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37화 (37/306)

37. 난처한 부탁 (3)

너희들이랑 얽매어 있어 봤자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거든. 근데, 이미 선은 한참 넘은 것 같아 나는 입을 뚱하니 내밀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데.”

“당연히 저희 집이죠. 이 상태로 어딜 가요? 아, 차라리 호텔 갈까요? 전 그것도 나쁘지 않아요.”

나는 너무나도 당연히 말하는 녀석의 대답에 바로 반박하려 했으나, 그 뒤에 나온 답에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금 이 두 선택지 중 어디가 더 낫지…?!’

녀석이 내게 이상한 꿍꿍이가 없는 건 알지만, 어쩐지 석연찮았다. 왠지 가지고 놀아지는 기분도 들고 말이다.

“…집이나 가자.”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선택지가 더 좋을지 감이 잡히질 않아 나는 포기한 채 중얼거렸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부자인지 재벌인지 모를 집 좀 구경해 보지 뭐. 나한테 언제 이런 기회가 또 오겠어. 허허.

“그래요, 그럼. 기사님. 집으로 가 주세요.”

“네.”

앞에서 묵묵히 운전을 하던 기사님이 한도훈의 말에 맞춰 대답했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어쩐지 지금 이 상황이 굉장히 이상하다는 걸 지울 수가 없었다. 마치, 다른 세계에 떨어진… 아, 나 다른 세계로 떨어졌지, 참.

퍼뜩 오는 깨달음에 나는 인상을 좁혔다. …정말, 새삼스럽지만 이 세계는 내게 너무나 낯선 곳임을 증명하는 기분이었다. 이제껏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와닿은 적은 없었는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아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

“…오오.”

“…그게 다예요?”

도착한 한도훈의 집을 보고 내뱉은 감탄사가 저것뿐이자 한도훈은 실망한 듯 눈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차에서 그랬던 것처럼 더한 반응을 기대했나 보다. 하지만, 이것밖에 안 나오는 걸 어떡해.

왜냐면, 녀석의 집은 감탄사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으리으리했기 때문이다.

반휘혈네 집 근처에 갔을 때도 느낀 거지만… 아니, 이 주변 빈부격차 너무 심하지 않아? 이미 집이 보이지 않는 대문에서부터 느꼈지만, 막상 문이 열리니 보이는 커다란 정원과 빌라형 고급 주택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혹시 묻는 거지만, 저 주택….”

“아, 저희 집이에요.”

“…전부?”

“네? 당연히 전부죠.”

오…. 지나치게 당연하단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 당연한 거구나. 어…, 그렇구나…. 나는 다가오는 주택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며 침묵을 선택했다. 곧 우리는 차에서 내렸고 나는 한도훈의 안내에 따라 어딘가로 이동했다.

“아무 데나 편하게 앉아요. 누나.”

무슨 집이 이렇게 넓은가 정신없이 구경하던 와중 어느새 한도훈의 방에 도착하니 한도훈이 널따란 소파를 가리키며 평이하게 말을 걸었다. 나는 온몸에 긴장을 새기며 혹시라도 어디 한군데 흠집이라도 날까 안절부절못하며 조심조심 소파로 향했다.

“왜 그렇게 굳었어요? 아, 혹시 저랑 단둘이 있어서…,”

“개소리 그만해라.”

“넵.”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한도훈의 말을 자르며 눈을 데록데록 굴리다가 앞의 테이블에 있는 화분을 바라보았다. 드라마 보면 이것도 엄청 고가이던가 하던데…. 혹시 이것도…? 저절로 삼켜지는 침에 나는 다시 한번 풀어지려는 몸뚱어리를 붙잡으며 한도훈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저기… 도훈아, 이것도 혹시 비싼 거야?”

혹시라도 손이 미끄러져 넘어트려 금이라도 갈까 싶었다. 보는 눈이 없는 제 눈으로 보아도 한도훈의 집은 으리으리했다. 만약 자신이 10년이라도 더 젊었다면, 이렇게까지 긴장하며 있지는 않았겠지만, 사회생활에 몸담아 나름 사회에 찌든 어른이 된 나에겐 이 상황은 거의 고문과도 같았다. 그래서 혹시라도 배상해야 될 일이 생긴다면… 바다에 뛰어들고 싶을지도 모를 일 아니겠는가.

“이거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아, 아주머니! 이거 얼마예요?”

하지만, 한도훈은 별로 신경 쓰지도 않던 모양이었다. 그래. 그게 당연하지. 얘한텐 그냥 일개 장식품 중 하나일 텐데…. 그것도 이렇게 바로 손 닿는 거리에 있는 건 하잘것없는 물건일 게 분명했다. 그래도 한도훈이 그런 반응을 보이니 나는 조금은 안심했다. 이건 생각보다 안 비쌀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들자 몸에 꽉꽉 들어찼던 긴장을 조금 빼려는데,

“네. 도련님. 시가 500 정도 된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500…, 500…? 500원이 아니라… 그 500……??’

서이나! 누가 긴장 빼래! 어?! 아주 정신이 빠졌구나…!!!! 나는 풀어지려던 허리에 다시 꼿꼿이 힘을 줬다. 하지만, 한도훈은 그 말을 듣더니 별 대수롭지 않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요? 얼마 안 되네요. 그럼 나가 보세요.”

