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5화 (25/306)

25. 프로가 아닌 철 밥통을 노린다 (4)

움찔, 아빠의 그 커다란 몸이 튀었다. 말하지 않아도 가장 두려운 부분이었는지 안색이 안 좋아졌다. 서이수는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다 저희를 바라보는 눈길들을 느끼고 급격히 의기소침해진 아빠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 얼굴 펴요. 회원들이 눈치 보잖아요. 관장이 돼서 뭐 하는 거예요? 계속 그러실 거면 그냥 사무실에 있으세요. 회원들 눈치 보게 하지 말고.”

인정사정없는 아들의 말에 서이석은 어깨를 움츠렸다. 아까 누나인 서이나도 그렇고 동생인 서이수도 그렇고 누구를 닮았는지 아주 인정사정없이 그를 말로 휘둘러 패는데 선수였다. 그는 제 편 하나 없는 것 같은 설움에 빠졌다.

“빨리요, 빨리.”

이젠 보다 못해 등까지 꾹꾹 밀며 자리를 떠나길 재촉했다. 분명 몇 년 전만 해도 굉장히 살갑고 귀여운 토끼 같은 자식이었건만, 언제 이리도 매정한 아들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서이석은 눈물이 흐를 것만 같은 눈에 억지로 힘을 줘 참았다.

그러다 불현듯 자신의 아들이 이젠 자신의 어깨까지 왔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 이렇게 컸지?’

이나야 엄마 닮아서 키가 좀 작아서 그런가, 그간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누나인 이나보다 언제나 작게만 느껴졌던 이수가 어느새 자신의 어깨까지 따라잡은 걸 보자니 서이석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걔 그렇게 연약하지 않아요.’

‘아빠 기준이 너무 높다구요! 걔도 맷집 있고 나름 쓸 만해요!’

‘그러니까 이수 너무 무시하지 말고 제대로 키워 봐요.’

문득 방금 딸이 한 말이 떠올랐다. 서이석은 여전히 저를 꾹꾹 밀어내는 아들을 내려다봤다. 키가 큰 것뿐 아니라 골격도 넓어지고 튼튼해졌다. 이제까지고 연약하게만 느껴졌던 그 아들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나의 말대로 자신은 과거의 귀엽고 소중하기만 했던 아들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수야.”

“아, 왜요.”

겨우 사무실까지 밀어 넣는데 성공한 서이수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짜증 내며 돌아봤다. 서이석은 그런 제 자식의 모습에 저, 저 매정한…! 하면서 상처받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스파링 해 볼래?”

“갑자기 왜요. 누구 갑자기 시합 잡혔어요?”

“나랑 말이다.”

멈칫, 서이수가 눈을 크게 뜨며 서이석을 바라보았다. 서이석은 그런 아들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구나. 이제 해 볼 때도 됐지?”

그 말에 서이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러다 뭔가 말하려는 듯이 입을 뻥긋거렸지만 결국 나오는 말은 없었다. 그는 무언가를 참듯이 입을 꾹 다물고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아! 짜증 나!”

두 부자가 정다운 대화를 나눌 때, 나는 한참 성질이 나 있었다. 그곳에 남아 있으면 오히려 폐만 끼칠 것 같아 결국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와 버렸다. 그렇다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 봤자 이 분이 풀릴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솟구치는 열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잘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이 화가 풀릴 때까지 밖을 서성이는 걸 택했다.

이 분통한 마음, 어찌한단 말인가!

요즘 엄마가 막장 사극에 빠져서 그런지 저도 모르게 사극 말투가 튀어나왔다. 안 되겠다. 누구 한 명 붙잡고 속이라도 시원하게 털어놔야….

“…누구한테?”

이 복잡하고 심란한 감정을, 집안 사정을 알려도 될 만한 사람이 있던가…? 이혜인에게는 단 한 번도 이런 쪽으로 상담해 본 적 없었다. 아무리 친구래도 정신 쪽은 제가 열다섯 살은 더 많았다. 차마 이런 내용을 상담하기엔 양심도 찔리고 자존심도 상했다.

‘그렇다고 엄마한테 털어놓기엔 걱정 끼치는 것 같아서 싫고….’

나는 새삼 제가 이곳에서 의지할 만한 곳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 충격에 잠시 휘청이다가 누군가 제 어깨를 지탱하는 손길에 화들짝 놀았다. 이 야심하고도 깜깜한 길목에 대체 누가 내 어깨를…!

‘이쪽 길목은 치안도 안 좋잖니….’

그 순간, 아빠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바로 지체치 않고 뒤에 서 있는 이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누가…! 엇.”

하지만, 주먹은 얼굴에 닿지 않았다. 왜냐하면, 닿기 직전 그 얼굴을 확인하곤 급하게 멈춰 세웠기 때문이었다.

“…….”

어두운 길목에서도 확인되는 뚜렷한 이목구비. 긴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깊은 눈동자. 이 익숙한 조각 미남, 아니, 미소년은…!!

“바, 반휘혈…? 네가 왜 여기에….”

그 주인공이 다름 아닌 반휘혈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마터면 제 손으로 직접 인류에게 큰 손실을 줄 뻔했다. 이 국제적 보물과도 같은 보배로운 얼굴을 아작 낼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으나, 이 깜깜한 밤길 속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그 얼굴 덕에 그 사태는 아슬아슬하게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뜬금없는 등장이었다. 보통 이 녀석 우리 체육관 근처에선 얼굴 볼 일 별로 없…,

“우리 집.”

