빠를 설득해 다이어트반을 만든 보람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뭐 하는 거야? 둘이서.”
한참 아빠의 고집과 정면으로 싸우는 중인데 떨떠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목소리만큼이나 떨떠름한 서이수가 서 있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하더니만.
“둘 다 덩치 커서 못 지나가겠잖아. 통행 방해야. 비켜.”
서이수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젓다가 내 얼굴을 보더니 흠칫 놀랐다. 그러곤 내게 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누나 넌 표정 왜 그래? 뭔 일 있었어? 아빠가 성질 건드렸어? 회원들 겁먹잖아. 표정 풀어.”
그 말에 아차, 싶어 바로 표정을 풀었다. 나는 얼굴을 매만지며 잠깐 아빠를 흘겨봤다. 아빠는 내 눈을 슬쩍 피하며 면목 없는 얼굴로 자리를 터 주었다.
“…대체 뭔데?”
나와 아빠의 미묘한 대치에 서이수가 이상하단 듯이 우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몰라도 돼.”
나는 머리를 세차게 헝클이곤 자리를 떠났다. 서이수는 그런 날 부르려다가 내 분위기가 꽤나 가라앉았다는 걸 눈치채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빠, 뭔진 모르겠지만 사과….”
그 자리를 떠나면서 서이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어지면서 더는 들리지 않았지만 대충 아빠가 나에게 사과하란 내용이었다. 잠깐의 상황으로도 아빠가 잘못했단 걸 느꼈나 보다. 하긴, 그 고집에 속 썩인 건 저뿐만이 아니니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아까의 상황이 다시 떠올랐다. 부글부글 끓는 속이 좀체 식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결국 지나가다가 보이는 샌드백을 강하게 내리쳤다.
쾅-!!! 하고 묵직한 소리가 관내에 울려 퍼졌으나,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샤워실로 직행했다.
***
그리고 그 광경을 먼발치에서 본 김시원은 생각했다.
‘…숨길 생각 없는 것 같은데.’
그는 힐끗 닫힌 문과 관장을 잠시 바라보다 시원스레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저완 관계없는 일이다. 그는 남의 개인사엔 깊게 파고들지 않는 주의였기에 그저 제 할 일을 덤덤히 계속했다.
그리고 그걸 본 팬들은 완전 마이 페이스! 장난 아냐! 꺄아-, 하며 좋아했다. 오늘도 체육관 한편이 유난히 시끄러운 날이었다.
***
그리고 다시 문 앞.
“저, 저 성질머리….”
서이수는 아빠에게 말하다 말고 벼락같이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반사적으로 돌렸다. 그곳엔 제 성질을 못 이겨 씩씩거리는 서이나가 샤워실로 직행하고 있었다.
서이수는 그 뒷모습에 혀를 차다가 순간 아차 싶은 심정에 힐끗 제 아빠인 서이석을 바라봤다. 아빠는 아까까지 기죽은 모습을 어디다 내던졌는지 눈에 이채를 띠며 누나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서이수는 그 모습에 명치 언저리가 술렁였으나, 그것을 억지로 삼켜 냈다.
알고 있었다. 아빠가 원하는 재능이 제가 아닌 누나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아빠는 그것을 일찍이 눈치챘다는 걸, 저 둔탱이만 모른다. 매번 누나가 운동할 때마다 아빠는 그것을 말없이 유심히 지켜보신다. 어쩌면 처음 미트를 친 그날부터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걸 볼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비참해졌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 아빠의 눈을 돌이키고 싶어서 얼마나 발악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누나의 재능 앞에선 모두 쓸데없는 광대 짓에 불과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자신은 겨우 달성한 걸 누나는 눈길 한 번으로 바로 체득해 버린다. 그걸 줄곧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열등감도, 오기도 체념으로 바뀔 뿐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누나 앞에선 하나의 범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그는 최근에서야 겨우 인정하게 되었다.
“포기하세요.”
그래서 그는 이렇게 담담히 말할 수 있었다. 서이수는 닫힌 샤워실 문을 바라보다 아빠를 바라보았다.
“누나 고집 아시잖아요.”
누굴 닮았는지 누나도 보통 고집이 아니었다. 한때 그 문제로 저와도 대판 싸웠던 일이 있었다. …일방적인 자신의 화풀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때는 정말 화가 났었다. 저 재능을 썩힌다는 게 마치 자신이 더 무시당하는 것도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땐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심하게 엇나가게 굴었고… 뭐, 결국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는 해프닝으로 끝을 맞이했지만 말이다. 결국 그 이후로 자신도 누나를 설득하는 걸 포기했다. …뭐, 그 고집 강한 아빠가 미련이 덕지덕지 붙은 채로 포기할 정도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였을지도 모른다.
서이수는 왠지 쓴맛이 올라오는 느낌이었지만 그것을 삼키며 샤워실 쪽을 바라본 채 입을 열었다.
“공부 밀어준다면서요. 약속 지키셔야죠. 안 지켜서 저 성격 다 감당할 수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