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난처한 부탁 (2)
나는 그 말에 울컥하며 서이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도 딱히 의도해서 말한 건 아니거든!”
“그래서, 둘이 진짜로 무슨 관계인데? 아니, 그보다 난 걔가 그렇게 말 많이 하는 것도 처음 봤어. 진짜로.”
“아, 하긴. 그렇긴 하겠네.”
평소 공기 취급당하던 동생 놈을 떠올린 나는 서이수의 뒷말에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그 반응은? 누난 자주 들었단 거야?”
“뭐… 단둘이 있을 때 정돈?”
나는 황당해하며 묻는 서이수의 말에 적당히 긍정해 주자 서이수의 얼굴은 정말 알 수 없는 생명체를 발견한 것처럼 찡그려졌다.
“진짜 둘이 안 사귀는 거 맞아?”
안 그럼 걔가 그런 식으로 구는 게 좀체 상상이 가질 않는다며 서이수는 중얼거렸다. 알지. 알고말고. 설마 나도 걔가 나한테만 이렇게 편애를 해 줄지 상상도 못 했는걸. 그런데, 동생아. 몇 번을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란다. 그걸 좀 명심해 줬으면 좋겠구나.
“다시 한번 이야기하는데, 나 걔랑 진짜 안 사귀고, 그 대화는 우연의 산물 같은 거야.”
“…난 너희 둘의 관계가 이해가 안 돼.”
응. 실은 나도 그래. 나는 뒷말을 삼키곤 한숨을 푹 내쉬며 근처의 자리에 앉곤 옆자리를 두드렸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앉아서 얘기하자.”
서이수는 내 말에 군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곤 머리를 긁적였다. 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어디까지 얘기를 해야 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슬쩍, 옆에 앉은 서이수를 보자니 녀석은 내 말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곤 체육관 중앙에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기까지 대충 30분 정도 남아 있었다.
‘이거 참. 이제 와서 피할 수도 없고….’
나는 자꾸만 내쉬어지는 한숨을 또 내뱉으며 피로한 눈을 쓸어내렸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얘기하자. …반휘혈 가정사는 빼고.
“실은 말이지….”
그렇게 난 최대한 머리를 굴리며, 반휘혈의 가정사를 제외한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
“아니, 걘 대체 뭐 하는 놈이야?”
가정사를 뺀 모든 말을 들은 서이수의 총평은 이러했다. 참으로 가차 없는 평가였다. …아니, 가정사를 뺐으니 당연히 이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나…?
서이수는 도무지 이해 못 할 놈을 들은 것처럼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내게 들은 말을 생각해 보려던 모양인지 녀석은 인상을 찌푸리며 침묵하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방금보다 더더욱 일그러진 상태였다.
“진짜 뭐 하는 놈이야?”
다시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그래, 나도 알아. 설명이 부족한 거. 가장 중요한 걸 말 안 했으니 이런 반응인 게 당연했다.
뜬금없이 서이수 네가 부러워서 동생이 되고 싶다는 것도 모자라선 내가 아직 안 받아 줬다는 한 마디에 삐져서 돌아간 놈이 이해가 안 가는 게 당연하지. 암. 내가 말해 놓고도 나도 이해가 안 가는걸.
“그딴 걸로 걔가 삐… 아니, 화를 내서 돌아갔다고?”
너 방금 삐졌다는 말 쓰려 했지? 말하다가 인지 부조화가 나서 말을 돌린 동생 놈의 꼴에 나는 웃음을 참았다. 아, 웃긴 녀석 같으니. 덕분에 좀 웃네. 어찌 됐든, 쌓여 있던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풀렸던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줬다.
“뭐… 대충 그런 거야.”
“대충? …누나, 너 나한테 뭐 숨긴 거 있지?”
…이럴 때는 꼭 예리하더라, 얘는. 나는 슬며시 눈을 돌려 자신을 노려보는 서이수의 시선을 피했다. 서이수는 내 행동에서 답을 찾았던지 발끈하며 소리쳤다.
“아, 솔직하게 말해 준다며!!”
“동생아, 사람에게 있어선 사생활이란 게 있단다.”
“아, 궁금하다고!! 알려 줘!! 알려 달라고!!!”
나는 달려드는 동생 놈의 머리를 꾹 누르며 시간을 슬쩍 봤다.
“어이쿠, 회원들 올 시간이네. 난 이만 가 봐야겠다. 이따 집에서 보자.”
이 순간 나는 그 누구보다도 재빠른 몸놀림으로 가방을 낚아채며 체육관 문을 나섰다. 샤워는 어차피 집에서 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요즘 날이 더워져서 가면서 또 땀은 흐를 테니, 상관없었고 말이다.
닫힌 문 너머로 시끄럽게 왁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지만, 나는 무시했다. …뭐, 그래도 덕분에 좀 시원하긴 하네. 나는 한층 밝아진 얼굴을 느끼며 방금과는 달리 사뭇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아, 내려왔다.”
“왁!!!!!”
그리고 갑자기 옆에서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하마터면 발을 헛디뎌 겨우 하나 남은 계단에서 구를 뻔했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겨우 중심을 잡은 나는 쿵쿵 떨려 오는 심장을 억누르며 부릅뜬 눈으로 옆을 바라봤다.
“얘기는 잘 마쳤어요?”
거기엔 눈을 휘며 웃고 있는 한도훈이 있었다.
“너어… 왜 여기에….”
나는 예상치 못한 인물에 등장에 놀라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한도훈은 그런 나를 향해 빙글빙글 웃더니 슥, 하고 엄지로 밖을 가리켰다.
