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우리 얘기 좀 하자 (5)
쯧쯧. 이 의리 없는 것들. 나는 양심 없는 고딩 놈들에게 혀를 차 주었다. 그리고 남은 녀석들은 슬쩍 나를 보고 쓰러진 짱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곧 연장을 바닥에 버리기 시작했다.
“어휴….”
그 항복의 의사를 확인하자 곧 간만에 사용한 몸이 피로를 호소해 왔다. 아이고, 새파랗게 어린놈들 상대로 너무 진심으로 싸웠나, 뒤늦게 후회가 밀려들었다. …오늘은 집에 가서 그냥 자야겠다.
“…누나.”
그런데 돌연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픈 마음이 가득했던 만큼 그 목소리가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 익숙한 목소리로 추정컨대 한도훈이 분명하다며 고개를 돌리니, 당연하게도 한도훈이 서 있었다. 게다가 다른 애들까지 딸려서.
“누나, 진짜, 어쩜… 어쩜…!”
“어. 나 간다.”
나는 한도훈이 입을 틀어막고 눈을 반짝이며 무언가 감격한 얼굴을 짓는 걸 확인하자마자 바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한도훈은 이런 내 무시에도 포기하지 않고 반짝이는 눈으로 내 곁으로 다가왔다.
“누나, 진짜 너무 대박인 거 아세요? 방금 날아간 거 봤죠? 아니, 안 봤을 리가 없지. 누나, 진짜 완전 멋져요. 진짜 짱이에요!”
조잘조잘, 한도훈은 양쪽 엄지까지 들며 나를 치켜세워 줬다. 음. 기분은 좀 좋은데…?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칭찬 세례에 민망함이 피어오르긴 했어도 생각보다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어, 그래. 그래. 우리 나중에 얘기하자….”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보는 눈이 많아 빨리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아, 왜요! 저희 뒤풀이 갈까요? 네? 같이 가요~.”
한도훈은 떠나려는 나를 자꾸만 붙잡았다. 이대로 해산하기는 싫었던 모양인지 평소보다 더 붙어 오는 모습에 난처함을 느꼈다. …이걸 어떻게 떼어 놓지.
“음?”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쌍의 눈과 딱 마주쳤다. 나는 그 존재를 발견하곤 희색을 띠며 한도훈을 떨쳐 냈다.
“아! 나 방금 볼일 생각났어.”
“예? 뭐요? 설마 공부라고 하진 않으실 거죠? 오늘은 그냥 넘겨요, 네?”
“…너, 나 다음 주가 시험인 건 알고 있지?”
“지금 누나 공부할 기분도 아니잖아요.”
…이 자식, 요즘 대화 좀 했다고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기 시작했어? 나는 사정없이 팩트만 날리는 녀석을 흘겨본 후, 척 하고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나 쟤랑 약속 있어서.”
“…휘혈이랑요?”
방금 말한 것은 한도훈이 아니라 이재현이었다. 이재현은 가만히 우리들을 바라보다 생각도 못 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물론, 이재현뿐만이 아니라 한도훈과 반휘혈을 제외한 모두가 놀란 기색이었지만 말이다.
“어. 그러니까 난 간다. 뒤풀이 잘 하고 빨리빨리 집에 들어가.”
“…그럼 어쩔 수 없죠. 다음에 놀아요.”
그리고 그중 나와 반휘혈의 사이를 가장 잘 알고 있던 한도훈이 빠른 포기를 선언하고 나를 보내 줬다. 그리고 한도훈은 남들 몰래 입만 움직여 ‘화이팅.’ 하고 응원을 보내왔다. 그래서 나는 그런 녀석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반휘혈에게 다가갔다.
“…가자.”
설마 지금 와서 안 가겠다고 그러진 않겠지…? 뒤늦게 걱정이 들었지만, 다행히 반휘혈은 별말 없이 내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 속으로 안도하며 자리를 이동했다.
***
이동하고 도착한 곳은 지난번, 저녁에 마주쳐 대화를 나눴던 그 공원이었다. 그러니까 그 동생 선언을 들었던 그 장소 말이다. 가장 가까운 공원이 이곳이다 보니 여기로 오긴 했지만, 어쩐지 생각도 못 한 우연의 일치가 겹친 기분이었다.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자판기에서 빼 온 음료수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다른 음료수 캔을 옆에 앉은 녀석에게 건넸다.
“자, 너도 마셔.”
반휘혈은 음료수를 말없이 받았다. 역시 감사 인사 한마디 없는 녀석의 싸가지는 매일 있는 일이기에 나는 눈만 가늘게 뜨고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다. 그보단 앞으로 할 얘기가 더 중요하기도 했고 말이다. 나는 이야기를 하기 앞서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반휘혈. 너, …아직도 내 동생 되고 싶어?”
조심스레 운을 떼자 음료수 캔을 들고 있던 녀석의 손이 움찔 떨렸다.
“…….”
하지만,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캔을 꾹 쥐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너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나 싶어 민망하게 뒷목을 주무르며 뒤늦게 말을 돌렸다.
“…집엔 들어간 거야?”
“…….”
이번에도 반휘혈은 답이 없었다.
“밥은 잘 먹고 다녔고?”
“…….”
역시나 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고서도 지난번과는 달리 좀 더 푸석해진 낯에 이 녀석의 마음고생만큼은 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힐끔힐끔 바라보다가 곧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틀어 녀석을 제대로 마주 봤다.
“반휘혈, 너 지난번 일 때문에 말하기 싫은 거야? 그 부분은 나 사과할 생각 없어.”
