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우리 대화 좀 하자 (4)
한도훈의 곁에는 방방 뛰며 성질을 부리는 녀석의 뒷목을 잡고 말리는 김시원이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김시원은 내게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를 건넸다. 나도 그에게 손을 흔들어 준 후, 자연스레 그 옆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로 시선이 향했다.
“…….”
누나가 왜 여기 있어? 라는 내용을 대문짝만하게 써 놓은 서이수와 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다, 여기엔 다 깊은 사정이 있는 법이란다. 동생아. 라는 뜻을 담은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서이수는 더 오리무중이 되었는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굳혔다.
그렇게 내 뜻이 전달되지 못한 통탄스러움에 안타까이 탄식을 흘리던 중, 사색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딴 중딩 놈들이 뭔 대수라고…! 야! 쳐! 치라고!!”
아, 맞아. 저놈이 있었지. 잠시 동안 잊고 있던 존재를 깨달은 나는 한결 편한 기분으로 덩치를 바라보았다.
“태…, 태 뭐더라…. 아무튼, 태 뭐시기!”
“뭐, 뭐…?”
분명 한도훈이 저 자식의 이름을 말한 기분이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잠깐 사이에 까먹었다. 나는 그래서 대충 녀석을 호명해 주니, 벙찐 얼굴이 돌아왔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씩 웃으며 말했다.
“넌 나랑 친히 대화해 볼까?”
아, 물론 입이 아니라 주먹으로. 알고 있지? 시원스레 말을 건네주니 덩치 녀석이 잠시 주춤거리다가 뒤에 선 자신들의 무리들보다 족히 세 배는 더 많은 동료들을 의식했는지 웃음을 흘리며 당당히 외쳤다.
“할 수만 있다면 해 보시지! 그 전에 이 녀석들부터….”
“도훈아, 들었지?”
나는 녀석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끊고 시큰둥하게 한도훈을 불렀다. 그러자 한도훈은 언제 심통이 났냐는 듯 밝은 어조로 답을 해 왔다.
“네~, 누나! 똑똑히 들었으니까 걱정 마세요! 잔챙이는 저희가 싹~ 다! 깔끔하게 해결해 드릴게요!”
나는 그 말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덩치를 보았다.
“그렇다네?”
이제 우리 둘만 얘기하면 되겠다. 그치? 나는 살벌하게 미소 지으며 덩치에게 말을 걸었다. 덩치는 내 말에 몸을 주춤하더니, 곧 뒤에 있던 한 놈과 부딪혔다. 그리고 그 녀석과 시선이 마주친 덩치가 얼굴을 곧 굳히곤 주먹을 꽉 쥐며 크게 외쳤다.
“에잇…! 겨우 여자 한 명이랑 중딩들 열댓 명뿐이야!! 수는 우리가 유리해!! 다 족쳐 버려!!”
덩치의 외침이 사위를 덮자 그의 동료들이 잠시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이었다. 곧 그들은 들고 있던 연장을 꽉 붙들었고, 하나둘 함성을 외치며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야아아아!!!”
“죽어, 새꺄!!”
“뭐래, 씨발아!!”
순식간에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내게 달려드는 놈들을 침착하게 쓰러트리며 덩치와의 간격을 살폈다.
그래. 이쪽은 덩치의 말대로 아무리 날고 기어도 여자 한 명과 중딩들이었다. 게다가 수적으로도 이쪽이 훨씬 열세였다. 보통이라면 이미 승기는 저쪽이 따놓은 거나 마찬가지다.
‘…보통이라면 말이지.’
하지만, 이곳은 어디? 바로 인소의 세계. 그런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아주 신속하고 정확한 움직임으로 놈들을 쓰러트리는 우리의 반휘혈이 저기에 버젓이 있었다.
‘진짜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이해할 수 없는 몸놀림에 신기한 듯 슬쩍슬쩍 구경하던 중, 아니나 다를까 나를 공격해 오는 연장이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재빨리 피한 후, 가볍게 팔꿈치를 날려 얼굴을 가격했다.
