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고민 그리고 결심 (3)
‘…이곳이 바로, 천국?’
폭, 하고 의자에 파묻힌 몸이 의자의 자극을 받아 뭉친 부분이 하나둘 서서히 부드럽게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자꾸만 풀려 오는 입가를 주체하지 못하고 행복하니 그 의자에 온몸을 맡겼다.
“누나, 애들 다 도착했대요. 그럼 한… 40분 뒤에 다시 올 테니깐 그동안 준비해 두세요.”
“어-어.”
그리고 나는 한도훈이 무슨 말을 건네는지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대답하고 마는 큰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러나 당장의 나는 안마 의자가 주는 안락함에 취해 알지 못했다.
그렇게 안마를 다 마치고 침대 위에 널브러져 행복을 만끽하며 휴식을 즐기던 중 그들은 돌연 내 방에 쳐들어왔다.
“누나! 시간 다 됐는데 왜 안 나와!”
“…으엉?”
한참 노곤하게 풀려 오는 잠에 취해 있던 난 갑작스러운 난입객에 멍청하게 대답하자니 서이수가 그런 날 한심하게 보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지. 당장 일어나!”
“으… 싫어어…! 난 방에 있을 거야…!”
그리고 서이수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들춰내며 성질을 냈다. 나는 싫다며 그 끝자락을 잡고 버티는데 불쑥 익숙한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걸어 왔다.
“누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뜬금없는 인사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문가에 빼꼼 머리를 내밀며, 어쩐지 오늘따라 들떠 보이는 이재현과 김시원이 있었다.
‘…아니, 왜 다들 여기 있어?’
내가 황당해하며 그들을 바라보는데,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서이수로 인해 그만 이불을 결국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아…!”
“빨리 준비해! 한도훈한텐 나간다고 말했다며!”
“내가 언…, 아.”
문득, 방금 전 제 실언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한도훈이 나가기 전에 무슨 말을 했지? 뭔가 준비를 하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난 그 말에 아무렇게나 대답했던 것 같다.
“…….”
정황을 대충 깨닫자 나는 제 실책에 머리를 감싸고 말았다. 서이수는 그런 날 한심하니 바라보다가 10분 더 기다릴 테니 그때까지 준비하라며 매정하게 방문을 닫고 나가 버리고 말았다.
***
그렇게 내 평온한 시간은 끝이 나고 말았다.
서이수는 칼같이 시간을 재었고, 가기 싫다는 나를 결국 밖으로 이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수영복 같은 건 구비해 두지 않아서 그냥 검정 반팔과 반바지를 챙겨 입은 나는 멍하니 모래사장 위에 주저앉아 한창 신나게 놀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서로 엎고, 뒤집고, 던져 가며 바다에 빠트리고 노는 동생 놈들의 모습은 정말 물 만난 물고기마냥 신나기 그지없어 보였다.
그렇게 내가 모래사장에 앉아 녀석들이 노는 걸 지켜보고 있을 때,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 고개를 돌리니 저 무리에 유일하게 끼지 않고 있던 반휘혈이었다. 방금까지 없었던 걸로 보아 이 녀석도 막 이 해변에 도착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새삼 같이 놀지 않고 마이웨이로 움직이는 녀석의 모습에 감탄하다가 곧 녀석의 차림새가 눈에 띄었다.
얇은 반팔 카디건 하나 걸쳐 하얀 피부를 드러낸 모습은 이제껏 보지 못한 차림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나이가 어려 몸이 덜 여물었는데도 불구하고 꽤나 잘빠진 몸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수영복 차림새는 당연하게도 여름 태양 아래서 그 미모가 십분 빛을 발휘했다.
“오….”
정말 나도 모르게 감탄하며 멀거니 바라볼 정도로 잘난 모습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녀석을 보는데 반휘혈이 내 옆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안 놀아?”
“어, 응? …아.”
그가 불쑥 걸어 온 한 마디에 정신을 퍼뜩 차린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 내용을 되짚어 파악하자 피곤한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나는 대답하기 앞서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다 시원하게 부딪혀 오는 파도가 시선에 잡혔다. 난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작게 중얼거렸다.
“…나 바다 별로 안 좋아해.”
다시 말하지만, 바다에 대한 기억이라 해 봤자 모래사장에서 특훈이랍시고 굴렀다거나, 폐활량을 기른다며 바다 수영을 한 기억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벌게진 피부에 화상으로 고생한 추억은 덤이다. 그래서 남들이 꺄르르거리며 바다 얘기를 할 때마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었다. ‘으, 그 힘들기만 한 곳을 대체 왜 가?’ 하면서 치를 떨며 싫어하던 곳이 바로 바다였다.
그래서 이번 방학엔 한도훈네의 별장 안에서만 틀어박혀 그 안에 있는 편의 시설을 잔뜩 즐기며 보낼 생각이 가득했었는데, …이렇게 될 줄 몰랐지.
나는 제 팔을 억지로 끌어당기며 방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이를 아득바득 갈던 서이수를 떠올렸다. 그냥 동급생들끼리 재밌게 놀 것이지, 왜 나를 끌어들이려 그리 애를 쓰냐며 화를 내듯 투덜투덜하자 서이수는 돌연 성질을 냈다.
‘아, 같이 놀자고!! 그게 그렇게 어렵냐!!!’
물론, 이 말뿐이었으면 내 발이 그리 쉽게 움직였을 리 없었다. 문제는 뒤이어 던져진 이재현의 말 때문이었다.
‘누나, 이수가 누나랑 놀 거 되게 기대하고 있었어요~.’
‘야, 이재현!!’
