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48화 (48/306)

48. 고민 그리고 결심 (2)

***

“…하아.”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지난밤, 이전 생에서 서른 살일 땐 거의 다 사라졌던 만화방의 모습에 흥분해 그만 만화책을 가득 품에 안고 들어왔다. 정신없이 한창 실컷 읽다가 퍼뜩 시간을 확인한 건 창 너머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때였다. 그래서 나는 아침 햇살과 흐려진 눈으로 인사하며 냉정히 커튼을 치고 그제야 잠이 들었다. 그리고 신이 나게 꿈나라를 돌아다니던 중 시끄럽게 곁에서 울리는 소리에 잠이 깨 버려 주섬주섬 확인도 안 하고 받고 말았다. 그리고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그 주인공을 깨달아 어차피 또 쓸데없는 말이겠거늘 생각하며 대충 대꾸하다 끊으려 했다.

‘그런데, 바다라니.’

생각도 못 한 여름휴가가 결정되었다. 원래는 이 불쌍한 고등학생의 짧은 방학을 집에서만 보낼 생각이었거늘….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나는 피로한 눈을 문지르곤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솔직히 말해서 바다는 별로였다. 왜냐하면, 거기에 기억이 있다고 해 봤자 훈련하러 갔을 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니 지난 삶이 굉장히 삭막하게만 느껴졌지만 사실인 걸 어떡하겠는가. 그런데 왜 이 결정을 내린 건지 묻는다면 이유는 단순했다.

“……너는 재밌어 보이네.”

이 세계의 서이나의 기억 속 어린 시절 때문이었다. 내 기억만 떠올릴 때였다면 바로 거절했겠지만, 바다라는 한 마디에 순간, 이 세계의 서이나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제 몸보다 큰 튜브를 잔뜩 끌어안고 모래사장을 거니는 어린 서이나.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어린 서이수. 모래로 장난치며 놀다가 부딪히는 파도에 꺄르륵거리며, 누가 봐도 웃음 짓게 만드는 추억과도 같은 잔상이었다.

그 기억이 떠오르자 나는 한순간 그동안 자신이 가져왔던 바다에 대한 인식이 조금 달라짐을 느꼈다. 부정적인 인식이 낮아지고 어쩐지 아련한 감각마저 느껴져 속이 울렁였다.

‘또구나.’

이전부터 느낀 거지만 대체 이건 뭘까? 체한 것 같으면서도 머리를 흔드는 그 감각은 좋게 표현하려 해도 불쾌하단 말뿐이었다. 그래도 이 증상이 나타날 때의 공통점은 있었다. 바로 이 세계의 서이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자중하려 하지만 의식의 흐름이란 게 그리 쉬이 제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번번이 이런 상태가 찾아오곤 했다.

나는 이 상태에 대해 한참 멀뚱히 눈을 깜빡이며 고민하다 결국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단순한 결론을 내렸다.

‘아, 몰라. 그냥 방에 틀어박혀서 안 나오면 그만이니까. …뭐, 정 귀찮으면 대충 핑계 대면서 가지 말자.’

***

……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그로부터 약 일주일 후, 나는 따가울 만치 강하게 타오르는 햇빛을 피하기 위해 펼쳐 놓은 파라솔 아래에서 불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간단히 설명하자면, 나는 오늘 갑작스레 납치당했다.

정확히는 방 안에서 선풍기 바람으로 더위를 겨우 식히며 낮잠을 청하고 있을 때였다. 한참 기분 좋게 행복한 잠을 청하고 있던 중, 띵동-, 하고 제 잠을 방해하는 경쾌한 벨 소리가 울렸다.

나는 떠지지 않는 부은 눈을 비비적거리며 혹시 오늘 오기로 한 택배인가 싶어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곳엔 기다리던 택배는 없고 한도훈이란 이름을 가진 인간이 활짝 웃으며 제게 인사해 왔다.

“누나! 데리러 왔어요!”

어, 그래. 근데 왜 데리러 왔는진 모르겠구나.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도훈아. 저분들은?”

나는 눈을 의심케 하는 존재들에 눈을 자꾸만 비비며 확인했다. 햇볕을 등지고 까만 선글라스를 빛내며 반듯한 정장을 입고 듬직하니 서 있는 낯선 두 사람. 누가 봐도 나 경호원이요! 라고 알리는 모습들에 떨떠름하게 한도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 경호원들이에요!”

