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6화 (26/306)

26. 설마 고, 고…!!! (1)

“후후. 너 좀 변했다? 어? 누나 좀 감동이다?”

“…….”

툭툭, 팔꿈치로 녀석을 건들었다.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능글맞은 웃음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아, 근데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걸 어떡해. 이 귀여운 자식. 어? 이렇게 변하면 아주 오예인 걸 몰라? 어?

“없으면 말고.”

그런데 반휘혈이 찬바람 쌩쌩 부는 얼굴로 떠나려 했다. 아, 너무 놀렸나 보다. 나는 황급히 녀석의 팔을 붙잡았다.

“있어! 고민! 방금까지 있었어!”

떠나려는 녀석을 억지로 붙들고 있자 반휘혈은 미심쩍은 얼굴로 다시 나를 봤다. 여전히 차가운 반응이었지만 무시하지 않는 것만으로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막상 얘기를 털어놓으려니 입이 잘 안 떨어졌다. 이 나이 먹고 어린애에게 상담하는 것도 이상하고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이런 걸 해 본 적이 없어서 낯설었다. 내가 자꾸만 머뭇거리며 입을 못 떼자 반휘혈이 갑자기 자리를 옮겼다. 그에 어리벙벙히 서서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자 반휘혈은 내가 따라오지 않는 걸 느꼈는지 살짝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건 마치 따라오라는 것 같은 제스처였다.

나는 잠시 그 시건방진 모습을 어처구니없이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모습마저 잘났다는 게 어쩐지 떨떠름하게 느껴졌다. 얼굴이 모든 것의 면죄부라니…. 이 세상은 불공평했다. 특히, 자신같이 평범한 사람에겐 더더욱. 그렇게 불공정한 세상에 투덜거리는 중인데, 반휘혈 저 매정한 녀석은 내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벌써 저만치 가고 있었다. 나는 황당함에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자기가 따라오라 해놓고 기다리지도 않고 가 버리네. …뭐, 그래도.

‘쟤 나름의 선의인 것 같으니까….’

흔한 기회도 아니다 싶기도 했고 어차피 그리 크게 거슬린 것도 아니었다. 저 녀석이 무례한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새삼스럽지도 않았던 데다 오히려 관심까지 보이는 게 기적 같아 보일 지경이었다.

“흐음….”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인진 모르겠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 뒤를 쫓았다.

***

그가 안내한 곳은 공원이었다. 그 공원은 꽤나 큰 편이라 늦은 시각이긴 했지만 간간이 사람들이 운동을 하든가, 가족끼리 또는 반려견을 산책하러 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반휘혈은 그 안으로 들어가 비어 있는 벤치에 나를 앉히고 그 옆에 앉았다.

“…뭐야? 여긴 왜 와?”

내가 얼떨떨하니 묻자 반휘혈은 잠시 말이 없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기다릴게.”

“어?”

“말할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고.”

나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심각히 말했다.

“너… 안 어울리게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무리 지난번에 내 얘기도 들어 달라 했다지만…. 그걸 진짜로 해 줄 거란 생각은 전혀 안 했다. 그런데, 이런 낯선 모습만 보니 오히려 이 녀석이 반휘혈의 탈을 쓴 가짜가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혹시, 이 자식 나처럼 빙의자…!

“헛소리하지 말고.”

아. 저 싸가지를 보자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아휴, 얼굴은 예쁜데 왜 행동과 말투는 반의반도 못 따라가는지 모르겠네…? 하하.

“뭐어…, 평소랑 비슷해 보이니까 마음은 놓이네. 그래도 아프면 병원부터 가라.”

안도하며 나름 진지하게 충고해 줬으나 반휘혈은 못마땅한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 이러다 조금만 더 성질 긁으면 자리 뜰 것 같네. 나는 수습해야겠다는 마음에 다시 입을 열었다.

“음…. 그래도 고맙네. 일부러 자리까지 마련해 주고. 너도 철이란 게 드는구나.”

반휘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 팔을 붙잡았다.

“워, 워. 놀리는 거 아니야. 미안해, 미안.”

아무래도 입을 잘못 놀린 모양이다. 내가 황급히 사과하자 녀석은 나를 못마땅하듯 바라보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거참, 까칠한 자식 같으니. 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곤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런 얘기, 해도 될까.’

아무리 그래도 열다섯 살은 어린 꼬마한테 이런 무거운 상담은 좀 그렇지 않나? 게다가 얘도 짐이 무거운데 이래도 되나…. 한참을 고민하며 입을 열지 못하는데, 반휘혈이 말을 걸어 왔다.

“서이수.”

“어?”

“서이수 문제 아니냐고.”

“어….”

어떻게 알았지…? 나는 그의 말에 눈을 부릅뜨고 녀석을 바라봤다. 반휘혈은 내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별 감흥 없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나는 신기한 마음에 묻자 그는 나를 힐끗 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것밖에 더 있어.”

“어….”

그 말에 나는 순간 말이 막히었다. 그러다 곧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렇네. 그렇지. 내가 이 세계에서 신경 쓸 만한 게 그것밖에 없지.

‘…그것밖에 없었지.’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분명 아까까지만 괜찮았는데….’

이전부터 느낀 이상한 감각이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그 불쾌한 기분을 다스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왠지 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서이수와 나는 남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런 관계가 돼 버린 거지.

외면하고 싶은데 외면하지 못하고 본능의 외침대로 움직이길 2년째. 나는 작금의 현실이 짓누르는 무게에 어쩐지 숨이 답답해져 울고 싶어졌다.

