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고민 그리고 결심 (7)
서이수는 씩씩거리며 흥분에 의해 일으켜진 몸을 앞으로 끌어당긴 채 한도훈을 노려봤다. 그리고 그에 맞서듯 한도훈 또한 눈을 첨예하게 세우며 일어났다.
“…누가 누구 보고 멍청이래? 진짜 멍청이가 누군지,”
“그래서 도훈아.”
하지만 그의 말은 또 끝까지 가 보지 못하고 잘렸다. 한도훈은 제 말을 가로챈 이재현을 서늘히 바라보았다. 고의적으로 말이 끊겨지자 그의 기분은 꽤나 좋질 못했다. 이재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누가 소꿉친구 아니랄까 봐 저런 부분은 쏙 빼닮았다고. 이재현은 고개를 젓고 싶은 걸 겨우 참으며 그를 부른 목적을 꺼냈다.
“너 휘혈이한테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흠.”
한도훈은 그 질문에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털썩 앉히며 등받이에 풀썩 기댔다. 그러곤 삐뚤거리는 웃음을 달며 코웃음을 쳤다. 그 모습이 마치 사악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악마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이재현은 곤란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도훈이, 너 말야….”
“오해하지 마. 장난친 건 아니니까. 그리고 걔가 장난쳐도 눈 하나 깜짝하는 애였나?”
이재현이 뭐라 한마디 하려 하자 한도훈은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그렇긴 하지만.”
그러나 그런 그의 말에도 이재현은 찝찝함을 벗을 수 없었다. 한도훈은 다 좋지만 꼭 묘한 구석에서 사람을 괴롭히는 듯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널 어떻게 믿고?”
그리고 그의 최대 피해자 중 한 명인 서이수는 의심의 눈초리로 한도훈을 노려봤다. 비록 서이나와 반휘혈과의 관계를 알기 위해 협력하긴 했지만, 역시 괜한 짓을 한 건 아닌가 계속 후회하는 중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거 참 섭섭하네~. 내가 얼마나 휘혈이를 생각하는데?”
한도훈은 저를 미심쩍게 바라보는 서이수를 향해 과장스럽게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러나 이 중 그 누구도 한도훈의 저 애처로운 몸짓에 연민을 품지 않았다.
“하지만, 뭐….”
씨익. 한도훈은 재밌는 걸 떠올렸는지 음산하게 웃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위해서 아주 조.금. 나서 주긴 했지.”
후후후…. 무언가 큰 그림을 꾀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모두는 생각했다. 역시 저 녀석은 위하는 척하는 것 같지만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즐기는 변태 자식이 틀림없다고. 그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과정을 보는 입장으로선 소름 끼치는 건 어쩔 수 없는 도리였다.
이재현과 김시원은 떨떠름하게 한도훈을 바라보다 슬쩍 서이수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한도훈 몰래 서이수에게 재빨리 메시지를 보냈다.
[너 대체 쟤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 무슨 일인진 궁금하지 않으니까 빨리 그만둬.]
[바보 같은 짓 하지 말고 빨리 손 놔라]
두 사람은 한도훈과 서이수에게 무슨 얘기가 오갔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엄한 일에 한도훈과 엮여 봤자 좋지 않다는 것도. 이건 친구로서 진심 어린 충고였다.
‘나도 그러고 싶다.’
하지만 서이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손을 놓기엔… 아무래도 자신의 누나가 신경 쓰였다. 서이수는 두 사람의 집요한 시선을 외면하며 서이나가 사라진 건물을 흘끗 보았다. 그리고 그는 묘하게 착잡해지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입을 툭 내민 채, 포크로 쿡쿡 음식들을 찔러 댔다. 그러나 서이수는 스스로도 왜 이리 초조하게 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나가 친절하게 대해 주는 건 반휘혈뿐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에게도 그랬다. 하지만 서이수는 그걸로 심기가 뒤틀린 적은 없었다. 그냥 저 오지랖이 이젠 나뿐이 아니라 쟤네들한테까지 뻗쳤구나. 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불과 약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거기에 처음 반휘혈을 집에 데려왔을 때도 말이다. 그런데 그 생각이 바뀐 게 언제부터였더라. …그리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금방 답이 나왔다. 바로 태산고와의 서열 전쟁이었다. 그 이후로 서이수는 확실하게 느꼈다. 자신의 누나와 반휘혈의 관계가 바뀌었다고. 그때부터 서이수는 왠지 모를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로 반휘혈이 매형이 될까 봐? 솔직히 말해서 그동안은 누나가 누굴 사귀든 상관없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되려고 하는 게 보이자 알 수 없는 짜증이 밀려왔다. 그리고 반휘혈이 동생이랍시고 막 붙어 있는 것도 싫었다.
‘…내 누난데.’
푹, 포크가 고기를 깊게 찔렀다. 그의 언짢고 초조한 심정을 증명하듯 멀쩡했던 음식은 어느새 난도질이 나 있었다. 그러나 서이수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제대로 의식 못 한 채 한참을 멍하니 그러고 있었다.
***
“으음. 여긴가?”
