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31화 (31/306)

31. 오해는 되도록 빨리 푸는 게 좋다 (4)

“그래? 요샌 학교에서 안 싸우지?”

그렇다고 마냥 다 막을 순 없었지만 말이다.

“안 싸워.”

“그래. 다행이네. 그 나이 땐 다 싸우면서 큰다지만, 너무 다투진 마.”

하지만, 다행히도 엄마는 친구들과 소소히 다투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서이수도 엄마의 말에 별다른 태클은 안 걸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것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옆에 있던 반휘혈과 시선이 마주쳤다.

…왜 저렇게 보는 거지? 뭔가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뭐 묻었어?”

입가를 슥, 닦자 묻어 나오는 건 없었다.

‘어라, 안 묻었네. 그럼 왜 본 거지?’

의아함에 다시 반휘혈을 보니 녀석은 여전히 말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진짜 뭔데?

“흠흠!!”

그런데, 아빠가 갑자기 소란스레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쪽을 보자 아빠 옆에 있던 엄마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히죽히죽 웃고 있는 걸 발견했다.

“둘은 왜 그래?”

“어휴….”

이상해서 묻자 서이수가 뜬금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지금 이 상황. 나만 따돌리는 거야? 지금? 못마땅함에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거, 휘혈이라 했던가?”

아빠는 언제 위축됐냐는 듯 한껏 어깨를 세우시곤 목소리를 힘껏 낮췄다.

‘뭐야, 저 꼴은.’

나름 위엄 있게 보이시려고 저러는 모양인데, 방금까지 꼴사나운 모습만 보여서 효과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저러는 거래? 마치,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사윗감 데려온 딸내미 앞에 설 때 그 모습 같…아, 설마…?

“우리 이나한테 관심 있는 건 상관없다만… 허튼짓하면,”

“아빤 조용히 하세요.”

아니나 다를까, 쓸데없는 생각을 한 것이 증명된 아빠의 말에 나는 얼굴을 한 손으로 감쌌다. 아, 왜 일은 아빠가 저질렀는데, 수치는 나의 몫인가. 얼굴이 저절로 홧홧해졌다.

‘밥 먹고 방에 불러서 할 얘기 있었는데!’

저 원수 같은 아빠 때문에 눈치 보여서 못하게 생겼다. 나는 아빠를 조용히 째려보며 단호히 말했다.

“얘랑 그런 사이 아니고요. 얘도 저 그렇게 안 봐요.”

그치? 내가 확인하듯 묻자 반휘혈도 당연하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굉장히 담백한 이 반응에도 아빠는 여전히 석연찮아 보였다. 그리고 옆에 있던 엄마는 뭔가 아쉬워하는 기색이었…,

‘…엄마?’

믿었던 엄마의 배신에 나는 잠시간 충격을 받았다. 곧 정신을 차린 난 입꼬리를 한껏 내리며 두 사람을 노려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얘랑 그럴 일 없어요! 너도 다 먹었으면 잠깐 나 좀 봐.”

반휘혈이 내 말에 바로 수긍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에서 나를 부르는 아빠의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 무시했다. 그리고 성큼성큼 방 안으로 향해 반휘혈까지 집어넣은 뒤, 문을 닫아 버렸다.

“이수야! 네가 따라 들어가!”

“예? 완전 싫어요!”

문 너머에서 아빠가 황급히 서이수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서이수가 치를 떨며 싫어하는 것까지 들은 나는 뻐근해져 오는 뒷목에 고개를 꺾으며 주물렀다.

“아오…. 진짜 남자 못 붙여서 한 맺혔나….”

그래. 이번 정황은 좀 의심쩍다는 것 이해한다. 하지만, 아니라고 완강히 부인하는 딸 말도 좀 들어 줘야 하지 않나? 진짜 내가 속 터져서 못살겠다. 진짜 삐뚤어져서 막 사귀어? 어? 나이 따위 따지지 말고 한번 시작해 봐? 늦바람이 왜 무서운 건지 알려줘 버려? 어?

“누나.”

점점 얼굴이 험악해지는데, 옆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얘도 방 안에 있었지, 참. 그건 그렇고 남들 다 있을 때 입 꾹 다물던 놈이 저와 단둘이 있자 말을 걸어 오다니… 이것 참….

‘기분 좋네.’

방금까지 나빴던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아니, 좀 많이 좋아졌다. 왠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이 우월감은 대체 뭘까. 뭔가 속 좁고 유치한 느낌도 들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내가 얘한테 특별한 위치인 것 같았다. 어, 음. 아마도. 어쨌든, 괜히 동생 하고 싶다고 한 건 아닐 거 아닌가?

비죽 솟으려는 이 눈치 없는 입꼬리를 어떻게든 억누르며 나는 헛기침을 해 댔다.

“흠흠. 우리 가족… 특히, 아빠가 유난이라 피곤하지? 내가 대신 사과할게.”

“별로.”

반휘혈은 정말 별생각 없었는지 말만큼이나 무감한 반응이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나는 멋쩍게 뒷목을 쓸다가 눈앞에 보이는 방 안을 보고 안색을 굳혔다. 아, 그러고 보니 요새 시험 기간이랍시고 방 청소를 하나도 안 해서 그런지 옷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아, 아하하…. 요새 바빠서 방 청소를 안 했더니… 자, 잠깐만…!”

