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오해는 되도록 빨리 푸는 게 좋다 (1)
나는 반휘혈의 가정을 떠올렸다. 자신을 두고 떠나 버린 엄마와 형. 그리고 방치하는 아빠. 함께 사는 내연녀와 그 자식. 어디에서도 저를 붙잡아 주는 이 하나 없이 고독하게 살았을 그가,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경찰서 일, 기억해?”
“…그걸 어떻게 잊어.”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기억난다. 야자하다 말고 뛰쳐나와 택시 타고 경찰서로 가기까지 얼마나 심장이 초조하게 뛰었고 다리가 달달 떨렸던가. 다시 생각하기 싫은 기억이었다.
“그때, 누나가 가장 먼저 왔어. 그 경찰서.”
“어, …그래?”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아니, 관심도 없어서 알려고도 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때부터 더 신경 쓰였어.”
더…? 살짝 귀에 걸리는 말이 들렸지만 말을 끊고 싶지는 않아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왜 저렇게 바보 같을 정도로 매달리나, 왜 그리 집착하나. 처음엔 이상하고 바보 같았는데….”
반휘혈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게 점점 부러워지더라.”
그는 내 손 끄트머리를 살며시 붙잡았다.
“질투 나고, 화나고, 왜 내겐 이런 사람이 없는지 이해가 안 됐어.”
그의 머리가 점점 내려와 내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할 즈음에 멈춰 섰다.
“그리고, 누나가 나를 위해서 울어 준 날.”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와 나의 거리는 가까웠다.
“가지고 싶어졌어. 진심으로.”
하지만, 그 안엔 남녀 간의 정열은 없었다. 그저 애정을 갈구하는 한 아이의 갈망만이 그 사이의 공백을 채우고 있었다.
“내가, 서이수보다, 누나 동생보다 잘할게.”
그가 간절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대해 주면 안 될까?”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동안 그 무표정에서 이런 감정들을 감춰 온 건가. 문득, 지나간 녀석의 행적들을 떠올렸다. 그동안 번번이 눈이 마주쳤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만큼 반휘혈이 나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란 걸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
“휘혈아.”
그의 눈동자가 내 부름에 맞춰 잘게 떨렸다.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누나는 아니야.”
우선 손도 거칠고, 말도 험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좋은 누나는 아니었다. 동생이 잘못했다고 해서 주먹부터 뻗는 누나의 어디가 좋은 누나란 말인가.
“이수를 쫓아다니는 것도 걔 때문에 피해 볼 우리 가족들 때문이기도 했어. 이수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 나는 아직도 서이수가 제 동생이라는 데에서 가끔씩 괴리감을 느끼곤 한다. 그때마다 느껴지는 오싹한 감각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제 삶은 사라지고, 이 세계의 서이나에게 삼켜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걸 자각할 때마다 이상하리만치 속도 울렁였다. 하지만, 역시나 이 모든 사실을 발설할 일은 앞으로도 없겠지. 이것은 영원히 저 혼자 떠안고 가야 할 문제였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녀석의 머리에 손을 뻗어 쓰다듬었다.
“나 같은 누나는 있어 봤자 별로 도움 안 될 거야. 그냥 이대로가 더 나을지도 몰라. 서로 필요시에 고민 들어 주고 의지할 수 있는 딱 그런 관계.”
“…….”
반휘혈은 내 말에 슬프게 얼굴을 가라앉혔다. 제대로 거절의 뜻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
그런데, 이번엔 내가 그 얼굴을 보니까 마음이 안 좋아졌다. …그래서일까.
“…그치만,”
나는 필요 없는 말을 덧붙이고 말았다.
“그런 걸로도 네가 성에 안 찬다면, 뭐…. 생각해 볼게.”
나는 다 말하고 난 후 쓰게 웃으며 뒷목을 문질렀다. …이 얘긴 할 생각 없었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받아 줄 생각이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녀석의 어두워진 얼굴을 보자니 좀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은….”
반휘혈은 내 말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나는 그 시선에 멋쩍어져 눈길을 슬쩍 피했다. 정말이지, 나도 내가 이 말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어째서일까? …어쩌면, 이 녀석이 내 고민을 처음으로 들어 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 말 잘 들으면 더 좋을지도…. 사고 치는 건 서이수 하나만으로 족하거든.”
나는 민망함을 숨기기 위해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내 말에 반휘혈은 멍하니 있다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 잘 들을게.”
반휘혈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 같은 반응에 나는 왠지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정말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이 녀석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약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담배 피우지 마. 몸에 안 좋잖아.”
전부터 신경 쓰이던 부분이었다. 남이어서 그다지 걸고넘어지진 않았었지만, 동생이 되고 싶다고 하니 이 정돈 말해도 상관없겠지.
