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설마 고, 고…!!! (2)
“근데 넌 뭐 하러 나온 거야?”
문득 이 녀석이 왜 밖에 있었는지 모른다는 걸 떠올렸다. 분명 집에 있다가 나온 모양새다 보니 더 의아해졌다.
‘설마 얘도 집에서 스트레스 받고 뛰쳐나온 건… 아니겠지? 어, 그럼 미안한데….’
갑자기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들은 게 있다 보니 급격히 불안해졌다. 만약, 그렇다면 힘든 애한테 자신이 부담만 더 준 꼴 아닌가. 그건 어른으로서도 실책이었고, 스스로에게도 용납 못 할 일이었다. 그런데 반휘혈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침묵했다. 방금까지 말 잘하던 놈은 어디 갔나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혹시 진짜 집안일 때문인가 싶어 얼굴을 세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지난번처럼 안색이 어둡진 않았다. 그렇다면 집안일이 아닌 건가? 나는 알쏭달쏭한 기분에 의아해하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뭔데 그래? 말하기 힘든 거야?”
말하기 힘들다면 굳이 말할 필욘 없다고 해 주려는데 반휘혈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뭐지? 나는 하는 수 없이 대답해 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자 반휘혈이 나를 힐끔 봤다. 나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바라봤다. 반휘혈은 어째선지 입을 꾹 다물면서 다시 시선을 피했다.
…얘 오늘따라 왜 이래? 이 녀석의 생소한 모습만 계속 보는지 모르겠다. 뭐, 싫진 않지만… 슬슬 걱정이 들었다. 왜…,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뀌면 곧 죽는다고 하지 않던가.
“…배.”
점점 걱정이 커져 갈 무렵, 반휘혈이 드디어 그 무거운 입을 떼어 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소리가 너무 작아서 제대로 들이지 않았다.
“뭐라고? 다시 말해 줘.”
다시 부탁하자 반휘혈은 입을 꾹 다물더니 살짝 제게 눈짓하며 느릿하게 입을 뗐다.
“…담배.”
“……담배?”
끄덕, 하고 녀석이 작게 고개를 움직였다. 나는 그 대답에 드디어 녀석이 밖에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아, 담배 피우려고 잠깐 밖에 나온 거였구나?’
녀석이 담배 피우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었고, 새삼스레 제 앞에서 내외하는 모습이 오히려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갑자기 왜 눈치를 봐?”
내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반휘혈은 그런 내게 머뭇거리며 입을 뗐다.
“…싫어하잖아.”
담배 피우는 거. 반휘혈은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그 말에 놀라며 입을 떡 벌렸다.
“…내가 담배 싫어해서 말하기 힘들었던 거야?”
왜? 나는 반사적으로 의문을 가졌다. 대체 언제부터 내 눈치를 다 봤다고? 아니, 원체 남의 눈치 보지도 않던 녀석이 다른 사람 눈치를 보는 것도 놀라운데 그게 하필 나라니. …대체 왜?
“그건….”
반휘혈은 말을 못 잇고 얼굴을 살짝 붉히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나는 그 반응에 기겁했다. 얘 진짜 왜 이래? 마치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
‘뭐? 얼굴을 붉혀?’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만큼 충격적인 사실에 두 눈이 떨려왔다.
그거, 그건… 설마? 아니, 진짜로? 진짜로 설마 그거야? ……왜 갑자기 그런 마음이…? 내가 얘한테 뭘 해 줬다고…? 아.
불현듯, 며칠 전의 고민 상담 사건이 떠올랐다.
‘…설마, 설마, 진짜 그 고민 상담으로 나한테, 진짜 나한테 반한 거야? 진짜로?’
내 동공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지금 내게 말로만 듣던 빙의 해프닝이 일어난 건가?! 그렇다면 메인 스토리는? 아직 여주도 안 만났는데?!
‘설마 얘는 스토리와 관계없는 건가? 아님 내가 스토리를 망친 거야?!’
거듭되는 추측에 머리만 꼬여 갔다. 혼란에 빠진 나는 입을 가까스로 떼어 냈다.
“어…, 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몰라 멍청한 소리만 자꾸 나왔다. 그도 그럴 게 지난 생을 통틀어 고백받는 건 처음이라고! 아직 안 받았지만! 새파랗게 어린애긴 하지만! 그, 그래도 고백은 고백이잖아?!
치, 침착, 침착하자. 서이나! 어서 연상의 힘을 보여 줘! 거절하는 거야! 너는 너무 어리다고! 그렇게 거절하는 거야!
“휘, 휘혈아? 그, 그으러니까아… 그, 그건…?”
하지만 굳센 다짐과 달리 나오는 건 형편없이 떨려 이상하기 짝이 없는 말들뿐이었다. 나는 혀를 깨물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이 숙맥을 어쩜 좋냐! 연애 한번 안 해 본 거 티 내니?! 어?!
“…누나.”
………………………네?
한창 혼란스러운 와중에 더 충격적인 단어가 던져졌다. 나는 해괴한 걸 들은 것처럼 혼돈 속에 빠졌다. 얘가 방금 뭐라 했지? 누, 누나? 누우나아…? 아, 내 귀가 먹었나? 아직 이 몸은 열일곱 살밖에 안 먹었는데 큰일이네. 내일 이비인후과를 한 번 가 봐야…,
“이나 누나.”
