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우리 얘기 좀 하자 (6)
“휘혈이, 너, 너어…!”
너, 이 자식…! 너…! 사과도 할 줄 아는 녀석이었구나!! 물론, 내가 하라고 하긴 했지만 진짜로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은 못 했는데…!! 너 그렇게 안하무인은 아니었구나…?!
차오르는 감동을 못 이긴 난 그 녀석의 어깨를 크게 쳤다.
퍽!
“윽…!”
“그래! 그렇게 사과를 해야지! 그래야 내 동생 삼을 맛이 나잖아!”
“……뭐?”
아차. 스스로가 무슨 말을 꺼냈는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입을 합, 하고 닫아 보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그 사실을 깨닫곤 멋쩍게 옆을 살피자 반휘혈은 내 말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파묻고 있던 얼굴도 번쩍 들어 강렬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 음….”
아니나 다를까 반휘혈이 내 말을 재차 물어 왔다. 나는 그 질문에 눈을 도르륵 굴리다가 결국 머리를 벅벅 긁으며 에라 모르겠단 심정으로 말했다.
“아, 그러니까…!! 내가 너 진짜로 동생으로 받아 주겠다! 뭐, 이런 뜻이라고!!”
아, 젠장. 멋없어 죽겠네, 정말. 좀 더 그럴싸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나는 창피함에 볼이 달아올랐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그래선지 괜스레 민망해져 입을 삐죽였다.
“그래서, 싫어? 그사이에 마음이 바뀌었어? 그럼 말고.”
“…….”
나는 고개를 팩 돌린 채 반휘혈과 시선도 못 마주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계속 말이 없던 반휘혈이 덥석,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 말.”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반사적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볼을 발갛게 붉힌 채 들떠 보이는, 낯선 반휘혈이 있었다.
“…그 말, 더 이상 취소 못 해. 안 해 줄 거야.”
절대로. 그는 눈을 빛내며 진지하게 말했다. 녀석은 놓치지 않겠다는 기색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과 마주치자 저절로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짝이는 눈. 상기된 볼.
어쩐지 가까이서 바라본 그의 얼굴은 앳되어 보였다.
‘아, 그래. 이 녀석 애 맞지.’
새삼스럽게도 이제야 반휘혈이 겨우 열여섯 살에다 중학생이란 사실이 확 와닿았다. 나는 찬찬히 녀석의 얼굴을 훑었다. 그의 얼굴이 미인인 것은 틀림없었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어린아이의 그것이었다. 다 빠지지 않은 부드러운 젖살이 그 나이를 증명했다.
그것을 깨닫자 나는 그동안 녀석을 그 나이에 비해 너무 성숙하게 여겼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한도훈이 말했던 그 어른스러운 모습이 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동안 자신은 이 녀석을 어리다고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과 달리 녀석의 과묵한 성정이 나도 모르게 녀석을 지금의 내 또래, 아니, 적어도 20대 초반쯤으로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침묵은 사람을 성숙하게 보이게 만들지만, 반휘혈에게 있어서 침묵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털어 내고 싶어도 의지할 데 없어 털어 낼 수 없는 그의 환경이, 고립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게 아니었을까.
“…그래.”
아, 이젠 완전히 글렀다.
“취소 안 해도 돼.”
더 이상 내버려 둘 수가 없을 정도로 반휘혈이란 녀석에게 동정심이 일고야 말았다. 눈앞에서 이토록 나를 간절하게 바라보는 어린아이를 더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살포시 미소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나도 취소 안 할 거야. 내 동생이 되는 거에 각오는 됐지?”
“……응!”
반휘혈은 내 물음에 한참 말을 못 잇다가 나중에서야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보기 힘든 그 아이 같은 모습에 결국 난 눈썹을 모으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참 어쩔 수 없네.’
새로운 삶에 눈을 떴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1학년 기말고사를 치르기 일주일 전, 난 이 낯선 세계에서 또 다른 동생이 생겼다.
이 선택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으나,
나는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
“너, 근데 정말 어디 있었어?”
문득 나는 요 며칠간 소식이 뜸했던 반휘혈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반휘혈은 내 옆에 딱 붙어 앉은 채로 음료수를 마시다가 나를 슬쩍 보더니 다시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왜 말이 없어? 너 방금까지 잘만 말했잖아.”
“…….”
“휘혈아? 반휘혈 씨? 반~휘~혈~씨~??”
하지만 돌아간 시선은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반휘혈은 내 집요한 부름에 자리에서 슥 일어나더니 어딘가로 척척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보세요~. 반휘혈 씨~? 제 말 안 들리십니까~. 예~?!”
대놓고 무시하는 모습이었지만, 여기서 굴할 내가 아니었다. 나는 녀석의 대응을 똑같이 무시해 주며 질기게 물어 왔다. 그렇게 우리는 이 커다란 공원을 한 바퀴 다 돌고서도 끝나지 않는 실랑이를 이어 갔다.
“아 쫌 말해 봐 봐! 내가 너 찾는다고 발이 땀나게 뛰어다녔단 말야!”
하지만, 끝내 볼을 부풀리며 뾰로통해진 건 나였다.
‘그래야 네가 어느 날 불시에 사라져도 찾을 수 있지!’
당연히 내게도 할 말은 있었다. 하지만, 훗날 또 이 녀석과 크게 싸울 일이 없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그런 일이 또 일어나게 돼서 지난 며칠처럼 행방이 묘연해지는 불상사는 피하고 싶었다. 게다가 한도훈의 눈마저 피하다니! 대체 얼마나 잘 숨었으면 걔 눈을 피해?!