‘뭐, 끊기 힘들다 하면….’
거기까지인 거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차후의 녀석을 지켜보려 했다. 그런데,
“끊을게.”
반휘혈은 내 말을 듣곤 바로 일어서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담배와 라이터를 통째로 버렸다. 그리고 내게 칭찬을 바라듯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어…, 자, 잘 생각했어?”
나는 그것을 얼떨떨하니 창찬해 주자 그가 볼을 살짝 붉히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은 마치 칭찬이 익숙하지 않은 아이가 칭찬을 받는 것같이 느껴졌다.
…혹시 너도 빙의자니?
너무나도 낯선 녀석의 모습을 한 번에 봐서 그런가, 하마터면 직접 물어볼 뻔했다.
혼란하다. 혼란해. 안 그럼 하루아침에 이렇게 달라질 수가 없는데? 아님 회귀자? 차원이동자? 너 왜 이렇게 변한 거야…!
나의 이런 심란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휘혈은 학구열을 불태우는 아이처럼 몸을 가까이 들이대며 물었다.
“또 뭘 하면 돼? 서이수한텐 뭐라고 해?”
“어…?”
갑자기 그렇게 물어보니 생각날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너 원래 이렇게 열정적인 애였어…? 낯설다 너? 그리고 좀 가깝지 않아? 방금까진 아무 생각 없던 거리가 유독 가깝게 느껴졌다. 나는 난처함에 뭐라 한마디 하려 했으나,
“이나 누나?”
크, 크흐윽…!! 나는 미모와 호칭에 정면으로 크리티컬을 맞고 말았다. 낯설고 말고 그게 뭐가 중요해! 예쁜이가 원한다고 하는데 어서 말해 줘야지!! 나는 당황해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맹렬하게 돌리며 떠듬떠듬 기억을 돌이켰다.
“어…, 사고 치지 말라든가, 술 먹지 말라든가….”
“응.”
“싸울 거면 다쳐서 오지 말라든가…. 공부 좀 하라든가….”
“응.”
“집에 일찍일찍 다녀…,”
나는 말하다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집에 있는 게 가장 괴로울 녀석한테 집에 일찍 다니라니… 너무 센스 없는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반짝이기만 했던 반휘혈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게다가 인상까지 찌푸리는 게 맹렬히 고뇌하는 게 보일 정도였다.
“어! 너, 너무 힘들면 무리하진 말고! 아, 그래. 집에 들어가기 싫으면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 그러면 되겠다! 너무 늦게까지 돌아다니면 위험하니까! 차라리 그게 더 낫겠어!”
횡설수설 말하고 나니 반휘혈의 표정이 묘했다. 난 그 얼굴에 불현듯 지난번에 이 제안을 거절당했던 일이 떠올랐다.
이 돌대가리야아…! 전에 거절당한 걸 굳이 왜 또 말하냐고오…!!! 그리고 서이나 너 왜 이렇게 외간 남자를 집에 끌어들이지 못해 야단이냐, 어? 얘가 이상한 쪽으로 오해하면 어쩔…,
“…응.”
려고. 지난번에도 의심쩍게 봤…, 응? 뭐, 뭐라고?
“어?”
“갈게.”
“…진짜?”
예상치 못한 말에 재차 묻자 반휘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대답에 벙찌듯 있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어, 음. 그, 그래. 언제든 편히 연락하고, 또 와도 돼.”
갑작스럽긴 했지만, 솔직히 집에 어떻게 말해야 될지도 감이 안 잡혔지만 될 대로 되란 심정이었다. 한 번 꺼낸 말을 뒤로 무르기도 싫었다. 부모님에겐 잘 얘기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집에 서이수도 있으니까… 어, 잠깐만. 근데 설마 얘가 이걸로 내가 받아 준다고 오해하는 건….
“그럼 오늘 가도 돼?”
“아, 그럼 물론…, 오늘?”
갑작스러운 내용에 나는 무언가 중요한 걸 생각한 기분이 들었지만 한순간에 까먹고 말았다. 당황한 나머지 바로 되물으니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그 인간… 이 집에 와서.”
“어어….”
“그 여자랑 그 자식만 집에 있을 땐… 방이 멀어서 마주칠 일이 별로 없어. 하지만, 그 인간이 와선 같이 밥 먹자고 해서… 너무 싫어서 나와 버렸어.".
나는 그 말에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 자리가 불륜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전처의 아들과 내연녀를 억지로 친해지게 만들려고 만든 자리인 게 딱 보였기 때문이다.
‘저, 저 개 같은 색…!! 고자나 되어 버려라!!!’
나는 속으로 열심히 욕을 지껄이며, 단호히 반휘혈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가자!! 우리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