“어어. 보면 알아…. 근데 왜 저분들이라 같이 왔니…?”

“필요할지도 몰라서요.”

싱긋, 한도훈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니까 왜…, 아니다. 이게 아니라 넌 대체 왜 온 거야?”

어쩐지 머리가 아파 왔다. 자꾸만 빙빙 도는 말에 저 녀석이 나를 놀리는 게 아닌가 싶은 합리적인 의심마저 품을 지경이었다. 왜냐면, 한도훈은 이 정도로 말귀를 못 알아먹는 애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냥 포기하고 이곳에 온 목적을 물으니 한도훈은 내 물음에 더 의아한 것처럼 말했다.

“저 문자 보냈잖아요? 데리러 오겠다고.”

“…뭐?”

나는 그 말에 바로 핸드폰을 뒤져 메시지 함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곳엔 한도훈이 말한 것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보낸 지 30분도 안 되는 것 같아 보이는 건 내 기분 탓이냐?”

그가 보낸 시각이 얼마 되지도 않았다는 게 내 시선을 잡았다. 그래서 못마땅하게 녀석을 바라보자 한도훈은 그게 무슨 상관이냔 것처럼 능청스레 대꾸했다.

“에이, 뭐 어때요! 그냥 가요!”

짝! 하고 경쾌한 박수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그 곁에 대동시킨 덩치들이 움직였다.

“어, 어??”

그 일은 정말 불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뭐라 반항도 못 해 보고 어이없이 두 팔이 붙잡힌 채 덜렁 몸이 들려지고 그대로 차로 이송됐다. 무더운 더위에 지치고 잠이 덜 깬 몸은 차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냉기를 맞자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한도훈!”

이러한 갑작스러운 상황엔 역시 화가 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녀석에게 한 소리 하기 위해 소리를 지르자 한도훈은 귀를 틀어막으며 딴청을 부렸다.

“…누나, 포기해.”

그리고 옆에 있던 서이수는 심드렁한 얼굴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째려보며 말했다.

“너 알고 있었지!”

“아니. 나도 오늘 알았는데.”

서이수는 내 말에 태연스레 반박했다. 아니, 오늘 알았다는 놈이 왜 이렇게 태평해?! 나는 황당한 나머지 잠시 동안 말을 잃다가 성질을 냈다.

“넌 갑작스레 정해졌는데도 화가 안 나?!”

“뭐…. 근데 몸만 오면 그만이라는데 편하고 좋잖아.”

나는 그 태연자약한 대답에 끝내 할 말을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 …너, 원래 그렇게 쉬운 놈이었냐? 차후 미래가 걱정될 동생 놈을 어처구니없이 바라보다 결국 몰려오는 피로감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불쑥 내 앞으로 물이 들이밀어졌다. 누군가 확인하니, 차내의 또 다른 손님인 반휘혈이었다.

“아, 고마워.”

안 그래도 뻗쳐 오는 성질 때문에 목이 타는 기분이었던 터라 필요했던 참이었다. 나는 반휘혈이 주는 물을 받아들이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을 다 마시고 한숨을 돌리며 다시 차내를 둘러보았다. 지난번에 탔던 차와는 다른 내부였다.

‘도대체 리무진이 몇 대인 거야…?’

약간 질린 눈으로 고급스러운 내부를 구경하는데 문득 나는 이쪽을 바라보던 서이수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아무것도.”

곧장 시선이 어긋나졌지만 잠깐 동안 마주친 그 눈은 꽤나 미심쩍은 모양이었다. 그 눈빛이 좀체 이상해 물어봤으나, 서이수는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뭐지?’

그 수상한 행동에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을 바라보았지만 끝끝내 서이수는 모른 척 외면했다. 굉장히 의심쩍은 그 행동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보단 차내에서 보이지 않는 인물들이 신경에 걸렸다. 그래서 난 잠시 그 의문을 뒤로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시원이랑 재현이는?”

“걔네들은 따로 올 거예요.”

“아, 그래?”

그럼 나도 따로 가도 되지 않았을까? 나는 불만을 표현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데 한도훈이 더 빨리 선수 쳤다.

