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51화 (51/306)

51. 고민 그리고 결심 (5)

반휘혈의 두 눈이 커졌다. 물에 파문이 인 것처럼 차가웠던 얼굴이 깨졌다. 한도훈은 그의 변화를 목도하자 쓴침을 삼키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낯을 굳혔다.

“…정말이야, 반휘혈?”

하지만, 그의 말은 반휘혈에게 닿지 않은 것처럼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반휘혈, 대답해. 너, 이나 누나를… 그동안 그렇게 생각해 왔던 거냐고.”

“…….”

이번에도 반휘혈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굳은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한도훈은 그런 반휘혈이 답답했다. 정말 자신의 생각대로라면… 이것은 반휘혈에게도, 서이나에게도 큰 상처만 남을 길이었기 때문이다.

“반휘혈, 이나 누나랑 휘석이 형은 완전 다른 사람이야. 이나 누나는 네 형의 대체제가…,”

“…쳐.”

“뭐?”

한도훈은 그런 반휘혈을 막고자 황급히 입을 열었으나, 곧 낮은 그의 음성이 들려와 반사적으로 되묻고 말았다. 그러자 반휘혈이 눈동자만을 굴려 그늘진 시선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낮게 뇌까렸다.

“그 입. 닥치라고.”

흠칫, 한도훈은 그 시선과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이 튀고 말았다. 피부를 찌를 듯 다가오는 무거운 공기가 한도훈의 몸을 감쌌다. 처음 받아 보는 낯선 감각이었다. 입 안이 바짝 말라 왔고, 그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반휘혈의 말에 복종이라도 하는 것처럼,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영겁 같던 그 감각은 반휘혈이 시선을 거두자 순식간에 사라지고 한도훈의 몸이 다시 움직였다. 마치 단단히 옭아맸던 밧줄이 한순간에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금 거, 뭐야?’

한도훈은 번뜩 시선을 내렸다. 방금 그 눈빛에 여파인지 손끝이 잘게 떨고 있었다. 그는 찬찬히 그것을 확인하다가 눈을 들어 반휘혈을 보았다.

‘나 방금 쟤 눈빛만으로 겁먹은 거야?’

반휘혈의 위압은 늘 있었던 일이었지만, 이렇게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반휘혈은 아무리 자신이 귀찮게 굴어도 이렇게까지 살의를 내비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박력에 한순간 아무것도 못 하고 굳어 버렸다. 그 사실이 한도훈의 머릿속을 완전히 점령했다.

‘역시….’

한도훈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떨리는 손을 꾹 쥐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역시… 역시…! 멋있어…!!!!’

반휘혈을 바라보는 한도훈의 눈은 두려움은 걷히고 어느새 환희가 젖어 있었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얜 알면 알수록 왜 끝도 없이 멋있을 수가 있어? 어? 왜,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완벽할 수가 있지? 미쳤나 봐!’

내가 이래서 쟤를 안 좋아할 수가 없다니까! 한도훈은 한껏 설레발을 치며 속으로 오두방정을 떨어 댔다. 그의 잔뜩 상기된 볼로 보건대 한동안은 그 주접이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그런 한도훈의 생각을 전혀 모르고 있을 반휘혈은 심기 불편해 보이는 얼굴로 모래사장을 질주하는 남매를 보고 있었다.

“…….”

“휘석이 형 대신으로 생각하는 거야?”

그의 머릿속으로 자꾸만 한도훈이 한 말이 맴돌았다.

‘…아니야.’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로?’ 그러자 그의 말에 바로 대꾸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한도훈이 아닌 자기 자신의 목소리였다. 정말, 진심으로 자신은 서이나를, 누나를 그의 형 대신으로 접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나? 반휘혈은 복잡한 심리를 숨기지 못하고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반휘혈은 천천히 그가 바라보던 이에게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

한도훈이 감격을 떨며 입을 틀어막고 반휘혈이 심란해하고 있는 사이, 모래사장에선 아직도 치열한 추격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누가 이길 거 같아?”

“이나 누나.”

“어, 나돈데. 그럼 내기가 안 되는데…. 그럼 난 5분 내로 잡힌다. 빙수 콜?”

“콜. 난 3분.”

그리고 그런 두 남매를 바라보며 내기를 걸고 있는 두 사람도 있었다. 튜브에 앉아 느긋이 그들을 구경하던 이재현은 모래사장을 휩쓸며 오만 난리를 치며 추격전을 하고 있는 남매들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발이 모래에 푹푹 빠져서 뛰기도 힘들 텐데 둘 다 정말 잘 뛴다.”

“그러게.”

그런 이재현의 감상에 김시원도 공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말처럼 서이수는 지치지도 않는지 잊을 만하면 등을 돌려 물을 쏘아 대 서이나의 발을 늦췄고 서이나는 그 물총 공격에 열이 올랐는지 그 화를 추진력 삼아 더 발을 재빠르게 놀리고 있었다. 지켜보는 입장으로선 정말 재밌는 한편 지치지도 않는 두 사람의 체력에 감탄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너 이 새끼!!! 진짜 잡히면 뒤질 줄 알아!!!”

아이고. 이젠 진짜 죽을 것 같은데. 방금 서이수가 회심의 공격을 날린 모양인지 서이나의 화가 한계에 달한 것 같았다. 거의 악에 받친 수준으로 올라가는 소리에 서이수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 게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이재현과 김시원에게도 보일 정도였다. 두 사람은 그런 서이수를 말없이 애도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어쩐지 심상찮아 보이는 반휘혈과 한도훈을 발견했다.

“…쟤네들은 왜 저럴까, 시원아.”

“……알고 싶지 않아.”

