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오해는 되도록 빨리 푸는 게 좋다 (3)
“과반수로 결정됐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정신 차리고 밥 나르는 거나 도와.”
엄마가 아빠의 등을 한 번 더 찰싹 치며 일어났다. 나는 그 깔끔한 마무리에 이번엔 마음속이 아닌 진짜로 박수를 보냈다. 아빠가 의기소침하게 일어나는 걸 지켜보자니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 엄마지만 정말 멋진 거 같아.”
가끔 무섭긴 하지만, 저런 게 바로 걸크러쉬가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
하지만, 서이수의 표정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그것도 내 쪽을 향해 떫은 표정을 짓고 있어 나도 녀석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뭐야, 그 얼굴은.”
“…아니, 그냥.”
서이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반휘혈의 어깨를 두드리곤 방을 가리켰다.
“잠시 얘기 좀 하자.”
반휘혈은 서이수를 바라보다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거기서 왜 나를 봐? 내 허락이라도 얻게?’
서이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나와 녀석을 번갈아 보면서 못 볼 걸 본 것처럼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어…, 밥 다 차려지면 부를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돌려지지 않는 녀석의 시선에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반휘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이수는 그것을 경악하며 바라보다 내 쪽으로 강하게 시선을 보냈다.
“…….”
하지만, 해 줄 말은 딱히 없었기에 나는 시선을 외면했다. 서이수는 집요한 시선으로 나를 보다가 제 방처럼 먼저 방문을 열고 들어간 반휘혈을 깨닫곤 내게 빠르게 속삭이고 뒤따라 들어갔다.
“너 나중에 보자.”
나는 두 남정네가 사라진 문을 보며 뒷목을 잠시 주무르며 작게 구시렁거렸다.
‘…귀찮아.’
***
“…….”
서이수는 자연스레 제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는 녀석을 보곤 잠시 얼이 나갔다.
‘우리 집, 내 침대 위에 학교… 아니, 지역 일짱이 있다고?’
이 괴리감은 대체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 상황에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하지만, 그건 오래가진 않았다. 볼일이 무엇이냐는 듯 녀석의 빤한 눈초리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흠흠.”
서이수는 잠시 민망함에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너, 무슨 생각인 거야?”
“…….”
반휘혈의 한쪽 눈썹이 살짝 휘었다. 너야말로 무슨 생각으로 그딴 질문을 하는 거냔 것 같았다. 정말 표정만으로 의사 전달이 명확하다니, 신기에 가까운 재능이라고 서이수는 생각했다.
“아니, 내 말뜻은… 너….”
서이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 말을 묻기 위해선 스스로에게도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생각도 하기 싫고 상상도 안 되지만, 설마, 이 녀석….
“우리 누나 좋아해?”
대체 뭐가 아쉬워서 그런 맹수 같은 고릴라를? 서이수는 연이어 튀어나올 것 같은 말을 꾹 눌러 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갔지만 반휘혈이 서이나를 특별하게 여긴다는 건 얼추 느끼고 있었다. 먼저 번호를 따 가질 않나, 우리에겐 개무시가 일상이었는데 서이나에겐 문자라는 형태로 의사를 전달하지 않나. 누가 봐도 특별한 포지션이었다.
그래서 가끔씩 혹시나, 호옥시나! 싶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의심이 들 때마다 서이수는 스스로의 뺨을 때리며 불식시켰다. 그도 그럴 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람치곤 반휘혈의 태도는 지나치게 냉담한 구석이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누나인 서이나도 평소완 크게 다르지 않은 행동을 보였고 말이다.
그런데, 오늘 그게 기어코 깨져 버렸다. 말이 의동생이지, 저 눈깔이 어떻게 동생이 누나를 바라보는 눈이란 말인가.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서이나를 바라보는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래서 거의 확신과도 같은 물음이었지만,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헛소리.”
…방금 쟤 말한 거야? 아, 아니, 그게 아니지…! 그 희귀한 목소리를 들었다는 거에 속으로 놀라는 것도 잠시, 그 내용에 서이수는 2차로 경악했다.
“그럼 아니라고?”
반휘혈은 대꾸할 가치도 못 느낀 것처럼 감정 없는 시선으로 서이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담긴 뜻에 서이수는 다른 의미로 충격을 받아 잠시 비틀거렸다.
‘…아니라고? 진짜 아니라고?’
그렇다고 보기엔 방금 그 모습은… 근데, 지금 쟤 얼굴을 보면 진짜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방금 제 눈이 삐었던 건가? 그런 건가?
서이수는 알쏭달쏭한 기분에 빠져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가 의심쩍게 재차 물었다.
“그럼 진짜 동생이라도 한다는 거야?”
물으면서도 이번에도 무시당할 거란 예상했다. 어쩌면 방금처럼 차갑게 바라볼지도.
“어.”
그런데, 서이수의 예상과는 달리 놀랍게도 반휘혈은 성실히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해 주었다. 그 대답에 서이수는 입을 멍청히 벌렸다.
“…왜?”
왜 굳이 의동생을 자처하는 건지 모르겠다. 딱 보니 누나가 억지로 끼워 맞춘 느낌도 아니었다. 오히려 반휘혈의 강렬한 의사까지 보일 정도였다. 평소 사람 대하는 걸 돌 보듯 하는 놈이 왜 굳이 우리 누나한테…? 아니, 왜 하필 내 누나한테?