나는 민망히 웃음을 흘리며 주섬주섬 방 안 곳곳에 널브러져있는 속옷이며, 교복이며, 운동복들을 주워 들고 옷장 안에 쑤셔 넣었다. 얼추 정리가 되자 나는 차마 먼지 쌓인 바닥엔 앉힐 수 없어 책상 앞에 있던 의자를 꺼냈다.

“방이 지저분해서 미안하다…. 여기라도 앉아.”

반휘혈은 내가 가리키는 곳에 별 대꾸 없이 앉았다. 딱히, 깔끔을 떠는 성격은 아닌가 보다. 정말 다행이었다.

“음, 그래. 그러니깐… 어, 휘혈이 너 하교 이후엔 보통 뭐 해?”

그래도 방 안에 오래 이 녀석을 둔다는 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지저분한 내 방 때문도 있었지만, 저 문밖에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지 몰랐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본론을 얘기하고 내보내는 게 급선무였다. 그리고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평일엔 수요일 빼곤 전부 야자라 너랑 못 마주칠 것 같거든. 아무래도 너희 아버지가 집에 계시니 우리 집에서 며칠간 지낼 거 같은데… 미안하지만, 내가 평일에 너 챙겨 주지 못할 거 같아서.”

야자 째서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내 머리가 워낙 돌머리인지라 제대로 공부할 시간이 필요했다. 집에서도 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안타깝지만 집중이 전혀 안 됐다.

“딱히 어디 안 가고 바로 집에 가는 스타일이라면, 이수한테 한동안은 체육관 말고 집에만 있으라 해도 되고.”

“…….”

“뭐, 아니면 엄마한테 따로 말해서 집에 있어도 돼. 어차피, 아빠는 체육관 정리하느라 밤늦게 와서.”

이럴 경우엔 엄마한테 제대로 사정 설명을 해야겠지만… 이건 이 녀석이 선택할 문제였다.

반휘혈은 내 말에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말이 없는 그 녀석을 보다가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이 떠올랐다.

“아, 아니면 도훈이나 재현이, 시원이네서 신세 지는…. 아, 그건 싫구나.”

좋은 생각이라고 꺼낸 말이었지만 찌푸려지는 녀석의 얼굴을 보고 바로 다시 집어넣었다. 아니, 근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보단 오래 알고 지낸 걔네들이 더 낫지 않나? 특히, 한도훈은 더더욱 말이다.

“전부 그 인간이랑 연결돼서 싫어.”

“응?”

지금 상황에서 그 인간이라고 한다면… 반휘혈 아버지란 작자뿐이었다.

“특히 한도훈네는 더.”

반휘혈은 상상도 싫은지 평소 그리 드러내지 않던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며 질색해 하고 있었다.

‘어, 음. 집안끼리 커넥션이 있다는… 뭐 흔히 부자들 사이에 있는 그런 걸 말하는 건가…?’

나름대로 추측해 보았지만, 역시 직접 듣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 전부터 궁금했는데… 걔네들이랑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야?”

특히 한도훈. 걔. 그 녀석이 말하는 걸 듣다 보면 서로 꽤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뒷받침하듯 반휘혈은 내 말에 못마땅한 듯이 얼굴을 굳히더니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한도훈은 유치원 때부터.”

마치 질기고 질긴 인연이란 것처럼 반휘혈은 꽤나 마땅치 않은 얼굴이었다.

“다른 녀석들은 중학교 때부터.”

그리고 한도훈을 얘기할 때와 달리 이번엔 좀 더 유순한 반응이 나왔다. 유순하다고 해도…뭐… 그냥 감흥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말이다.

“아, 그래… 어, 근데 가족들이 연결됐다고?”

안 지 얼마 안 됐는데?

“이재현은 의사, 법조인 집안. 김시원은 사설 경비업체 사장 아들.”

“아, 그렇군.”

나는 그 말에 바로 납득해 버렸다. 게다가 더 파고들고 싶지 않아졌다. 복잡한 부자들의 세상 따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 그보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 녀석들 집안 스펙 왜 이래! 나 아직 반휘혈 집안도 잘 모르는데! 얜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진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오랜 기간 집안 간의 교류가 유지된 한도훈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이런 놈들이 대체 왜 평범한 중학교에 다니는 거야…? 그냥 돈 빵빵한 사립 중학교 가도 되는 스펙들 아냐…?’

그들의 부모들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냥 평범한 일반 중학교에 보낸 건지 의아해질 지경이었다. 아, 그만 생각하자. 어차피, 저 같은 서민은 그들의 생각 따위 이해하지 못할 게 뻔했다.

“어… 그렇다면, 뭐… 어떻게 할진 잘 생각해 보고 너 좋을 대로 결정해. 난 주말에나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으니….”

반휘혈은 내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가 나를 흘긋 보며 말했다.

“…학교 앞에서 기다리는 건?”

“어. 안 돼.”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도 말렴. 네가 떡하니 교문 앞에 있으면 학교가 뒤집어질 게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펜이 내 손에 퍽이나 잘 잡히겠다.

“어휴…. 그냥 집에나 얌전히 있어. 내가 엄마한테 잘 설명해 둘게.”

내 단호한 거절에 녀석이 눈에 띄게 풀이 죽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엄마를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반휘혈은 여전히 내 말에 못마땅해했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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