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33화 (33/306)

33. 오해는 되도록 빨리 푸는 게 좋다 (6)

***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화장실에서 씻고 나왔다. 그리고 보인 광경에 턱이 떨어질 뻔했다.

“아, 이것도 저기에 놔둬 줄래?”

“네.”

“조금만 기다려~. 금방 다 되니깐.”

“네.”

뭐야, 저 오붓한 광경은. 나는 환각인가 싶어 눈을 비볐다. 오늘만 해서 두 번째였다. 하지만, 눈을 비비고서도 보이는 건 변하지 않았다.

하하 호호 하며 기분이 좋아 보이는 엄마와 그런 엄마의 지시를 따르며 식탁에 수저를 세팅하는 반휘혈. 그 모습은 가히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저, 저게 뭐야.’

딱 벌어진 입을 수습하지도 않고 멍하니 그들을 보고 있는데 반휘혈이 그런 나를 발견했다. 그는 내 멍청한 얼굴에 의아한 얼굴이었지만 곧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반찬을 나르기 시작했다.

“어머, 우리 휘혈이는 과묵하니 잘하네~. 이수는 뭐 하나만 시켜도 투덜거리는데~.”

엄마는 차마 피어오르는 웃음을 억제하지 못하겠던지 입꼬리가 아주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보니, 평소 귀찮다고 집에서는 위아래 짝짝이로 입는 게 일상이었는데 투피스 세트까지 제대로 갖춰 입고 계셨다.

난 그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저, 저 유부녀도 홀릴 마성의 미모를 보았나. 아직 중학생밖에 안 됐으면서 주변 여성들을 죄다 홀리고 있었다. 나도 순간, 저 미모에 홀릴 뻔했지만….

…양심 챙겨, 서이나! 너랑 쟤는 열여섯이나 차이 난다고! 그거 범죄야! 범죄! 게다가 쟨 너 여자로 안 보고 누나로 보고 싶다잖아! 정신 똑바로 챙겨!! 아니, 물론 쟬 남자로 본 것도 아니긴 하지만…! 그 고백을 아주 잠시라도 진지하게 생각했던 사실이 무안한 건 맞았다. 나는 볼을 짝짝 두드리며 잠시 놓쳐 버린 정신 줄을 챙긴 후, 저 화기애애해 보이는 식탁으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

“휘혈이 많이 먹으렴~. 가리지 않고 잘 먹네. 아, 이것도 먹어.”

내 젓가락이 뻗고 있던 반찬이 스윽 사라졌다. 나는 허공에 젓가락질을 하다가 엄마를 슬쩍 보았다. 엄마는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이 만개해 있었다. 왠지 모를 차별에 항의하고 싶었지만 고작 반찬 하나로 툴툴거릴 순 없었다. 무엇보다 쟤가 내 손님이었고 말이다.

‘그래, 식구보다 손님 챙겨 주는 게 먼저지.’

나는 떨떠름히 엄마를 보다가 다른 반찬을 집어 먹었다.

“아, 그동안 잘 지냈어? 이수 침대는 몸에 맞아?”

나는 우물우물 밥을 씹고 난 뒤 뒤늦게야 안부를 물었다. 자신이 데려온 손님인데 요 며칠간 너무 방치했던 게 아무래도 좀 신경 쓰였다. …뭐, 내가 신경 쓰지 않았어도 잘 지낸 것 같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예의상 물어봐 주긴 해야겠지.

…끄덕.

반휘혈은 내 물음에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성에 찬 대답은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음 된 거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이수는? 체육관?”

“그래.”

“…요즘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성실해?”

틈만 나면 농땡이 피우던 놈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나는 신기하고도 의아한 마음에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요새 아빠가 스파링 봐 준다나 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몰라.”

“…아빠가?”

나는 생각도 못 한 말에 반찬으로 뻗던 젓가락질을 멈췄다.

‘진짜 무슨 바람이지…?’

그 똥고집이? 웬일로? …설마, 전에 얘기 나눴던 게 통했던 건가? 나는 눈을 껌뻑이다가 비죽, 웃음을 흘렸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흐음. 잘됐네.”

“그렇지? 이나 너도 나중에 체육관 갈 거지?”

“그래야지.”

“너무 무리하진 말고. 곧 기말고사잖아.”

나는 그 말에 입맛이 급격히 뚝 떨어졌다.

“…밥상머리에서 공부 얘긴 하지 맙시다.”

갑자기 들이밀어진 현실에 우울해졌다. 안 그래도 지난 중간고사 성적으로 입은 타격이 덜 나았는데 벌써 또 기말고사라니. 이게 무슨 일이람.

“이건 사기야. 내 시간 대체 어디로 사라졌지…?”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벌써 한 해의 상반기가 다 지나가고 하반기가 시작되려는 게 믿기지도 않는데, 벌써 기말고사라니. 내 인생은 대체 어디로 허비된 건가.

“그 도망간 시간 돌아오지 않으니까 후딱 밥이나 먹어라.”

“너무해….”

잔인한 엄마의 말에 나는 좌절했다. 이 공부에 찌들어 피폐해진 딸이 안 보이나요? 네?

“공부….”

그때, 옆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엄마 앞인데 말을 다 하네…? 그 희소성 이제 다 포기한 거니…? 대체 나 없는 며칠 사이에 둘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휘혈이도 곧 기말고사겠네~. 아, 참. 고등학교도 지원할 때지?”

“네.”

엄마의 물음에 반휘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진학할 거니? 이수 녀석은 공부하기 영 글러 먹어서 일반고보단 상고나 공고 지원할 거 같던데.”

