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오해는 되도록 빨리 푸는 게 좋다 (5)
“이수도 집에 데려다 놓을 테니까 편히 있어.”
아무래도 혼자 있는 것보단 집에 있을 구실을 더 만들기 편하겠지 싶었다. 반휘혈도 더는 내 말에 토를 달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대답에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녀석을 내보내기 전, 이곳에 불렀던 또 다른 이유를 꺼내려고 했다. 실은 이걸 위해서 이 녀석을 방에 부른 거나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그래… 아, 그리고 하나 더 할 말이 있는….”
덜컹. 하고 작은 소음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들려선 안 되는 그 소리에 눈을 가늘게 뜨며 문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 소린 대체 뭐였지. …설마,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확 열어젖혔다.
“헉….”
“저럴 줄 알았다.”
“에휴….”
“…….”
나는 문 앞에서 쪼그린 덩치 큰 아저씨를 무감각하게 내려다봤다. 거실에서 엄마의 야유와 서이수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인간은 주위의 만류에도 억지로 이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나는 점점 뻐근해져 오는 뒷목을 슬슬 주무른 후, 돌아보지 않은 채 반휘혈에게 말했다.
“…휘혈아, 나 잠깐 나갔다 올게.”
그리고 나는 녀석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바로 문을 닫았다. 그리고 거실엔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요 몇 년간 내 기색에 예민해진 서이수는 이미 방 안으로 피신한 지 오래였고, 엄마도 슬쩍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곤 아직까지 쭈그려 앉은 아빠를 내려다봤다.
“이, 이나야… 이, 이건 널 걱정하는 차원에….”
“아빠.”
‘저희 나가서 얘기 좀 할까요?’ 나는 상큼히 웃으며 말했고, 아빠의 안색은 더 새파래졌다.
그리고, 늦은 야심한 시각, 어느 아파트의 한구석의 공원에서 험악한 인상을 가진 소녀가 덩치가 우락부락한 아저씨에게 온갖 잔소리로 쏟아지는 참상이 벌어졌다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고 귀가하던 어느 한 아파트 주민은 말했다.
***
“흐으암~.”
짹짹. 참새가 지저귀는 아침이 되었다. 나는 졸린 눈을 부여잡으며 꾸물꾸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그토록 기다리던 주말 아침. 적당한 수면을 취하고 일어난 아침은 너무나도 개운했다. 10시를 가리켜 가는 시각을 확인한 난 느그적거리며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일어났어?”
“안녕히 주무셨어요오….”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자고 일어나 팅팅 부은 눈을 비비며 화장실 문을 열려는데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서이수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부릅떴다.
거기엔 수분을 촉촉이 먹어 머리칼에 물기를 뚝뚝 흘리면서 아주 고혹적인 분위를 뽐내는 미소년, 아니, 미청년이 서 있었다.
“…….”
그리고 그 미친 매력을 발산하는 깊은 눈이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그 환상 같은 미인에 침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내,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아직 잠이 덜 깬 건가?’
툭툭.
한순간 넋을 잃었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건드리고 눈앞에 손이 왔다 갔다 하자 나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쓰읍…. 어? 반휘혈? 어어?”
나는 눈앞에 존재가 누군지 드디어 깨달았다. 황급히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으면서도 순간 판단이 안 돼서 나는 멍청히 눈만 깜빡였다. 아니, 얘가 왜 우리 집에…, 라고 생각했다가 지난 3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동안 우리 집에서 잤었지….’
그동안 등교 시각이 다르다 보니 자연히 아침 기상 시각이 달랐다. 거기에 나는 야자를 하다 보니 집에 11시가 다 돼서야 도착했다. 당연하게도 집에는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뛰어들어 딥 슬립. 그래서 요 며칠간 이 녀석의 얼굴을 볼 새가 없었다. 조금 예상하긴 했지만 정말 이렇게 될 줄이야.
‘…그래도 데려와 놓고 방치한 기분인데.’
주말이 되고 나서야 처음으로 얼굴을 맞이하는 아침이다 보니 왠지 미안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리 아침부터 존엄한 얼굴이라니. 눈뜨자마자 제대로 눈 호강 했다. 나는 다시 흐를 것 같은 침에 억지로 꿀꺽 삼키고 민망히 인사를 했다.
“어…, 잘 잤어?”
끄덕.
반휘혈의 대답에 나는 ‘그렇구나….’ 하며 이어서 화장실에 들어가려 했다. 어서 이 지저분한 몰골 좀 정리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간 신경 쓰지 못했지만 역시 집 안에 낯선 남자가 있다는 건 알게 모르게 눈치 보게 되었다. 그게 어리든 안 어리든 간에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 서이수가 제 동생이란 걸 알았을 때도 한동안 집 안에서 돌아다니던 걸 멋쩍어했던 게 떠올랐다. 보통은 머리가 알고 마음이 모른다던데… 나는 어째선지 마음이 알고 머리로 괴리감이 일어나고 있었었다. 너무나도 이상한 그 감각에 몸서리를 크게 쳤었는데… 지금은 그 자식과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 역시 2년 정도 동거를 하다 보면 적응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나 보다.
‘아니, 그보다 저 멀쩡한 얼굴에 그런 엉뚱한 고백을 말한 놈이 쟤인데 신경 안 쓰이겠냐고….’