“우리 자리 좀 이동할까요?”
“어, 나는 싫은데….”
한도훈의 제안에 나는 대번에 싫은 표정을 지었다. 한도훈은 그런 내 얼굴에도 개의치 않았던지 연신 웃어 보였다.
“그러지 말구요. 저 누나랑 할 말 있어요.”
“난 없는데.”
나는 서이수랑 약속을 했지, 너랑 약속하지도 않았고 말이야.
어쩐지 저 뻔뻔한 태도가 반휘혈을 연상시켰다. 옛날부터 아는 사이랬던가? 오래 알고 지냈다고 저런 부분을 닮다니, 참으로 통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니면, 부자들은 다 저래?
“나 간다. 들어가라.”
“휘혈이 얘기 좀 해요. 우리. 저 진짜 할 말 있어서 그래요.”
하지만, 한도훈은 꽤나 질긴 놈이었다. 그래. 그러니 네가 반휘혈 곁에 계속 있을 수 있는 거겠지. 저 정도의 근성 없이는 힘들지. 암.
결국 자꾸만 붙잡는 녀석의 손길에 나는 질린 눈으로 한도훈을 돌아봤다. 한도훈은 그런 내 시선에 억울한 듯 눈썹을 뉘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전 진짜 순수한 마음으로 대화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그 말을 하곤 한도훈이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이래 봬도 누나 꽤 좋아하거든요. 반휘혈 걔 때문에 불편한 사이 되고 싶지 않아요.”
“…….”
나는 뜬금없는 고백에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한도훈의 말은 연정의 의미는 아니었다. 즉, 반휘혈처럼 오해를 부르는 말이 아니란 뜻이었다.
“하아….”
그렇다고 한숨이 안 나오는 건 또 아니었다. 얘네들은 왜 날 귀찮게 못 해서 안달인 걸까? 내가 진짜 오늘만 해서 한숨을 몇 번 쉬는지 모르겠다. …내 복 다 달아나면 너희 때문이야.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시큰둥하니 말했다.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
그 말에 한도훈이 크게 웃음 지었다. 너무나도 밝은 미소에 나는 순간 상황도 잊고 놀라 버리고 말았다. …내 대답이 저렇게까지 기쁠 일이었던가?
“우선 차에 타요, 누나.”
내가 얼떨떨해하는 동안 한도훈은 덥석 내 손목을 붙잡더니 밖으로 이끌었다. 아니, 진짜 얘네들은 왜 이렇게 스킨십을 이렇게 덥석덥석해?! 내가 눈을 부릅뜨고 놀라든 말든 한도훈은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자 눈에 보이는 건 고급 리무진이었다.
“워….”
이, 이거, 지금 내가 타도 되는 거야…? 나는 나를 태우려던 한도훈을 급히 멈춰 세웠다.
“도훈아, 잠깐… 내가 샤워를 안 했는데…, 어… 이 상태로 이 차에 타는 건 좀….”
설마 클리닝 비용을 부담해야 되진 않을까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게다가 이런 고급 차량에 땀 냄새를 풍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걱정 마요. 저도 오늘 서이수가 내쫓아서 안 씻고 나왔어요. 그러니까 얼른 타요, 얼른.”
“어, 어? 야, 잠깐…!”
한도훈이 두 손을 사용하는 것도 모자라 온몸을 이용해 차 안으로 나를 떠밀었다. 나는 말릴 새도 없이 들어간 몸에 눈을 끔뻑이다가 곧 현실을 자각하고 허리를 바로 했다.
“누나, 편하게 앉아요.”
“너라면 편히… 앉았구나. 그래….”
누가 부잣집 도련님 아니랄까 봐 이런 고급 리무진 안에서 땀에 젖은 몸을 익숙한 듯 편히 뉜 걸 보곤 나는 씁쓸하게 눈을 돌렸다.
‘…이 괴리감은 대체 어쩌지.’
새삼스럽지만 이곳은 인소 세계관이고, 서열이 높은 친구들은 부잣집 도련님이란 사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나는 오늘로 몇 번째일 한숨을 억누르며 피로한 눈을 문질렀다.
“아, 모르겠다. 클리닝 비용 청구할 생각은 하지 마라…. 네가 편히 있으라 했어.”
결국 나는 꼿꼿한 자세를 포기하고 몸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 나는 곧장 눈을 홉떴다.
“뭐야, 그런 거 걱정했던 거예요? 누나는 역시 재밌…, 누나?”
“허얼….”
이, 이게 뭐야? 이 안착감은 대체 뭐야…?! 나는 한도훈의 말을 뒷전으로 들으며 다시 몸을 일으켜 의자를 꾹꾹 눌러 봤다. 와, 미쳤다. 미쳤어. 이 미친 승차감 어쩜 좋아. 이래서 차는 비쌀수록 좋다고 하는 거구나. 대박이네, 진짜.
“크흡….”
한창 신기해하며 눈을 빛내던 중에 옆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비로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악! 나 방금 완전 촌스러운 짓 했잖아…! 나는 저절로 홧홧해진 얼굴에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굴리며 다시 조심스레 몸을 뉘었다.
“왜요? 좀 더 만져 봐도 되는데.”
“피르읍스….”
부끄러움에 이를 악물며 거절해 주자 한도훈은 그게 더 웃겼는지 고개를 돌리고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 이러니깐 누나랑 멀어지기 싫은 거예요.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아, 정말.”
“난 질려도 괜찮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