“아직….”

나는 답을 정하지 못했다는 말에 의아하게 녀석을 바라봤다. 당연히 이 녀석도 상고나 공고에 갈 줄 알았던 터라 그 말이 의아하게 들렸다. 남주나 서브남주는 보통 상고나 공고지 않던가. 근데, 아직도 진로를 정하지 못한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다음 학기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 부모 입장으로선 아무래도 일반고가 낫긴 하지만… 공부가 적성이 안 맞으면 다른 방향도 나쁘진 않아.”

엄마는 진지하게 조언했다. 이 얘기는 나는 듣지 못했던 얘기였다. 아니, 할 필요도 없는 얘기였으니 당연했다. 지난 삶에선 운동특기자로 체육고에 갔고 이번 생에선 공부한답시고 일반고에 우격다짐으로 넣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런 소리를 들을 기회가 만무했다.

“아유, 이런 얘기 불편하지? 아줌마가 주책이야, 정말. 신경 쓰지 말고 먹어, 먹어. ”

엄마는 가라앉은 분위기에 손사래를 치며 반찬을 반휘혈에게 밀었다. 반휘혈은 그걸 말없이 받아들였다.

“어쩜~. 부모님은 좋으시겠네~. 밥투정도 안 해~.”

그리고 다시 시작된 엄마의 주접에 나는 한숨 쉬듯 웃다가 반휘혈을 슬쩍 보았다. 녀석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얼굴로 얌전히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그걸 잠시 동안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식사를 마저 했다.

***

“다녀올게요.”

꾸벅.

나와 반휘혈은 나가기 위해 현관문 앞에 섰다.

“그래~. 차 조심하고.”

나는 알겠다며 엄마한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문을 나서고 반휘혈을 쳐다봤다.

“근데 넌 왜 나온 거야? 나 따라오게?”

딱히 얘기된 내용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레 같이 나온 모습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혹시나 싶어 나를 따라오는 건지 묻자 반휘혈은 당연하단 얼굴로 대답했다.

“응.”

“어…, 그래.”

너무 당당한 태도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딱히 싫지는 않았지만 내 뒤를 졸졸졸 따라다니는 게 꽤나 이상한 느낌이었다. 특히, 반휘혈이 그런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했다.

“근데, 나 뛰다가 체육관 갈 거야.”

“구경할게.”

“…체육관 가면 너 상대 안 해 줄 수도 있어.”

운동에 집중하고 있으면 누군가를 신경 쓰지 못했다. 그래서 걱정되는 마음에 말했으나 반휘혈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거기 한도훈도 있으니까, 심심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건 그래.”

반휘혈의 말에 나는 바로 납득했다. 걔가 참… 사람 심심하지 않게 하는 덴 재주 있긴 하지.

“그럼 재현이랑 셋이서 놀고 있어. 걔네들도 회원은 끊어 놔서 운동은 하겠다만… 서이수는 회원 관리 하느라 바쁠걸.”

끄덕, 반휘혈의 긍정을 끝으로 대화가 끝났다. 원래 둘 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라 대화는 언제나 짧게 이어졌다.

나는 적막을 느끼며 반휘혈을 잠시 힐끔 보았다. 앞만 보며 걷던 녀석은 불현듯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사탕?”

그리고 그것의 정체는 놀랍게도 사탕이었다. 내가 놀라서 그것을 빤히 보니 반휘혈은 들고 있던 걸 내게 내밀었다.

“줘?”

“어? 어.”

반사적으로 답하자 사탕이 내 손 위에 안착했다. 아니… 근데 너 원래 사탕도 들고 다니는… 그런 애였니? 게다가 맛도 딸기 맛 사탕이라니, 갈수록 이 녀석이 어떤 놈인지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다. 너무나도 의외의 정체에 나는 먹지도 않고 그걸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뒤늦게 봉지를 뜯었다.

“이 맛 좋아해?”

“그냥 그래.”

반휘혈이 시큰둥하니 대답했다. 그래. 넌 딸기 맛보다 박하 맛이 어울리긴 하지…가 아니라! 나는 사탕을 털어 먹다 말고 눈썹을 찌푸리며 녀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왜 가지고 다녀?”

“한도훈이 준 거야.”

“아. 그렇군.”

무슨 마법인지 모르겠지만 한도훈이란 이름에 다 납득이 갔다. 그러다가 문득, 얘가 이걸 왜 줬지, 싶어졌다.

“근데 이걸 걔가 왜 줘? 너 사탕 먹는 거 본 적 없던 것 같은데.”

아주 오랫동안은 아니어도 약 반년 정도 이 녀석을 봐 왔던 터라 사탕 먹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녀석에게 사탕이 불쑥 나오니 이상했고, 그걸 준 한도훈의 의도도 모르겠다. …만약, 한도훈이 줬어도 그 자리에서 버린다거나, 못해도 주머니나 가방에 썩혀 둘 것 같아서 더 그랬다.

“…금연한다니까 줬어.”

“아~, …응?”

금연?

“너 진짜 금연하려고?”

한 번도 담배를 피워 본 적은 없지만, 그게 보통 각오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서이수는 담배를 피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라 금방 끊었지만 이 녀석은 적어도 반년은 넘게 피었을 거란 추측이 들었다. 그리고 거의 식후땡도 하는 놈이 이놈…,

‘아. 방금 밥 먹었지.’

그래서 이건 식후땡 대용? 나는 입 안에 대충 돌아다니던 딸기 맛 사탕을 혀로 톡톡 건드렸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