어쩐지 서늘한 한기를 팍팍 뿜어 대며 주위의 기온을 확 내려 버리는 반휘혈과 그런 반휘혈을 좋다며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한도훈을 발견하자 두 사람은 저절로 떫어진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바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저 알 수 있는 건 저기에 끼면 굉장히 피곤해질 일만 남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눈을 흐리며 저 먼 곳까지 뻗어 있는 바다의 지평선을 향해 시선을 돌리던 때, 퍽! 하고 강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곳엔 서이수의 팔과 다리를 짓누르며 위협스럽게 내려다보는 서이나가 있었다.

“아.”

잡혔다. 이재현은 추격전이 끝났다는 걸 깨닫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서이수를 바라보다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3분 언저리쯤 흐른 상태였다.

“…….”

이재현의 입이 세모꼴로 삐죽였다. 김시원은 그 모습으로 바로 답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콩가루로.”

“…알았어.”

이재현은 김시원의 말에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

“으아…. 죽겠다. 진짜.”

나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모래를 털기 위해 씻은 후, 곧장 침대 위로 벌렁 누웠다. 생각도 못 하게 격한 운동을 하고 나자 온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나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 그냥 곱게 잡힐 것이지…. 쯧.”

게다가 그 자식 빠르긴 더럽게 빨랐다. 솔직히 금방 잡힐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간 허투루 내게서 도망을 쳤던 건 아닌 모양이었던지 자꾸만 잡히려는 족족 미꾸라지처럼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 그래서 더 짜증이 치밀어 더 진심이 돼 버렸다. 결국 생각도 못 하게 전력을 다해 추격전을 벌이는데, 서이수가 한순간 중심을 잃고 발을 헛디뎠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칠 내가 아니었다. 나는 바로 지체치 않고 바로 드롭킥을 날려 쓰러트린 후, 동생 놈을 번쩍 들고 바다에 던져 버렸다. 서이수가 살려 달라 비명을 질렀으나, 나는 무시했다. 오히려 분이 풀릴 때까지 바다에 박아 물을 먹였다.

화가 어느 정도 풀렸을 땐 맥이 탁 빠진 것처럼 체력이 훅 닳은 게 느껴졌다. 나는 천근만근 같은 몸을 이끌며 모래사장 위에 털썩 누워 버렸다. 그렇게 비리비리하게 쓰러져 있는 나와 겨우 살아난 서이수를 구출해 낸 건 이재현과 김시원이었다. 각자 한 사람씩 짊어진 그들은 파라솔 그늘 아래에 우리 남매를 뉘어 주는 친절을 발휘해 주었다.

“어구, 어구… 삭신아아아….”

안 봐도 내일 내 몸이 어떻게 될지 뻔할 뻔 자였다. 나는 내일 하루 종일 반강제적으로 침대 생활을 해야 된다는 걸 깨닫자 이걸 좋아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떨떠름해졌다.

‘…그런데, 반휘혈은 어디 간 거지?’

그러고 보니, 잠깐 서이수를 잡으러 간 사이에 사라져 있던 반휘혈이 떠올랐다. 자리에 남아 있던 한도훈에게 물어봐도 그 녀석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글쎄요.’라고 답할 뿐, 제대로 된 답을 해 주지 않았다.

…뭘까? 이 찝찝함은.

나는 알 수 없는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벅벅 머리를 긁었다.

‘아, 몰라. 이대로 잠이나 잘…,’

“누나! 밥 먹으러 내려와요!”

벌떡. 나는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소리를 듣자마자 제 의지를 벗어난 본능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피곤한 건 피곤한 거였고, 배고픈 건 배고픈 거였다.

…그러고 보니 여긴 밥도 해 주지? 세상에, 세상에! 재벌 집 식사 대접을 이렇게 받아 보는 거야?! 떨려 오는 흥분에 나는 몸이 무거운 것도 잊고 신나게 내려갔다.

그리고 한도훈의 안내로 도착한 그곳은….

“허어어….”

천국이었다. 돈지랄이 바로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이리도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초대된 야외는 곳곳에 설치된 에어컨으로 인해 시원했다. 환경 운동가들이 보면 참으로 뒷목 잡고 넘어갈 사안이었지만 그러한 사실보다 더 내 눈을 사로잡는 게 있었으니, 바로 화려하게 펼쳐진 만찬들의 향연이었다.

종류를 따지지 않고 모아 놓은 것 같은 각종 고기부터 해산물 요리를 발견하자 안 그래도 고팠던 배가 우렁차게 울리기 시작했다. 침이 줄줄 흐를 것 같은 입가를 나도 모르게 닦았다. 난 반짝이는 눈으로 예쁘게 플레이팅 된 음식들에게 홀린 듯 다가갔다.

“이, 이거 먹어도 되는 건가요!”

“네. 그럼요. 많이 드세요.”

뷔페식으로 차려진 게 알아서 집어 가란 뜻인가 싶어 확인을 하자 요리사분은 어서 드시라는 것처럼 손짓했다. 나는 그 제의를 거절치 않고 감사하다 인사하며 바로 꼬치를 집어 들었다. 딱 봐도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것이 매우 맛있어 보였다. 저절로 반짝이는 눈을 의식지 못하고 뜨거운 고기를 후후 불어 식힌 후, 조심스레 베어 물었다.

“……!!!!!”

세상에. 어머니. 입 안에서 폭죽이 터져요. 나는 육즙의 하모니에 감격해 볼을 감싸 안고 행복하게 발을 동동 굴렸다. 이게 바로 행복이지! 이 순간만큼은 한도훈 따라 휴가 온 게 후회되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움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날 납치한 건 이걸로 봐주마. 한도훈!’

정말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값싼 분노였지만, 그만큼 맛있는 걸 어떡해! 맛있는 밥에 약한 나로선 참으로 어쩔 수 없는 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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