“응…?”

반휘혈의 손을 따라가자 커다란 대문이 보였다. 대문이 너무 커서 집까진 보이진 않았지만 어찌 됐든 커다란 집이 있을 게 틀림없었다. 정말 억 소리 나는 클래스에 나는 그제야 눈을 굴려 주위를 둘러봤다.

…언제 여기까지 걸어왔지? 이곳은 체육관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동네였다.

“아….”

나는 뒤늦게 민망함이 차올랐다. 얘네 동네에 왔는데 무슨 일이냐고 하면 뭐라 하겠는가. 오히려 내가 더 이 동네에선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게, 이곳은 부자 동네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어, 그러게. 그렇네…. 내가 너희 동네로 온 거였네.”

나는 어색하게 눈을 굴리며 뒷목을 주물렀다. 어쩐지 내게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동네라 행동 하나하나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보다 역시 쟤 부자 맞구나….’

남주 또는 서브남주로 추측해서 지레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진짜 부자인 걸 목격하니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만약, 저 얼굴을 손상 냈으면 어떻게 된 거지?’

답은 금방 나왔다. 순식간에 닥쳐올 위자료와 병원비 생각에 눈앞이 깜깜해지는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인류의 손실을 떠나서 우리 집안부터 폭삭 망해 버렸을지도…. 꿀꺽.

“미, 미안. 어디 안 다쳤어? 갑자기 주먹 내질러서 놀랐지.”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황급히 녀석에게 사과했다. 아, 물론 딱히 병원비와 위자료 때문만은 아니었다. …갑자기 주먹 내지른 건 자신이었으니 나의 잘못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다친 데 없나 속으로 초조해하며 얼굴을 살피고 있는데 반휘혈이 고개를 저었다. 꽤나 무뚝뚝한 반응이었지만 그 덤덤한 반응이 제겐 오히려 안심을 주었다. 나는 그제야 긴장했던 어깨를 풀며 녀석을 바라봤다. 이제 보니 녀석은 흰 티셔츠 하나에 검정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단출한 모습이었다.

‘…아니, 이런 모습도 그림이라고?’

이렇게 프리한 모습은 처음 봤다. 그러나 이런 후줄근한 차림으로도 모델 잡지에 나오는 것 같은 모습이라니. 나는 새삼 녀석의 잘남에 감탄하며 때아닌 눈 호강을 즐겼다.

“무슨 일이야.”

한창 넋 놓고 구경하던 중, 반휘혈이 질문을 던졌다. 나는 그에 퍼뜩 정신을 차리며 눈을 굴리면서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어…, 산책?”

“그러니까, 왜.”

그런데 자신의 대답은 반휘혈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나 보다. 반휘혈은 못마땅하니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다시 내게 물었다. 그 말에 나는 진의를 파악하고자 잠시 생각의 시간을 가졌는데 곧 자신의 행색을 떠올렸다.

편한 티셔츠 차림에 편한 반바지. 그리고 메고 있는 가방. 나를 알 만한 사람들이라면 내가 방금까지 체육관에 있었음을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운동을 하고 나면 바로 집에 가서 쉰다는 것도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늦은 밤에 동네에서 이런 꼴로 마주쳤으니 의아할 법도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나 방금까지 화나 있었지.’

그런데 어느샌가 화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반휘혈의 등장과 위자료, 병원비 걱정에 차올라 있던 화가 놀라서 멀리 도망간 듯했다.

“어…, 좀 무슨 일이 있었는데…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와 버렸네?”

사실대로 말하기도 뭐했기에 나는 슬쩍 두루뭉술하게 말하며 딴 곳을 쳐다봤다. 굳이 제 사정을 얘기할 필욘 없었다. 어차피 얜 나한테 관심도 없으니 그냥 보내 주겠지만 말…,

“…일?”

“응?”

“뭔데.”

반휘혈이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말은 짧았지만 말하기 전까진 보내 주지 않겠다는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 시선에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 왜 갑자기 관심을? 너 안 그랬잖아? 너야말로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녀석의 관심에 기겁했다. 내가 방금 들은 게 맞는지도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처음 받아 보는 녀석의 제대로 된 관심에 경악하니 반휘혈도 이런 스스로가 낯선지 잠깐 눈을 피했다가 다시 똑바로 마주 보아 왔다.

“…고민.”

“어? 고민?”

“들어 주기로 했으니까.”

반휘혈이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그제야 지난번에 헤어질 때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설마 이걸 쟤 입으로 직접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너… 생각보다 성실하구나?”

저도 모르게 직설적인 감상이 나왔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못 한 부분 때문인지 나는 기묘한 벅차오름을 받고 있었다.

‘이, 이게 키우는 보람인가…!’

마치 야생 동물을 길들인 감각이었다. 오랜 경계와 탐색 끝에 드디어 길들인 사람의 손등에 얼굴을 비벼 준 듯한 느낌에 나는 주먹을 꾹 쥐며 녀석 몰래 전율했다. 꾸준히 관심을 가진 보람이 있었다. 딱히 친해지는 걸 바라서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사이가 좋아서 나쁠 건 없으니까!

나는 저절로 지어지는 웃음을 달며 흐뭇하게 녀석을 바라봤다. 반휘혈은 그런 내 표정에 얼굴을 미미하게 찌푸렸지만 별다른 토를 달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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