“누나는 왠지 핑계 대면서 안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죠.”

한도훈은 해맑게 입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입과는 달리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런 그의 반응에 난 찔리는 것과 동시에 한기를 느꼈다. 이, 이 예리한 자식 같으니. …어떻게 알았지? 말이 저절로 막혔다. 나는 눈을 데록 굴리며 슬쩍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야, 날씨 참 좋네~.”

나는 뻔뻔스레 말을 돌리면서 속으론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저렇게 실실 웃으면서 어설프게 보여도 꽤 머리 잘 굴러가는 놈이었지, 참. 그것도 심리전에 강한 타입이고. 그러니 내 생각쯤은 이미 예상했다 이건가? …쳇.

나는 그 안타까운 현실에 다시 혀를 차며 입을 뚱하니 내밀었다.

‘아,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부잣집 휴가 라이프 간접 체험하는 거지, 뭐.’

이미 집으로 돌아가기엔 늦었다. 아니, 돌아갈 틈이 안 보였다. 서늘하게 쏘여 오는 시선이 등에서부터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따가운 기척을 모르쇠 하면서 결심했다. 기왕 가는 거 이번 여름휴가를 제대로 보내고 오기로.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이긴 했지만 어찌 됐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그리고 좋은 별장에서 잔뜩 힐링하고 와도 좋은 일이었다. 바다로는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으면 그만이기도 했다. 휴가 계획이 대충 정리되자 복잡했던 기분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나는 차내의 에어컨 바람을 시원하게 만끽한 채 잠시 눈을 붙였다.

***

그리고 도착한 별장은 정말 어마어마한 곳이었다. 그간 TV에서만 흔히 봐 왔던 그 럭셔리 별장을 눈앞에서 목도한 나는 입을 떡 벌리며 기겁했다. 물론 한도훈의 집을 한 번 방문하고 반휘혈의 집을 먼발치에서 잠깐 본 적이 있었긴 하지만! 그래도 새삼 피부로 닿아 오는 재벌의 범주는 가히 상상 이상이었다. 게다가 이 별장에서 보이는 탁 트인 해변! 그곳이 전부 한도훈네가 관리하는 사유지라는 설명까지 다 들은 난 거의 졸도 직전이었다.

새삼스럽지만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세계관에 왔는지 다가오는 현실에 넋을 잃고 망연하게 서 있자 그런 나를 한도훈이 척척 방을 안내했다. 중간중간 이곳이 어느 방이고, 무슨 용도라는 설명을 들은 기분도 들었지만, 이미 재벌의 클래스에 압도된 난 그 모든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내 방이 안내되었다. 도착한 방의 문을 열자, 나는 물결치는 감동에 입을 틀어막았다.

“……!!”

그곳은 환하게 비추는 햇살이 방 안을 가득하게 품은 채, 자연스레 어우러진 새하얀 침대와 각종 편의 기구가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어느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고급진 방임은 틀림없었다! 그중에 내 눈을 가장 사로잡은 건 단언컨대 안마 의자였다!

세상에, 나 저거 한번 써 보고 싶었는데! 이전 생을 살면서 안마 의자 같은 것에 돈을 쓸 여력도 없었을뿐더러 이번 생에서도 TV에서만 줄곧 보았던 물건이었다. 광고에서 볼 때마다 그렇게 가지고 싶단 욕망을 주체하질 못했었는데…. 그 이룰 수 없는 현실에 그간 얼마나 통한의 눈물을 흘렸던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드디어 내 꿈이 현실이 되어 이렇게 나타났다. 나는 결국 체면도 잊고 바로 달려가 그것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세상에, 세상에. 부위별로 다 할 수 있나 보네. 세상에. 어, 이건 무슨 기능이야. 와….”

“이건 이 리모컨으로 작동하면 된답니다. 이걸 이렇게 누르면….”

새로운 최첨단 기술을 접하는 기분으로 이리저리 살피며 호들갑을 떨고 있던 중 한도훈의 곁에 서 있던 별장 관리자가 내게 다가와 안마 의자 사용법으로 설명해 줬다. 그리고 나는 그 설명을 받으면서 더 흥분하면서 재빠르게 착석하고 안마를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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