한도훈이 알려 준 대로 내 방에서 오른쪽으로 세 번째에 있는 방을 찾아왔다. 나는 제대로 찾아왔는지 다시 방의 수를 손가락으로 세어 봤다. 하나, 둘, 셋. 좋아. 맞군.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조심스레 노크했다.
“휘혈아, 나 이나 누나인데 들어가도 돼?”
그런데 문을 두드리고서 한참이 지나도 반응이 없었다. 어라, 방에 없나? 나는 혹시 몰라 다시 내 존재를 알렸다.
“휘혈아?”
똑똑, 경쾌한 소리가 같이 울렸지만 여전히 방 안에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진짜 방 안에 없나?
‘얘가 날 무시하…는 일은 없을 텐데?’
두 달, 아니, 불과 한 달 전쯤이면 몰라도 지금에 와서 얘가 날 모른 척할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 방에 없는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들고 있던 트레이를 내려다봤다.
“배고플 텐데….”
아무래도 성장기의 청소년이 밥을 굶는다는 건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오늘처럼 바다에서 놀고 온 날이면 더더욱. 물론, 이 녀석은 안 놀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더운 곳에 있었던 만큼 잘 챙겨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방에 없으면… 어딜 간 거지?”
하지만 그렇다고 반휘혈의 소재가 어딘지는 여전히 불분명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품 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언제나처럼 단조로운 통화음이 기계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런데,
~♪♫♪
“응?”
어째선지 방안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음악에 대해 무지한 내게도 그 소리는 굉장히 익숙한 음악이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 소리는 기본 통화 벨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방 안에 있구나?”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안에 있으면서도 모른 척이라니.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잘만 자신을 따라다니던 녀석의 내외가 당황스러웠다.
‘…아니, 뭐, 자고 있는 걸 수도 있잖아.’
하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자신을 위로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휘혈아, 나 들어간다?”
혹시라도 정말 자고 있다면 메시지를 남긴 후, 트레이만 두고 올 생각이었다. 다행히 자신이 집어 든 건 샌드위치 같은 간단한 요깃거리라 조금 늦게 먹어도 상관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어라?”
그런데 문을 열자 정작 보이는 건 빈 침대였다. 나는 멀뚱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스마트폰을 발견했다.
무시한 건 아닌가 보네. 나는 그 사실에 안도하며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스마트폰 곁에 트레이를 올려 두었다.
“그런데 얘는 어딜 간 거지?”
밥 두고 간다는 메시지를 전송하면서 나는 의아함에 다시 방 안을 휙휙 돌아봤다. 하지만 이 안에선 어느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폰도 두고 대체 어딜 간 건지 슬슬 걱정이 되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겠지만, 그래도 왠지 지난번에 연락이 안 됐던 게 아직 마음에 남아 있다 보니 좀체 걱정이 가시질 않았다. 그래서 바로 나가지 못하고 조금 서성이며 방을 못 떠나고 있는데, 베란다에서 어떤 실루엣을 발견했다.
“어.”
찾았다. 나는 눈을 끔뻑이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굳게 닫힌 베란다 창 너머로 틀에 기대어 무언가 깊게 생각이 빠진 것 같은 그가 서 있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수심이 깊어 보이는 그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손을 들어 베란다 창을 두드렸다.
똑똑, 맑은 유리창의 소리가 울리자 생각에 파묻혀 있던 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에게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손짓으로 인사했다.
“들어가도 돼?”
반휘혈은 갑작스러운 방문객에 놀란 듯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수락을 확인한 후, 문을 열어 그 곁에 다가갔다.
“밥도 안 먹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나는 녀석의 옆에 선 후 가볍게 물어봤다. 반휘혈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곧 고개를 돌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이유는 모르지만 녀석의 얼굴은 복잡해 보였다. 정말 방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는데 잠깐 안 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나는 곰곰이 그 이유를 유추해 보기 시작했다.
해변에서 마주쳤을 때는 괜찮았다. 반휘혈이 먼저 다가왔고, 내게 기쁜 듯 웃어 주기까지 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 참 예뻤지.’
문득 태양마저 그 미모를 축복해 주는 것처럼 그에게 내리쬐는데 한순간 심장이 덜컹일 정도였다. …조금 위험했을지도. 저 마성의 미모는 가끔씩 관심이 없는 나조차 아주 잠깐이나마 홀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와 그런 관계가 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자신을 ‘누나’로서 신뢰를 담고 바라는 녀석의 눈을 볼 땐 더더욱 그 마음이 굳어졌다. 물론 나이도 연관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난 미성년자와의 교제는 꺼리는 마음이 컸다. 그렇기에 나는 이 관계를 내 손으로 직접 깨트리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머릿속에서 자꾸만 일렁이는 그의 모습을 한편에 억지로 치워 버렸다.
“바깥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밥은 챙겨 먹고 해. 그리고 덥잖아.”
오래도록은 아니더라도 짧지 않았던 시간을 밖에서 노출되어 있던 모양인지 반휘혈의 볼이 조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방금까지 시원한 방에 있었던 내 손을 녀석의 볼에 가져다 대어 주며 씩 웃었다.
“어때, 시원하지?”