“너….”
똑똑.
“밥 다 차렸어. 나와.”
서이수가 무언가를 더 말하려고 할 때,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반휘혈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 긴 다리로 한두 걸음 걷고는 훌쩍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얘긴 다 했어?”
끄덕.
서이나의 물음에 반휘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까지 서이수 자신과 대화했던 놈과 같은 놈인지 맞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서이수가 치사하게 침대로 두말하진 않았지?”
아니, 저 인간이? 자신을 쪼잔하게 만드는 그 말에 서이수가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지만, 서이나는 서이수를 보지도 않았다. 그건 반휘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고개를 젓고는 폰을 들어 툭툭, 메시지를 두드렸다.
“아, 그래? 별일 없음 됐고. 어, 김치찌개 좋아해? 집에 그거밖에 없네.”
툭툭.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가서 먹자. 배고프지?”
서이수에겐 보이지 않는 대화가 둘 사이에 오갔다. 무엇보다, 서이수는 멍하니 만든 건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반휘혈의 분위기였다. 표정은 똑같이 없었지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방금까지 저와 있었던 사람과 동일 인물인지 의심케 할 정도로 그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져 있다는 것을. 서이수는 멀어지는 두 사람을 향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바라보다 제 머리를 두 손으로 크게 휘저었다.
“두 사람 대체 뭔데에…!”
자신의 의문을 풀기 위해 방으로 데려왔건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지고 말았다.
‘관심 없다는 걸, 퍽이나 믿겠다!!’
저건 동생이 누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아무리 평소에 서로 개판으로 치고받고 싸워도, 자신이 바로 그 ‘동생’이었으니 말이다.
“서이수! 너 언제까지 방에 있을 거야! 나와서 밥 먹어!!”
해소되지 못한 찝찝함에 망부석처럼 앉아 있던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서이수는 한 번 더 머리를 세차게 휘젓곤 외쳤다.
“아, 나간다고!!”
***
식사 시간은 길지 않았다. 꽤나 불편할 것 같다는 예상과는 달리 그리 어색하진 않았다. 물론 그 자리의 일등 공신은 역시나 우리 어머니, 이정화 여사님이셨다. 타인의 낯선 집에서 밥 먹는 반휘혈을 고려해 이것저것 챙겨 주셨고, 옆에서 불평하는 아빠와 서이수를 단칼에 쳐 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거들었다.
“하여간 우리 집 남자들은 왜 이렇게 쪼잔한가 몰라.”
“맞아, 맞아.”
어머님 말씀이 백 번 천 번이고 옳습니다! 더 해 주세요! 더!
“우리 이나가 매번 고생이야. 공부하랴, 운동하랴…. 그런데, 이놈의 집구석의 남정네란 것들은 이나의 반도 못 닮아 가지곤… 쯧.”
“우리 이나야 자기 닮았지…. 무서운 것도….”
“네?”
“뭐?”
뒷말은 거의 음소거 수준으로 작아져서 뭐라고 했는지 못 들었다. 엄마랑 내 시선이 자연히 아빠 쪽으로 쏠렸다.
“아무것도 아냐….”
아빠는 우리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시선을 피하며 나물을 집으셨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의심쩍게 바라보다 나와 이수를 걱정스레 보았다.
“이나랑 이수는 요새 별일 없지? 엄마가 일을 다녀서 신경 써 주질 못해서 미안하네.”
“아냐. 별일 없어. 나랑 얜 언제나 똑같지.”
“어. 별일 없어.”
나와 서이수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요즘엔 뭐가 없긴 했다. 서이수 이 녀석도 학교랑 체육관을 꼬박꼬박 다니는 데다, 요즘은 서열 싸움인가 개싸움인가 뭔가 하는 것도 안 나갔고 말이다. 덕분에 요새 내가 많이 편해졌다. 그러고 보니, 반휘혈도 요즘은 덜 싸우려나? 이런 쪽은 영 잘 모르겠지만, 반에 떠도는 소문도 잠잠한 것도 그렇고 별일 없겠거니 싶었다.
‘…뭐, 무슨 일이 있었어도 엄마한텐 말 안 했겠지만.’
뭐랄까, 엄마는 내게 있어 이런 쪽은 아픈 손가락 같은 사람이었다. 지난 생에서도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게 엄마였다. 체육관이 적자 났을 때도 그것을 다 메꾼 게 엄마였고, 링 위에서 내려와 실의에 빠진 내게 엄마가 얼마나 희생했는지도 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에게만큼은 짐을 지어 주고 싶지 않았다. 지난 생에서도 나 때문에 알게 모르게 속이 곯아 터졌을 텐데, 이 세계에서마저 자식 문제로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특히, 범죄 쪽으론 말이다. 그래서 서이수 뒤치다꺼리할 때도 이 녀석 입막음만큼은 확실히 했다.
‘네가 아무리 쓰레기 짓거리를 해도 엄마 귀에만큼은, 절대 들어가게 하지 마라. 내 선에서 끝내자, 제발.’
그에게 정말 간절히 말했다. 내 마음이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제껏 엄마에게 서이수가 사고 치는 내용이 들어가지 않았다. 서이수도 엄마 앞에서만큼은 사람 구실을 할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