그와 동시에 서이수가 얼굴을 확 붉히며 이재현을 노려봤다. 나는 그 반응에 놀라 동생 놈을 바라보다 다시 확인차 이재현과 김시원 쪽을 바라보니 김시원도 맞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누나랑 뭐 할지 신나 하면서 한도훈한테 거기에 뭐 있냐고 묻던데요.’
‘야!!! 이 배신자들아!!!’
김시원이 쐐기까지 박아 주자 서이수는 더 이상 붉어질 수 없다는 것처럼 온몸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직 밖에 나가지도 않았는데 잔뜩 붉어진 동생의 모습을 직접 목도했는데, 어떻게 나가지 않을 수가 있는가. 거참. 이제껏 키운 보람을 여기서 다 느낄 줄이야. 나는 다시 생각해도 흐뭇해지는 광경에 비죽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내가 나오는 건 딱 여기까지였다. 나는 절대 저 바다엔 들어가지 않을 거다. 그 단호한 말에 서이수는 실망한 것처럼 다시 내게 항의했지만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서이수에게 감동을 받았어도 싫은 건 싫은 거였다.
‘혹시 얘도 나랑 바다에서 놀고 싶었던 건가.’
나는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옆에 앉아 있는 녀석을 게슴츠레 바라보았다.
“너도 가서 놀아. 난 여기 계속 있을 거니까.”
이왕 바다에 온 거 저기서 물장구치는 친구들과 함께 뛰노는 게 좋지 않겠어? 이 재미없는 누나와 함께 있는 것보단 백 배는 더 유익한 시간이 되리라 자부했다.
“누나가 싫으면 나도 안 갈래.”
그런데 의외로 반휘혈은 내 권유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아니, 대체 왜? 이왕 여기까지 와서 수영복까지 챙겨 입었다는 건 이 녀석도 나름 놀 생각으로 온 거 아니었던 건가?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 녀석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도리어 녀석은 자세를 편하게 잡더니 정말 내 곁에서 파도치는 바다를 보기만 하고 있었다.
‘정말 안 들어간다고?’
나는 그 모습에 잠시 어이가 없어졌지만 금방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장난스레 우스갯소리를 내뱉었다.
“넌 내가 그렇게도 좋냐?”
실없는 소리란 건 알고 있었지만 녀석이 하는 행태가 참으로 그렇게밖에 안 보였다. 뭐 어차피 아무 대꾸도 안 해 주리라 생각하며 내뱉은 말이었다. 그런데,
“응.”
놀랍게도 녀석은 그 헛소리에 답을 해 주었다. 내가 놀라 녀석을 바라보니 녀석은 날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곤 세운 무릎에 얼굴에 기대더니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
“좋아.”
“어….”
기쁘게 웃음을 그리는 그를 바라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렸다. 심장께로 둔중한 무언가가 치는 것만치 울리는 기분이….
“우픕…!!!!”
들던 순간, 내 얼굴로 강렬한 물줄기가 쏘아졌다. 나는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해 두 팔을 휘저으며 허둥대자 물줄기가 멈췄다. 나는 얼굴을 잔뜩 적신 물을 손으로 황급히 쓸어내렸다.
“읏, 엣퉤퉤! 이거 뭐야, 바닷물…?”
게다가 내 얼굴을 가격한 물은 그냥 물도 아닌 바닷물이었다. 나는 점차 오르는 열에 날 불시에 공격한 놈을 쏘아봤다.
“서이수! 뭐 하는 거야!!”
“흥.”
서이수는 내 항의에 코웃음을 치더니 들고 있던 물총으로 나를 향해 다시 쏴 댔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막으며 피하려 했지만 쏘아지는 물줄기를 방심한 상태에서 피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아, 그만! 그만하라고!”
“그렇게 멍청하니 있으니깐 당하는 거다. 바보야.”
내가 그만하라고 만류해도 서이수는 무엇이 그리도 기분이 나빴던지 불퉁한 기색으로 자비 없이 물을 쏘아 댔다. 결국 참다못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그만하랬지!”
“헹! 싫은데? 싫은뒈에??”
하지만 서이수는 내가 화를 내도 그치지 않고 물총을 쐈다. 녀석의 놀림에 열이 바짝 올라 버린 나는 끝내 자리를 박차고 동생 놈에게 돌진했다.
“헉.”
그리고 서이수는 박차 일어선 내 모습을 발견하고 숨을 들이켜더니,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곤 냅다 도망가기 시작했다.
“하. 너 이 새끼. 딱 뒤졌어.”
나는 살벌하게 중얼거리며 모래사장에 발을 세차게 굴렸다. 그렇게 나의 분노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
“야!!! 서이수!!!!! 거기 안 서?!!”
“서면 뒤지는데 서겠냐!!!”
한창 남매간의 살벌한 추격전이 모래사장으로 가로지르며 이뤄졌다. 그것을 구경하고 있는 반휘혈은 어쩐지 묘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휘익~. 두 사람 다 엄청 빠르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곁에 한도훈이 휘파람을 불며 불쑥 나타났다.
“서이수 쟤는 50미터 뛸 때보다 더 빠른 거 같은데?”
그러면서 자연스레 빈 반휘혈의 옆자리를 슬쩍 차지하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반휘혈은 한도훈을 잠깐 볼 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의 끝에는 한 사람의 맹추격과 필사적으로 도망을 시도하는 한 사람을 뒤쫓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단 한 사람 뿐이려나? 한도훈은 젖은 몸을 가볍게 털면서 반휘혈을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히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왜. 좋아하는 누나를 친동생에게 뺏긴 게 짜증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