나는 다른 건 다 몰라도 한도훈이 어마어마한 재벌이란 것과 동시에 그가 꽤나 정보통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두문불출하던 반휘혈을 찾아내 나한테 알려 주지!
“…….”
그러나 반휘혈은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방금 내 말에 눈썹이 잠시 찌푸려지며 나를 힐끔 보는 눈동자가 조금 흔들린 것 같긴 했지만! 아무튼 저놈의 고집을 뚫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나. 비장의 수를 쓰는 수밖에.’
나는 뚱하니 얼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방법은 정말 자주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간의 짧은 만남을 통해서 반휘혈이 내게 강하게 굴지 못하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말 좀 해 봐아아아~~~!! 누나가 이렇게 부탁하잖아~~!!!”
진상인 양 팔에 매달리기 전법…이었다. 그동안 반휘혈은 내가 이런 식으로 매달리면 싫어하면서도 결국 내가 원하던 걸 해 주고 있었다. 왜냐면, 길에서 이러고 있는 건 쪽팔리니까! 저기 봐라. 사방에서 우릴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훗. 반휘혈. 쪽팔리지? 실은 나도 쪽팔려! 그러니까 빨리 얘기해 주면 안 될까!
얼굴이 저절로 홧홧해졌지만 반휘혈이 말할 때까진 떨어지지 않겠다는 오기가 발휘되는 중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난 지는 걸 싫어한다. 그것도 어엄청!!
“하아….”
그리고 역시나 이번에도 이 기술은 성공했다! 반휘혈은 떨어지지 않는 나를 흘겨보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멈춰 섰다. 오예! 내가 이겼다! 나는 승리에 당당히 어깨를 펴며 의기양양하게 녀석을 봤다. 그러자 반휘혈은 그런 날 못마땅하게 보다 곧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형 명의로 된 오피스텔에 있었어.”
“아, 형…. 형?”
“응.”
어, 잠깐. 반휘혈의 형이라면… 그, 자기를 버리고 갔다고 한… 그 형? 아니, 근데 그 형의 오피스텔에 있었다고?
“너, 너, 형이랑 안 친했던 거 아니었어…?”
나는 갑작스러운 정보에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그런데 반휘혈은 내 말이 꽤나 못마땅한지 얼굴을 구겼다.
“이젠 안 친해.”
…이젠? 그럼 전에는 친했단 건데? 어리벙벙해지는 내용에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물었다.
“그런데 왜 형의 집에 갔어…?”
자존심이 기똥차게 하늘을 찌르는 녀석이 용케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집에서 잤겠다 싶었다. 혹시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나?
“어차피 오지도 않으니까.”
그런 내 물음이 귀찮은지 반휘혈은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설렁설렁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런 녀석을 따라잡으며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의문을 물었다.
“오지 않는다고? 하지만 형 집이라며?”
굳이 제 명의로 된 집을 놔두고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지? 너무 대충대충인 대답에 나는 더더욱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굳이 올 필요도 없지.”
“아니, 그니까 왜?!”
자기 집이잖아! 대체 왜 안 오는데!
“자기 건물에 굳이 매일 드나들 필요 있어?”
“아, 건물…. 건물?!”
나는 생각도 못 한 스케일에 기겁하며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방금 자기 형이 건물주라는 걸 아무렇지 않게 말한 거야, 쟤?!
‘아, 아니지. 참. 쟤도 한도훈 저리 가라 하는 재벌이었지, 참.’
너무 친근하게 대했던 탓일까, 순간 얘가 엄청난 재벌이란 걸 잊고 있었다. 게다가 소시민적인 사고 관념을 지닌 내겐 그저 고급 오피스텔 방 하나 정도일 줄 알았건만… 설마 건물 단위가 나오다니. 정말 굉장하구나. 새삼스럽지만 이곳이 인소 세계이며 내가 엄청난 인물들과 엮였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이었다. 불과 반년 만에 너무 많은 걸 접하는 기분이다. 설마 서이수가 이렇게 큰 파장을 몰고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 그, 그럼 형님은, 잘 계시니….”
그래도 건물주가 형님인데… 네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건 아버지 돈이잖니? 차라리 형의 손을 빌려 보는 게 어쩌나 싶어졌다. 아, 그래. 이왕 건물이 형님 것인데 차라리 거기에 아주 자리를 잡아도 괜찮…,
“몰라. 알 바 아냐.”
“……아니, 너무 그렇게 야박하게 굴지 말고.”
지금 당장은 믿을 게 형님밖에 안 보인다, 이 친구야! 보니까 아무리 건물에 자주 안 찾아온다 한다 할지라도 반휘혈이 그 건물을 드나들 수 있다는 건 다른 얘기였다. 그 뜻은 바로 그의 형이 그에게 건물의 출입을 직접적으로 허가해 줬단 뜻이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쟤네 집처럼 재벌이면 그 오피스텔 건물이 얼마나 고급이겠어! 당연히 경비 시스템도 최고겠지! 그런데 반휘혈의 성격으로 보건대 그 형도 성격이 만만찮아 보였다. 그런 형이 반휘혈이 쉽게 건물을 드나들게 해 주었다는 것과 반휘혈이 했던 말로 추측건대 두 사람은 꽤나 친밀했던 사이임이 분명했다. …아마도!
“한 번씩 얼굴 보고 얘기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형이 널 그렇게 미워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오히려 꽤 좋아하는 거…,”
“그런 인간이!”
나는 갑작스러운 반휘혈의 외침에 깜짝 놀라 하던 말을 멈췄다. 반휘혈은 움직이던 발을 멈추고 주먹을 꽉 쥔 채 이를 아득 물며 말을 이었다.
“날 두고…! 도망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