‘음. 잠깐. 생각해 보니 내 몸도 좀 이상한 것 같기도 하단 말이지? …이전 세계에서도 이만큼 몸이 빨랐던가? 그리고, …이렇게 강했던가?’
지난 세상에서도 운동을 안 한 지 몇 년은 되었다 보니, 운동에 대한 감각 자체만은 기억해도 얼마나 강했었는지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지금 내 몸은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보통은 저 연장에 한두 번은 맞아야 했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문득 이 세계의 영향이 자신의 신체에도 끼치는지 호기심이 차올랐다. 지난 폐공장 사건 땐 너무 오랜만에 누군가와 주먹을 맞대다 보니 지나치게 흥분해 있었다. 그래서 크게 신경을 안 썼다. 그런데 불쑥 찾아온 이 기시감은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파고들어 떠나질 않았다.
‘…확인해 볼까.’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적절한 상대. 마침 운이 좋게도 적당한 타깃이 눈앞에 있었다. 나는 슬쩍 녀석과의 간격을 확인했다. 아, 근데 왜 점점 멀어지지…, 가 아니라 진짜 멀어지네?! 저 새끼 지금 도망가는 거야?! 나는 황당함에 입을 벌리다가 급히 녀석과 거리를 좁히려는데 자꾸만 나의 앞길을 막아 대는 잔챙이들 때문에 그것은 쉽지가 않았다. 나는 피어오르는 조급함에 나도 모르게 주위가 산만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등 뒤로 기습해오는 연장을 뒤늦게 발견했다. 피하기엔 너무 늦은 감이 있어 나는 팔을 세워 막으려는데,
빡!!
내 앞에 드리워진 커다란 그림자. 어느샌가 다가온 한도훈이 나를 공격해 온 놈을 발로 차 쓰러트렸다. 나는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상큼하게 미소 지었다.
“약속했죠?”
그리고 나를 도와주러 온 건 한도훈뿐만이 아니었다.
퍼억!
“어서 가세요. 누나.”
언제 왔는지 물 흐르듯 유연한 기술로 상대측을 주먹으로 팬 이재현이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고,
“…이 정도면 스파링 한 번 해 줘도 될 것 같은데요.”
체육관에서 배운 기술을 알차게 써먹고 계시는 김시원과,
“누나 넌 진짜 집… 아니, 나중에 보자.”
집에서 보자고 하려다 내가 정체를 숨기고 있단 걸 의식한 모양인지 친히 배려하며 말을 돌려주고 계시는 내 동생 놈까지. 도방중 네임드들이 내 주위를 두르며 길을 터 주고 있었다.
…이거 참. 영화에서 볼 법한 일이 나한테 찾아오다니. 참으로 황송한 경험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계속 넋 놓고 있을 순 없지. 게다가,
“……흥.”
정신을 차리고 보니 덩치에게 가는 길을 싹 다 정리해 제 손을 털고 계시는 반휘혈의 모습까지 목도하자 나도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도와주는데 멍청하게 서 있을 수 있을 리가! 나는 터지는 웃음을 막지 못하고 시원하게 웃으며 발걸음을 가벼이 놀렸다.
목적지는 순식간에 당도했다.
“야, 덩치.”
덩치는 눈치를 보며 도망가다 말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어느새 지척까지 다다른 내 존재에 대해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며 뒤로 크게 주춤였다. 그리고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는데 그 많던 숫자가 널브러져 있는 광경에 기겁했는지 입을 떡하고 벌렸다. 그에 나는 녀석을 향해 크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 맷집 좀 있지?”
그 산만한 덩치가 장식이면 정말 곤란하거든.
“뭣…! 끄읍…!!!!!”
덩치 녀석은 내 말에 뭐라 하려 했던 것 같았지만, 그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말이 끝나자마자 내가 바로 녀석의 배에 주먹을 꽂아 넣었기 때문이다.
“끄윽…윽…! 이, 이게에…!!!”