‘…그래도 애 앞에서 울 순 없지.’

지난번에 펑펑 운 것은 모른다. 아무튼 모른다. 어쨌든 나는 왠지 입을 뗄 용기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이 녀석 앞에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

…분명, 시작은 처연했다. 괴로운 감정을 억누르며 말을 꺼냈었다. 그런데,

“진짜 너무하지 않냐! 지 아들인데! 어?! 나도 내 앞가림 힘들다고!!”

어느새 말하다 보니 감정이 북받친 나는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내면서 얘기하고 있었다.

그간 서이수가 제게 스트레스를 준 내용하며, 그걸 자식이 연약하단 핑계로 부모로서 훈육을 피해 왔던 얘기, 그 사이에 끼어서 복장 터진 내 얘기 등등 빙의랑 인소 세계관에 대한 내용 빼곤 아주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놓는 중이었다.

“내가, 어? 내가 걔 범죄 저지르는 거까지 신경 써야겠냐고! 자식 교육 어떻게 시킨 거야?! 뭘 어떻게 했길래 그 순둥순둥했던 얘가 저렇게 비뚤어져!”

“…….”

“서이수 그 자식도 그래.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어? 수울? 다암배에? 게다가 삥까지?! 어?! 아주 내 손에 뒤지려고 환장했어. 어? 진짜 삥 뜯는 거 보는데 완전 눈앞이 캄캄해지더라니까?!”

“…….”

“싸우는 거까진, 그래. 싸우면서 클 수 있지! 원래 다 싸우면서 크는 거니까! 그리고 무시당하는 건 내가 용납 못 해! 난 그 자식을 그렇게 약골로 키우지 않았어! 사람이 주먹을 들었으면 눈앞의 자식을 아작 내야지!”

나는 거세게 발을 굴렸다. 반휘혈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나는 한참을 발을 굴리다가 지친 듯이 얼굴을 감쌌다. 왠지 지난 몇 년간의 피로가 이제야 몰려오는 것 같았다.

“…내가 진짜 걔 뒤꽁무니 쫓으면서 이렇게 살아야겠냐고오…. 나 요즘엔 악몽까지 꿔…. 머리가 다 하얗게 셌는데도 여전히 서이수 등짝 때리면서 쫓아다니더라.”

그 꿈을 꾸고 난 후에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두려움에 떨었다. 얼마나 공포였으면 전신이 식은땀 범벅에 깬 것도 모자라 새벽에 일어난 후로도 한참을 뒤척인 후에야 겨우 잠들 정도였다.

“……큽.”

한창 제 고민을 진지하게 성토하는데, 그간 옆에서 침묵만을 고수하던 놈에게서 낯선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말하다 말고 의아해져 고개를 돌리자 녀석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녀석의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아니, 기분 탓 아닌데?!’

이, 이 녀석…! 웃고 있어! 그것도 완전 빵 터졌어…! 대체 어떤 부분에서?!

내가 눈을 부릅뜨며 기겁했다. 이렇게 빵 터진 녀석은 처음 봤다. 그나마 웃음 비슷한 것도 지난번에 아주 잠깐 스쳐 지나듯이 본 게 다였다. 그런데 이렇게 빵 터지다니!

이 녀석이 내 고민을 비웃는 것은 나중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우선 그 반휘혈이 폭소를 하고 있는 그 희귀한 장면을 목격하기 위해 몸을 쭉 뺐다. 하지만, 반휘혈은 벤치의 손잡이에 팔을 감싸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아, 뭐야! 좀 보여 줘라! 내 말 듣고 빵 터졌잖아! 어? 남 고민 듣다가 터진 거잖아! 양심이 있다면 보여 주라고오~.”

누가 봐도 고의로 숨기는 모습에 발끈한 나는 녀석의 티셔츠 끝자락을 잡아당기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녀석은 내 말을 귓등으로 듣지 않고 웃음이 잔잔해질 때까지 얼굴을 들지 않았다.

나는 결국 반휘혈을 일으키는 걸 포기했다.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턱을 괸 채 뚱하니 기다리길 잠시, 반휘혈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다 웃었냐?”

내가 못마땅하게 묻자 반휘혈은 슬쩍 눈길을 피했다. 살짝 상기된 뺨이 평소 차갑게만 보이던 그의 안색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처럼 화사해져 있었다. 또 처음 보이는 녀석의 다른 일면에 나는 가볍게 혀를 찼다.

‘얜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양파야, 뭐야?’

오늘따라 자꾸만 새로운 모습을 보는데 그게 하나같이 다 색다른 팔방미인이었다. 아깝다. 어리지만 않았으면 좀 치근덕거려 보는 건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열 살 이상 어린 건 둘째 치더라도 중딩에게 손대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범죄 같아서 나는 조용히 마음을 접었다.

‘아니, 어차피 얘도 눈이 있는데 나 같은 사람을 고르겠냐마는.’

이제껏 인기 있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인지 연애 방면으론 영 자신이 없었다. 남자 한 명이라도 제대로 사귀어 봤으면 괜찮았을까?

‘…성인 되면 꼭 사귄다, 꼭.’

그때가 되면 합법적으로 적당한 녀석들을 만날 수 있겠지. 20대 초반도 어린 감이 있었지만 어차피 남들 눈엔 나도 어리다. 새파랗게 어린 남친 한번 사귀어도 진실을 알 만한 사람은 없으니 괜찮고말고. 나는 조금 찔려 오는 양심을 적당히 합리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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