이 세계가 인소라 그런가, 정말 생각도 못 했고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고백 같지 않은 고백이었지만…. 그래도 이왕 의동생 같은 걸 고백해 왔으니… 좀 번듯하고, 멋지고, 어? 의젓한 누나로 보이고 싶었다. 이미 글러 먹은 것 같지만 어쨌든 그러고 싶었다! …음? 잠깐, 나 뭔가 아주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기분이 드는데… 뭐였지?
“…….”
아, 아무튼…! 그건 그렇고 이 녀석이 나를 도와주질 않고 있단 건 확실했다. 나는 화장실을 떡하니 막은 커다란 몸에 떨떠름히 녀석을 올려다봤다.
‘너는 이 산발이 보이질 않는 거니? 이 추레한 몰골이 보이질 않아?’
한시라도 빨리 깔끔하고 멋진 누나가 되어 주겠다는데 왜 동생을 자처한 네가 막는 거니. 친동생인 서이수란 놈은 매번 내 몰골을 보면 어서 빨리 씻으라며 눈이 썩어 들어간다는 혹평을 가감 없이 날려서 친히 내 주먹을 샀는데 말이다.
“흠흠…. 휘혈아?”
결국 아무리 기다려도 비켜 줄 기미가 보이질 않아 나는 반휘혈을 불렀다. 어서 비키라는 뜻으로 손도 함께 휘휘 내저으려는데, 갑자기 반휘혈이 내게 불쑥 다가왔다.
“…잘 잤어?”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속삭여졌다. 나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귀를 팍 막고 거리를 벌렸다.
‘뭐, 뭐야! 방금 그거?!’
오소소하니 온몸에 닭살이 돋는 것 같았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받은 타격에 당황해 녀석을 바라봤다. 그런데 반휘혈은 내가 갑자기 기겁하자 오히려 제가 더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나는 그 반응을 확인하곤 뒤늦게 자신이 과하게 굴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 음. 가, 갑자기 귀에 속삭여 가지고 놀라서… 나는 보다시피 아주 잘 잤고…… 어….”
그래서 서둘러 항변하는데… 좀체 펴지지 않는 녀석의 굳은 얼굴에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아, 그게, 내가 잠이 덜 깨서… 그래서 갑자기 다가와서 놀라서 그런 거야. 누가 그래도 똑같을걸? 네가 불편해서 그런 게 아니라… 아니, 무엇보다 그렇게 갑자기 접근하는 건 아무리 누나, 동생 사이라도 좀… 아니, 서이수가 그랬으면 바로 주먹부터 날아갔을 것 같지만….”
말하면서도 머리가 아파 왔다. 왜 내가 이걸 변명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대체 뭐 하는 건지….
“그보다 너 목소리 좀 바뀌지 않았냐…?”
속삭여졌던 귀가 간지러워 북북 긁고 있다가 문득, 평소와 다른 괴리감을 발견했다. 분명 며칠 전엔 이것보단 좀 더 미성이었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낮아진 거 같지? 변성기가 거의 다 끝났나?
“글쎄.”
반휘혈은 잘 모르겠다는 듯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다. 자기 목소리는 스스로 알지 못한 법이었다. 나는 뒤늦게 쓸데없는 말을 했다는 걸 자각하고 민망히 뒷목을 주물렀다.
“어…, 그냥 느낌이 그렇다고… 근데, 좀 비켜 주지 않을래?”
뻘쭘하게 화장실을 가리키며 비켜 줄 걸 요청하자 반휘혈이 스윽, 몸을 비켜 길을 터 줬다. 아니, 이렇게 쉽게 비켜 준다고? …진즉에 말할걸. 나는 뒤늦은 후회를 달며 비켜 준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세면대에 팔을 짚으며 얼굴을 굳혔다.
‘나, 대체 왜 쟤를 데려온 거지?!’
지금 생각해 보니 다분히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이전의 자신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을 지금의 자신이 해 버렸다. 며칠 전 당시만 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었지만, 며칠이 지나 정신이 맑은 아침이라 그런지 이성이 돌아왔다.
내가 원래 이렇게 감성적이었나…? 아니. …아니. 그렇지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충동적이지도 않고, 오지랖도 넓은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런 선택을….
‘설마 나도 이 세계의 영향을 받기라도 하는 건가?’
생각해 보면 반휘혈을 위로해 줬을 때도 이전의 나… 즉, 이 세계로 오기 전의 자신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모습도 있었다.
“…이게 뭐야?”
덜컥, 미지의 두려움에 심장이 내려앉고 속이 울렁였다.
삼켜지는 건가? 이 세계에? 이전의 내 삶, 내 가족을 잊고…?
숨이 가빠졌다. 나는 쿵쾅쿵쾅 뛰는 심장과 함께 시야가 흐려져 황급히 그 자리 주저앉았다.
‘진정, 진정하자.’
나는 의식하며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손발이 덜덜 떨려 와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세상에 물들어 간다는 걸 의식하지 못할 때가 점점 늘고 있다. 이전의 나와의 차이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제는 점점 이전의 삶이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아니야….”
나는 다시 울렁이는 속에 바로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이었다. 여기서 계속 살 건데 계속 붕 뜬 존재일 수는 없었다.
이전의 자신은 이렇게 감성적이고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아니었던 건 확실했다. 그런데, 몸이 어려서일까, 아니면 이 세계의 영향인 걸까. 전보다 꽤나 감성적이고 섬세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나쁜 건지, 좋은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괴리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피부에 오소소 돋아난 닭살을 쓸다가 거울을 봤다.
거기엔 이제는 익숙한, 어린 날의 자신이 머리가 산발인 채 꾀죄죄한 몰골로 있었다.
“…….”
우선 씻고 나서 생각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