내 단호한 말에 반휘혈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녀석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 시선 속엔 그럼 왜 저를 불렀냐는 듯 반항 어린 감정이 담긴 걸 확인한 나는 숨을 크게 내쉬어 자신의 기세를 한풀 죽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오해하게 만든 부분은 사과할게. 미안해.”
그래. 어떻게 보면 그렇게 집으로 들여놓고 제대로 오해하게 만든 내가 가장 큰 죄인이었다. 그리고 제때 해명하지 않은 것도.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사과를 입에 담자 반휘혈의 눈이 커지면서 반항적인 기운이 좀 누그러졌다.
“근데 나도 사과받을 거 있어. 너 그때 말 심하게 한 건 사과해.”
그러나 반휘혈은 이어진 내 말을 듣더니 말 자체를 이해를 못 한 것처럼 눈썹을 찌푸렸다. 마치 자기는 잘못이 없다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뻔뻔함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에이, 젠장. 내가 훨씬 더 어른이니까 봐준다. 아오!
“너 그때 나보고 너 가지고! …놀았다느니 뭐라 막 그랬잖아.”
나는 부글부글 끓을 것 같은 속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그러자 반휘혈은 그게 왜? 라는 낯으로 당당히 제 잘못이 없음을 표했다.
‘…이 자식을 어쩌면 좋지?’
알고는 있었지만 상상 이상의 유아독존이었다. 나는 혈압이 상승하려다 말고 너무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다가 곧 자신은 어른이라고 다시 속으로 빠르게 되뇌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휘혈아, 아무리 감정이 상해도… 그렇게 사람을 막…! 어?! 마악…!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야…!”
“왜? 틀린 말 아니잖아.”
자신은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그 배짱에 나는 결국 이성의 끈이 뚝, 하고 끊겼다.
빡-!
“…내가 상처받아서 그런다! 왜!”
울컥하고 치미는 화를 못 이긴 난 그만 녀석의 등짝을 세차게 내려치면서 성질을 내고 말았다.
“윽…!”
“헙.”
그리고 그런 스스로의 행동을 깨달은 건 반휘혈이 신음을 내뱉으며 허리를 꺾을 때서였다.
‘…망했다, 이 유아독존에 자존심 강한 놈이 한 대 맞았다고 또 휙 가 버리면 어떡하지…?!’
발이 땀나게 뛰어다니며 그를 찾았던 일주일의 고행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이미 후회하기엔 늦었다. 반휘혈의 말버릇이 너무 짜증이 나 그만, 서이수에게 했던 행동을 버릇처럼 저질러 버리고 말았다.
아이고, 성질나면 손부터 나가는 버릇 고치든가 해야지…! 어떡하지?! 얘 진짜 앞으로 나 평생 안 보는 거 아니야?!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그런 짓은 안 해 줬음 참 좋겠는데…! 내가 요 일주일간 얼마나 널 열심히 찾았는데 너 겨우 한 대 맞았다고 그런 속 좁은 짓 하는 거 아니다. 너 진짜 나한테 그러면 안 된다. 어?!
“…….”
반휘혈은 내가 애를 태우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이 맞은 등을 부여잡으며 잠시 동안 허리를 펴지 못했다. 아, 어떡해! 방금 싸우고 왔다고 힘 조절 안 됐나 봐! 혹시 얘도 뼈 부러진 거 아냐?! 근데 부러진 소린 안 들렸는데? 아, 혹시 근육이 놀랐나?! 그래서 허리를 못 펴고 있는 거…? 헉.
“…상처받았어?”
시간이 지나도 너무 반응이 없자 119를 불러야 하나 진지하게 고려하던 중이었다. 실은 이미 119는 눌려 있었다. 통화 버튼만 누르면 되던 순간에, 반휘혈이 불쑥 중얼거렸다.
“어?”
그런데 내용이 너무 생각도 못 했던 거라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방금 얘가 뭐라고 했지? 나 뭐 잘못 들은 기분인데…?
“상처…받았어?”
그러자 반휘혈은 굽혔던 허리를 펴지 않은 채로, 이번엔 팔로 자신의 얼굴을 전부 감싼 채로 되풀이했다. 나는 그제야 녀석의 말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물음에 잠시 어떻게 반응을 해야 될지 몰랐다. 그래서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곧 크게 숨을 내쉰 후 투덜거리면서 대답해 줬다.
“…그래! 좋게 말하고 넘어갈 수 있는 걸 꼭 그렇게 말해야 했어? 누가 보면 어장을 굉장히 잘 치는 줄 알겠다! …정작 나는 한 번도 남친 사귄 적도, 썸이란 것도 타 본 적 없는데! 네가 자꾸 그렇게 말하니까 주위에서 오해한다고!”
나까지 말이야! 하지만 나는 뒷말은 입안으로 삼켰다. 왠지 이 말을 꺼내면 지는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자고로 나는 지는 걸 아~주! 싫어했다.
“…미안.”
“……어?”
방금, 뭐라고? 나는 순식간에 나간 말에 놀라 몸이 굳었다. 얘 지금 뭐라 했지? 나 또 얘가 중요한 말을 한 걸 들은 기분인데…??
“미안…하다고.”
반휘혈은 자신이 하기에도 그 말이 어색한지 굉장히 서툰 기색으로 단어를 내뱉으며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볼 수 있는 건 녀석의 드러난 귀뿐이었다. 그리고 가로등 아래에 비춰진 그의 귀가 굉장히 붉다는 것도 말이다. 나는 그 광경에 내가 들은 소리가 사실임을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