“…….”
나는 재차 들리는 단어에 기어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이제껏 이 녀석한테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누나 소리였다. 설마 저 녀석의 입에서 누나라는 소리가 나올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아니, 인소 세계에서 남주나 서브남주나 누나 소리하는 걸 본 적이 있어야지…. 선배한테도 뻔뻔하게 이름을 부르는 게 그들 아니었던가…!
‘…그럼 진짜 좋아하는 거야?’
현실감은 느껴지진 않았지만 이 레퍼토리대로면 이 뒤엔 분명 고백이 있었다. 정말 빙의 여주들이 하나같이 네가 왜 나한테 고백해…? 하면서 경악해하는 그런 클리셰 덩어리가 말이다.
‘그런데 그게 나한테 일어난다고? …진짜?’
내가 어안이 벙벙해져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고 있자니 반휘혈이 내게 서서히 다가왔다. 뒤늦게 정신을 차려 좀 가깝다 느껴졌을 땐 이미 거의 코앞이었다.
“어…, 좀 가깝지 않아…?”
우리 거리 좀 지키자. 나는 난처해하며 슬금슬금 뒤로 뺐다. 그러자 반휘혈은 내가 물러선 만큼 더 다가왔다. 그리고 녀석은 어쩐지 애절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어.”
크읍. 아, 진짜 잘생기긴 엄청 잘생겼네…, 가 아니라! 이거 진짜 고백 타임이야…?! 진짜? 내 두 눈이 쉴 새 없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 또래의 여성이었다면 이미 이 미모 하나로 넉다운 될 정도로 지금의 반휘혈은 굉장한 미모를 발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의 또래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놈의 나이보다 더 살았으면 더 살았다. 그러니 녀석을 눈곱만큼도 남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조금 모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미안하다. 휘혈아. 네가 너무 어린 걸 어떡하냐….’
차라리 연상이었다면… 하다못해 동갑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아무리 생각해도 중학생은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결심을 다지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누나.”
그가 더 빨랐다. 녀석은 긴장한 듯하면서도 간절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한순간 숨도 멈춘 듯이 녀석을 바라보았다. 너무 애절한 시선에 마음이 살짝 흔들릴 뻔했지만 곧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역시 제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바로 거절을 담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나를, 동생으로 여겨 줘.”
“미안하지만…, 어?”
…방금, 뭐라고?
“누나가… 내 누나였으면 좋겠어.”
“…….”
앗. 여기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아?
무슨 소리?
‘…무슨 소리긴. 김칫국 한 사발 시원하게 들이붓는 소리지.’
나는 공허한 눈동자로 반휘혈을 쳐다봤다. 반휘혈은 애절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저 얼굴이…, 고백하는 얼굴이 아니라고? 마치 사랑을 고백하는 얼굴인데…? 나 분명 저런 얼굴 순정 만화에서 수십 번은 더 본 것 같은데…???? 나는 믿기지 않은 현실에 더듬더듬 재차 물었다.
“저기… 휘혈아? 방금 뭐라고….”
“…친동생처럼 대해 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현실은 비정했다. 그 절절한 얼굴로 반휘혈은 확인 사살을 시켜 줬다. 나는 언제 뛰었냐는 듯 서늘해진 심장을 느끼며 저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꾹꾹 눌러 댔다.
‘…내 주제에 고백은 무슨.’
그래. 저런 미인이 날 좋아할 리가 없지. 겨우 고민 하나 들어 줬다고 반하다니, 말도 안 됐다. 그런 건 여주인공한테나 있을 법한 일이지, 저 같은 엑스트라에게 있을 내용은 아니었다. 감히 넘보아선 안 될 떡을 넘봐서일까. 아주 처참한 응징이 내려온 것만 같았다. 나는 금이 간 멘탈을 겨우 붙잡으며 띄엄띄엄 말을 붙였다.
“그게, 그러니까… 동생…, 그것도 친…동생이라고?”
“응.”
조심스레 내 기색을 살피는 그 모습은 마치 사랑 고백을 마치고 답을 기다리듯이 긴장한 그 모습이었지만 된통 당할 대로 당해 버린 나는 흐린 눈을 하며 피해 버렸다.
‘안 속아… 이제 저 얼굴에 안 속을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얼굴이 너무 요망하니 별게 다 착각을 일으킨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보지 않는 걸 택했다.
“갑자기 왜?”
바사삭 갈려진 멘탈을 겨우 수습하다 보니 저절로 목소리가 가라앉게 나왔다. 옆에서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지만 더 이상 신경 쓸 기력이 없었다. 왠지 지나친 탈력감이 몸을 휩싸는 기분이었다.
“…부러워서.”
그런 내 기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휘혈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 말에 의아해하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누가?”
“서이수가.”
“…뭐 아쉬울 게 있다고 그 녀석을 부러워해?”
정말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내가 황당해하자 반휘혈은 나를 빤히 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누나가 있다는 거.”
반휘혈의 말에 나는 시선을 다시 돌려 녀석을 바라봤다. 반휘혈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보통 그렇게까지 해 주지 않아. 부모도, 형제도.”
그 깊어 보이는 검은 눈이 잠깐 어두워졌다.
“그렇게 엇나가도, 끝까지 잡아 주는 사람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