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꽤 훌륭한 맷집에 만족스레 웃었다. 그리고 한순간 꺾였던 허리를 세워 주먹을 휘두르려는 녀석의 허벅지 안쪽을 걷어차 중심을 잃게 만들었다. 그 후 나는 바로 자세를 잡으며 웃음을 짙게 그렸다.
“가드 올려.”
나는 공격하기 전, 친절하게 경고를 해 주었다. 녀석이 눈을 부릅뜨고 가드를 올리는 걸 확인한 후, 빠르게 주먹을 내질렀다. 차례대로 녀석의 팔에 주먹을 꽂았다. 그러자 전해지는 통증에 놀랐는지 한순간에 그 가드가 풀어지고 말았다. 나는 그 허술한 가드에 혀를 찼지만, 이번엔 멈추지 않고 연이어 주먹을 꽂았다. 녀석의 어깨, 가슴, 배에서 짧고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흠. 뻗어 가는 속도와 회수하는 속도 모두 나쁘지 않았다.
‘아니, 이 정도면 반휘혈보다….’
자신의 상태를 간단하게 평가를 내린 난 주먹을 가볍게 쥐며 흔들었다. 이미 녀석의 가드는 풀린 지 오래였다. 그래서 내 공격을 막지도 못하고 있는 데다가 몇 대 맞지도 않았는데 상태가 영 좋아 보이질 않았다.
…역시 조금 이르긴 하지만, 이쯤에 마무리 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마무리는 역시 힘 체크.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자세를 잡았다. 공격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거리였다.
아, 선수 시절 생각나네.
어쩐지 지금 이 순간이 링 위에 있는 것 감각이었다. 상대가 내 간격에 들어온 허점을 허용한 적기는 바로 지금. 그 아련한 감각이 지금 이 순간 떠올랐다. 나는 지나간 그 감각을 붙잡는 것처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앞으로 강하게 뻗어 녀석의 배에 깊숙한 타격을 주었다.
빠악-!!!!!
“……!!!!!”
그와 동시에 녀석의 눈이 까뒤집히면서 몸이 붕 뜨며 날아갔다.
“…허얼.”
하지만 정작 그 날아가는 몸뚱어리에 놀란 건 나였다. 스스로가 벌린 일이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쿵…!!
곧 묵직한 소리가 땅에 울렸다. 그리고 적막이 찾아왔다. 덩치는 저 멀리 날아가 맞은 충격에 바들바들 떨다가 축 늘어졌다. 그래, 그런 공격을 맞았으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뿐이면 참 다행이었다.
‘…살아 있을까?’
에, 에이. 설마 인소 세계관인데 이 정도로 죽을 리가! 나는 보이는 현실을 자연스레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것은 내 실수였다.
“…….”
“헐….”
“…미쳤다.”
방금 내 놀라운 위력을 모두가 목도한 모양이었다. 주위에 있는 모두가 싸우다 말고 기겁한 모양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모자랑 마스크 끼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이 순간 서이수 때문에 버릇처럼 들고 다니던 이 물건들이 이렇게 다행일 수가. 입고 있는 교복은 어쩔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누군지 얼굴은 모를 거 아닌가. 아니, 설마 나도 인소 안에서 이렇게 센 줄 알았나…. 왠지 샌드백이 되게 한 덩치 놈에게 동정심이 피어올랐지만, 뭐, 인소 세계니깐… 그래, 인소 세계니깐 쟤도 괜찮겠지…! 나는 직면한 현실을 다시 모른 척하며 조용히 눈을 굴렸다. 하지만 집요한 시선들은 떨어질 줄 몰라 결국 견디지 못한 난 용기를 겨우 짜내며 조심스레 말했다.
“어…, 계속 할래? 니네들 짱 쓰러졌는데….”
나는 쓰러진 덩치 놈을 콕 집어 입을 벌리며 나를 바라보는 놈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잠깐 사이에 수가 엄청 줄었다? 자세히 보니 덩치 놈과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놈들의 다수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머릿수가 부족한 게 이상한… 아, 도망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