“네. 좋은 시간 보내세요.”

아주머니는 한도훈의 축객령에 고개를 숙이며 바로 방에서 나갔다. 아, 말을 안 했는데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곳은 한도훈의 방 중 하나인 거실이었다. 무슨 놈의 방이 거실이며 서재며 개인 침실이며 드레스 룸이며 집 한 채에 다 있는진 모르겠지만 방 주인인 한도훈이 그렇다면 그런 거였다. 나는 지나친 집안 격차에 생각하는 걸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사고 칠 걸 배제한 건 아니었다.

하하, 그건 그렇고 500이 별거 아니구나, 그렇구나…. 별거 아니면 차라리 나한테 던져 주면 참 좋을 텐데…. 후, 빌어먹을 부르주아…. 아니, 근데 이 자식 이렇게 부자면서 그동안 나한테 그렇게 사 달라고 조른 거야? 이, 이…! 부자 놈들이 더한다더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내가 훨씬 거지였네, 거지였어! 어휴, 그렇다고 나보다 훨씬 어린놈이 사 달라는데 좀생이처럼 안 사 주기도 그렇고… 아, 잠깐… 한도훈이 이 정도면 반휘혈은 대체 얼마나….

나는 지레짐작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그 자식 집에 갈 일은 없지 않겠나. 그러니 그냥 모른 채로 사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할 말이 뭐야.”

그냥 볼일을 빨리 마치고 이 집을 한시라도 바삐 떠나는 게 이로울 것 같았다.

“음. 그 전에 씻지 않을래요? 저 되게 찝찝한데….”

“…장난하냐.”

부담스러워 미칠 지경인데 내가 이 집에서 퍽이나 씻고 싶겠다. 차라리 호텔로 갈걸…! 부잣집 구경 좀 해 보자며 오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스트레스받을 바엔 그곳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호텔로 옮겨 버려…? 하지만, 한도훈이 거절하면 부질없는 짓이었기 때문에 나는 잠깐 생각만 하고 포기했다. 역시 그냥 빨리 얘기 듣고 집에나 가야지…. 갑자기 좁디좁지만 안락한 내 방이 그리웠다.

“근데 누나도 찝찝하다면서요. 씻고 개운한 상태로 얘기를 나누죠. 씻으면 정신이 맑아진다잖아요. 누나, 너무 생각이 많아 보여요. 평소에도 많아 보였지만, 오늘은 특히 더요.”

나는 한도훈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생각이 많았던 편이었나…? 살면서 단순하단 소린 많이 들어 봤어도 생각이 많단 소린 들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난 이 세계에 오면서 이 세계관과 서이수 때문에라도 나는 다양한 변수를 생각해야 했고, 골머리를 썩여야 했다. 거기에 공부와 운동의 병행까지 이어지다 보니 나 자신에게 눈 돌릴 틈 따윈 이제껏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타인을 통해 듣는 새로운 정보에 말을 못 잇고 멍하니 입을 벌릴 따름이었다.

“누나? 괜찮아요?”

“아니, 어… 괜찮아. …근데, 나 진짜 생각 많아 보여?”

나는 이 새롭고도 충격적인 사실에 놀라 한도훈에게 확인차 질문했다. 한도훈은 나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끔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할 정도로요. …그리고, 누나는…, 음… 제 또래랑은 다른 느낌도 들고 말이죠.”

‘그게 더 마음에 드는 부분이긴 하지만요.’ 한도훈은 씨익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오히려 인상을 심각히 굳혔다.

“나 너무 유별나? 어…, 막 눈에 많이 띈다거나.”

“…갑자기요? 음… 하지만, 누나가 유별나긴 하죠.”

그 말에 나는 머리가 아파 와 잠시 이마를 눌렀다. 역시 나도 빙의자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건가…! 하며 한탄하는데 한도훈이 말을 이어 왔다.

“하지만, 그렇게 눈에 띄는 편은 아니에요.”

“……어?”

“참 이상하죠.”

한도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듯 눈을 굴렸다.

“저도 거의 2년이나 지나서야 누나의 존재를 인식했단 말이에요? 반휘혈이 서이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저도 누나한테 별 관심 없었을 거예요. 그냥 그 전까진 별난 사람이구나~, 하고 넘어가기만 했거든요. 그런데 반휘혈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서이수한테 관심을 가지는 거 있죠. 아, 관심이라고 해 봤자 눈길 몇 번 준 게 다지만요. 근데 알다시피… 걔가 남한테 그렇게 눈길 자주 주는 애는 아니잖아요?”

나는 그 말에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걔가 워낙 혼자 사는 놈이긴 하지….

“그러다 보니, 서이수 걔한테 누나란 존재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것도 매번 눈치 못 챈 게 이상할 정도로 저희 싸움판에 나타났다는 것까지요. 근데 잘 보니깐… 싸움도 엄청 잘하더라구요? 저는 무슨 은둔 무림 고수를 보는 기분까지 느꼈던 거 알아요?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모를 수가 있었을까요?”

한도훈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했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어…, 글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알 리가 있나. 나도 전부 처음 듣는 사실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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